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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을 주목하라] ① ‘삶은 무시무시한 찬란!’ 시를, 여행을, 찬란을 선택한 시인 - 이병률

이병률에게 『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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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부터 『바람의 사생활』 『찬란』. 그리고 여행 산문 『끌림』. 책 제목은 마치 이 시인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키워드 같다.

찬란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 「찬란」 중, 『찬란』(p.34)

슬픔, 슬픔이 보였다. 이병률은 그의 시에서 슬픔을 쓰고 있었다. 아픔이라는 말 자체는 아픔을 전할 수 없고, 슬픔이라는 말은 으레 슬픔을 고스란히 전하지 못하는 법인데, 그의 시 속에 빈번히 마주치는 ‘슬픔’은 쓸쓸했고, 매정했고, 때론 고요했다. 사랑보다는 이별에 가까운 많은 시들은 그렇게 슬픔을 품고 있었다. 왜 이렇게 슬픈 일이 많은 걸까. 그의 얼굴에도 슬픔이 쓰여 있지는 않을까. 그를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슬픔이 많은 분일 줄 알았어요. 그렇게 첫인사를 건넸다. 이번 시집으로 슬픔을 거두었다고, 한 장(章)을 넘겼다고 말하는 그의 입에서는 슬픔이 들리지 않았다.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슬픔의 양을 다 써 버린 것 같아요. 이제는 어떤 식으로 걷혔고, 다른 뭔가가 오겠다 싶어요. 이제는 슬프지 않지 않을까요?” 찬란, 했다. 우리는 여러 번 찬란을 말했다. 슬픔에 대한 질문들은 그렇게 ‘찬란’하게 되돌아왔다.

찬란은 순간이다. 은근하게 퍼져 있는 햇볕보다는,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가까운 것. 순간의 찬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새로운 곳이고, 여행하는 곳이고, 찬란한 곳이다. 대답의 마디마디를 잇는, 짧지 않은 쉼표 사이에 그는 오롯이 머무르는 듯했다. 앞서 꺼낸 말을 충분히 음미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때론 되묻기도 했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고, 몇 번이나 감탄사를 떨어뜨렸다. 시 속에서 보지 못한 다른 표정과 마주했고, 마치 그 표정은 그의 네 번째 시집에 대한 예고편 같았다. 슬픔보다는 더더욱 찬란함을, 유쾌함을 머금고 싶다는 다음 시집 말이다.

ⓒ 정영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부터 『바람의 사생활』 『찬란』. 그리고 여행 산문 『끌림』. 책 제목은 마치 이 시인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키워드 같다. 은근한 매혹을 지녀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 제목들은 이 시인이 여행을 좋아하고, 머물기보다는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 몇 장을 넘겨보면 당신은 그가 고양이를 자주 부르고, 종종 의자를 응시한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인은 사라지고 사람이 보인다. 사람의 일이 보인다. 살다가 쉬이 놓칠 법한 감정들, 장면들을 그의 시는 불러온다. 그의 이야기들은 낮은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감탄사 ‘아…….’ 여행과 방랑으로 삶의 낯선 것을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그는, 독자들에게 일상의 틈을 내보인다. 시시한 게 싫다고 시시하지 않은 곳을 찾아 떠나지 말고, 지금 여기의 찬란을 보라고.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라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쳐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찬란」

뼈에 방들이 우는 순간,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가는 순간까지 그는 찬란의 이름을 붙인다. 이것은 찬란해지고 싶은 바람이기도 하고, 그동안 슬픔, 어려움, 생활 속에서도 찬란을 경험한 결과이기도 하다. “원래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지쳤다고 할까요. 고요해지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왔어요. 심지어 최근에는 일도 즐겁고, 사람 만나는 것도 즐겁고, 그냥 좀 안 좋은 일도 즐겁게 넘기려고 하는 마음도 생겨나고요. 그런 가운데 들었던 느낌이고, 단어겠죠. 복잡해지고, 욕심내기보다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구나. 많이 돌아다녔구나. 많이 느끼려고 했구나, 사람 안에서 살려고 했구나. 이런 것들을 스스로 인정해 주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찬란이고 기적이고.”


이 안

삶이 여기에 있으라 했다
- 「이 안」 중, 『찬란』(p.25)

때때로 그의 이름을 책의 마지막 장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 편집인 이병률. 지금의 직책이다. 그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바이브랜드 ‘달’의 편집장이다. 처음에는 시집의 앞면에 적힌 그 이름과, 맨 뒤의 편집인으로 적인 그 이름을 일치시키는 것이 조금은 낯설었더랬다. 허나 그는 늘 치열한 생활인이었다. “영화사 전전, 방송사 전전, 잡지사 전전, 출판사 전전, 기획사 전전, 음반사 전전, 아니 전력을 다해 전전.” 그의 이력을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그는 늘 여행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팽개쳐 둔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리라. 이 때문에, 그의 여행은 한 방의 일탈이 아니라 소란스럽지 않은 일과처럼 다가온다.

“문예창작과 졸업 후에 만났던 현실이었죠. 생활을 하면, 나는 시를 못 쓰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둘 다 무척 중요한 일이고,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어서 어떤 식으로든 유지해 왔어요. 시를 쓰고 일을 하는 생활을 오래하면서, 이 둘을 분류하고 따로 놓으려고 노력했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이제는 양쪽 다 가능한 순간을 만들어 낸 것 같아요.”

그는 그렇게 스스로의 리듬을 만들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이런 일이기도 하고, 시를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를 더 거론하자면, 돌아다니는 일이에요. 제가 정말 잘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죠. 시를 쓸 때도 일을 할 때도 어떤 에너지가 있지만, 다니면서 느끼는 에너지는 다른 것 같아요. 다니는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 지갑이 두툼해야 하죠. 졸업을 하자마자 딱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행도 다녀야 되고, 시를 쓰려면 시간도 돈도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미친 듯이 일을 하자!(웃음) 그렇게 일을 하고, 일 년에 3, 4개월은 나를 위해서 시간을 갖자, 이렇게 노선을 아예 정해 놓고 시작했죠.”

이병률에게 일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의 시 속에 등장하는, 일상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단순히 밥벌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가 생활하면서 보는 것, 듣는 것들이 시의 언어로 둔갑한다. 일상의 언어들이 시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시를 쓸 때 만났던 사람들, 영향을 준 것들이 시 속에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시집을 준비하는 3년 정도는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때였는데, 일하지 않을 때 느끼지 못한 것들을 어떤 틈을 통해서 보게 되잖아요. 그것이 시간의 틈일 수도 있고, 일터의 창문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내가 살아있구나, 반응하고 있구나.’ 감각하고, 시로 투영되고, 빚어지죠.”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에게 직업을 물은 적이 있다.
청년은 대답하기를, 자신의 직업은 파리를 여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파리 토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여행하는 게 일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
수많은 표정을 매일매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그 일은 파리에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일과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청년을 우연히 바스티유 광장 근처에서 마주친 적 있는데
내가 먼저 알아보고는 반가워 악수를 청했다.
분수에 고인 물로 손을 씻고 있던 그가 얼른 바지춤에다 손을 닦았다.
「여행 중이니?」
「살고 있는 중이지. 요즘 일이 없거든. 하지만 곧 떠날 거야.」
「어디로?」
「파리로!」
- 「#.22 끌림」 중, 『끌림』

그는 출근길마저 즐겁다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뽐냈다. “여행 오는 기분이 있어요. 오기 싫지가 않아요. 오는 길, 나서는 길, 바깥의 변화. 분명히 이전보다 나무도 키도 자라고 표정도 더 풍부해지는 게 있거든요. 그렇게 생각돼서, 좋은 것 같아요. 사람들도 부대끼고 힘들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좋은 에너지를 주고 지내는 거 같고, 어? 왜 자랑을 하지?(웃음)”

애정 듬뿍 한 출판사 일은 그에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전전해야 할 곳의 한군데라고 생각했었어요. 첫 시집을 이곳에서 내면서, 가까이서 볼 수 없었던 출판사 분위기나 느낌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저것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책은 누가 만드는 걸까? 사람들 분위기는 어떨까? 힘들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연락이 왔고, 그래서 고마웠어요. 겁도 좀 났지만, 해보니까 잘 맞는 일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재미있잖아요. 한 권 한 권 풀어놓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

서너 달에 한번쯤 잠시 거처를 옮겼다가 되돌아오는 습관을 버거워하면 안된다
- 「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 중, 『바람의 사생활』(p.58)

ⓒ 정영
2005년 『끌림』은 많은 독자들을 끌어당겼다. 여행지에 대한 소개도 아니고, 여행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자랑하는 책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여행 그 자체에 대한 산문들.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전할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풍경 사진들이 그렇게 독자의 마음을 끌었다. 설렘에도 보편성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여행과도 같지 않았을, 한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읽고 여러 마음이 공감했다면, 여러 독자로 하여금 ‘나도 그래. 정말 그래.’라는 이야기를 꺼내게 했다면 말이다. (이 책은 아직도 여행 분야 베스트셀러에 등극해 있다!)

“한 권의 책은 대개 큰 메시지를 담고 있고, 어떤 작가는 전 우주를 담으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꼭 세상에 그런 책만 있어야 하나. 저는 그것들을 다 담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을 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심각하지 않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은, 그러면서도 특별한 이끌림이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책은 이제껏 없는 것 같았고, 처음에는 여행 일기를 낼까 했는데 사람들이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일기들을 다른 형태로 조금 조금씩 바꿔 가면서 시도해 본 거죠. 책을 다 읽어도, ‘대체 이 책의 주제는 뭐야.’싶게 모호할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나름 복잡하지 않으면서, 일종의 틀도 좀 깬 것 같고, 타블로 말로는 ‘이 책이 화장실에서 짱’이라고.(웃음) 안다고!(웃음)”

3월을 며칠 앞둔 이 날, 겨울의 흐린 기운을 씻어 내는 듯 봄을 기대하게 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 오는 날씨도 되게 좋아해요. 하늘이 말을 거는 듯한 날, 그런 하늘 보면 ‘완전’ 좋아요.” 독자들이 그의 기록에서 얻는 끌림은, ‘그때 그날’ 저자가 품었던 끌림의 양과 비슷할 터.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에 끌리는 지 알만하다. “저는 좋아하는 게 정말 많아요. 순간순간.”이라며 금세 기분 좋은 미소를 띠우는 그를 본다면 정말이지 그럴 법도 하다.

십여 년간 떠돌았던 50개국의 기록. 이 자발적이고 절박한 여행은 과연 저자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이 대목에서 그는 방랑의 정체를 밝혔다. “이해를 할 수 있을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있잖아요. 운명적으로. 정말로…… 정말로요.(이렇게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으랴!) 정말로 그렇게 태어났어요. 전. 어떤 상황에서도 살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고요. 한곳에만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닌 거예요.”

그는 자신의 정체를 언제 깨닫게 되었을까? “스물일곱 살 때,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자. 놀아 보자, 하고 파리에 갔었거든요.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냈는데, 1년이 지나고, 어떻게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불안한 거예요. 그때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해 뜨면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사람이라 잘 모르겠다’고. ‘행방도 모르고 잘 모르겠다’고.(웃음) 학교는 좋아하는 곳이었고, 적을 둔 곳이었지만, 공부만 하지는 않았어요. 거기서도 계속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그의 여행은 이렇게 한 곳에 터를 두고 움직인다. 그곳은 마치 컴퍼스가 자유자재로 원을 그리기 위해 한 점 위에 세우는 기둥이자,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이 점을 딛고 있기에 그의 바람 같은 움직임이 여행이 되고, 방랑이 된다. “여기서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딛고 있지 않으면, 떠도는 것을 뭐라고도 얘기할 수 없잖아요.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니면서도 힘이 나는 거죠.” 그의 시에서 종종 등장하는 의자 역시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네 다리를 모두 땅에 단단히 딛고 선 의자를 그는 응시한다. 어쩌면 그는 늘 서 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의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일 테다. “안정감이 있죠. 희생의 이미지도 있고요. 절대로 사람이 옮기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잖아요.”


동유럽 종단열차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든 지나가도 됩니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 「동유럽 종단열차」 중, 『바람의 사생활』(p.72)

여행을 다녀오면, 마치 기념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리움이다. 그렇다면 자주 여행을 다니는 그는 어떨까? 켜켜이 쌓이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일까, 매번 다양한 곳의 그리움을 수시로 업데이트하며 살아가는 사람일까? 그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저는 여행을 할 때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만약 지금 내가 헌팅을 하러 온 것이라면, ‘1년 뒤든 2년이든 내가 여기 와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걸 체크하는 일에 굉장히 많은 소비를 하죠. 사람들은 어떤가. 기후는 어떤가, 물가는 어떤가. 음식은 또 어떤가.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자극 받을 수 있나? 이런 것들을 체크하면서 지내는 편이에요. 여행을 다닐 때마다 이전의 후보들은 순번이 뒤로 밀리기도 하죠.

그렇게 돌아와서, 구글이나 블로거들의 사진을 보면서 ‘거긴 지금 몇 도 일까? 그 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을 해요. 그렇게 계속 어떤 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든 그리워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선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고 느끼게 해 주는 에너지 같은 것들이 있죠. 저는 영상, 이미지적으로 예민한 사람인 것 같은데, 선명한 그림 같은 것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죠. 저는 다 꺼내 볼 수 있으니까.”


비단 누구나 여행을 바라고, 여행자를 꿈꾸지만, 누구나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가 타고난 여행자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신이 저를 잘 빚어 놓으신 게, 외로움과 거리를 두게끔 만들어 놓으셨어요. 마치 외투처럼 벗어서 놓을 수 있고, 저에게서 분리해 둘 수 있게 하신 거죠. 외로움과 싸우느라 중심을 잃는 경우도 있고, 거기에서 장애나 문제가 생겨나기도 하는데. 외로움을 떨쳐 내야지 마음먹는다고, 노력한다고 쉽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는 조립이 가능한 것 같아요.(엄청난 축복이네요!) 네, 찬란합니다~(웃음)”

이것이 그가 어디서건 여행하는 내내 깨어 있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저는 외로움을 달래거나 해소하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건강하게 계속 여행을 잘할 수 있는 거죠. 다니면서도 좀 슬프거나 인간적인 고독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마음먹은 대로 ‘즐겁다!’ 하는 게 가능하게 된 것 같아요.”


무심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당신은
엄지 손가락이 없다
(…)
당신 때문에 내가 열인 것을 알겠다
- 「무심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중, 『찬란』(p.55)

ⓒ 정영
독자들은 이병률의 시를 찾고, 읽고, 교감한다. 시를 읽고 선뜻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독자들의 리뷰, 적지 않은 판매고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무엇보다 서사,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온다. 일상의 언어로 펼쳐지는 구체적인 사건은 쉽게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메시지보다 이미지가 먼저 닿는 시들, 때로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 것 같은, 그런 시들을 만난다.

"제 시 속에는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저는 좀 적어요. 저는 제 시 속의 사람을 통해서 거울삼아 저를 봐요. 사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 시인의 임무나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정한 것이 있기 때문에, 시가 이야기로 풀리는 경향이 있고요. 또 한 가지는 영상적인 이미지가 많죠. 말씀 드렸듯이 기억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에 약간만 진행시키면 이게 이야기가 되고 드라마가 돼요. 제가 보여 주는 장면은, 그저 뭔가 곧 벌어지기 직전의 장면들이고 영상들인 거죠.

첫 시집을 낼 때, 이렇다고 정해 놓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 시를 쓸 때, 십여 분의 이야기를 몇 장면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그런 시를 쓰게 되지 않을까, 막연한 예측을 했었어요. 독자들은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되죠. 조금은 모호하지만, 한편 굉장히 구체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어서, 좀 인상적으로 봐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의 시 쓰기 역시,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문장을 파고들면서 시작하곤 한다. "어떤 분들은 전혀 메모도 안 하고, 영감에 의해서만 쓰기도 해요. 예전에 제 스승, 최하림 선생님께 여쭤봤어요. ‘선생님, 시는 어떻게 쓰세요. 궁금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써, 그냥 쓰지.’ 하시더라고요. 알려 달라고 졸랐더니, 그러시더라고요. ‘참고 안 쓴다. 어느 날 그것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온다.’ 우와, 역시! 박수!(웃음) 그렇게 기다렸다가, 생각이나 이미지를 잊기도 하고, 다른 것과 부딪기도 하다가 뭔가 확 넘칠 때, 그때 적어요. 그런데 그런 경우가 저에게도 있더라고요. 확 쏟아지는……. 나중에 밝은 날 보면 부끄러운 글들도 있지만.(웃음) 그럴 때 행복하죠.”

그러니까 봉우리에서 꽃이 활짝 피듯이, 익은 밤송이가 절로 입을 벌리듯이 그렇게 시가 온단다. “어우, 찬란이에요.(웃음)” 취직하고 선생님을 뵈러 갔을 때 선생님이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가 걱정이구나.’ “출판사 일을 잘 아시니까요. 그래도 30분씩 시를 생각하고, 적은 걸 꺼내 놓고 멍하니라도 앉아있으라고 하시더라고요. 매일 그럴 순 없지만, 노력은 해요. 꼭 시를 쓰는 것만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 시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이런 것도 시인이 할 일이니까.”


시작이 있었다

가시 하나 허공에서 내려와 살갗에 박힙니다 가시를 빼내려 불 밝히고 안경을 집어 써봐도 가시 하나 잡히지 않습니다 손가락으로 밀어내도 따가울 뿐 우연은 털어지지 않습니다 맨밥을 우겨넣고 물로 넘겨봐도 우연은 멀리로 가 앉지 않습니다
- 「시작이 있었다」 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p.76)

학생 시절, 시인이 될 줄 알았느냐고 묻자, 금방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는 중학교 때부터 써 왔기 때문에, 시를 쓰고 살겠다고는 생각했어요. 원래 이야기, 서사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에 입학해서는 막연히 희곡이나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 싶고 망설여지기도 했죠. 그랬는데, 최하림 선생님이 어떤 저에게 뭔가를 주셨어요. 시를 쓰고 살아도 될 팔자의 녀석이라고 선생님이 생각해 주셨는지, 무언의 그런 것을 제가 받았는지, 그때부터 그렇게 되어 나갔어요. 학교라는 곳은 예비 시인처럼 살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요. 이근배 선생님, 오규원 선생님께도 배웠는데, ‘시를 못 쓴다. 나가 죽으라고는 안 하셨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시인이 되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죠.”

시인이 되기로 ‘선택’한 그에게, 그를 사로잡은 시에 매혹에 대해 물었다. “어느 시대건 중요한 것은 휴머니티인 것 같은데, 그게 가볍게 생각되고 있는 시대인 것 같아요. 물론 어느 시대건 마찬가지로 우리가 왜 인간적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을 거고요. 사람한테 중요한 것, 사람이 살면서 놓치고 사는 것들이 시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생각지 못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시 속에는 그런 것이 있으니까, 시가 필요하죠. 사람을 통해서도 공부가 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한 틈을 시가 메워 주는 게 있어요.”

그 역시 다른 사람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럴 땐, 그대로 놓아두어도 된다. “한 줄이든, 한 편이든 정말로 내 마음과 같은 시가 있을 거예요. 그럴 때 이 시인의 얼굴을 보고 싶고, 시인과 술 한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이해가 안 되는 시들이더라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으로서 굉장히 자극이 되고 든든해요.”

시를 쓴 사람으로, 독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손을 내젓는다. “접근하고 읽는 데에 방법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돼서 읽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애써서 시란 장르가 이러하고, 이렇게 이해해주세요, 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우연히 잘 맞아서, 이 시와 내가 통했다는 느낌이면 된 거죠.”

그는 이전에 쓴 자신의 시를 다시 들춰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식이든 사람은 앞으로 걸어나가는 존재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흠이 보인다고요. 꼭 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는 흠이 있게 마련이고, 창피하고 안 해도 될 일을 저지른 것 같고 그렇죠.”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는 앞으로 쓸 시다. “그동안의 제 시를 말하라면, 쓰여진 시가 있을 뿐이죠. 에둘러 말하자면.(웃음)”

대신, 그가 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시인 몇 명을 추천해 주었다. 나희덕, 문태준, 김소연. 이들의 시 역시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접근이 편안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에게 시란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그는 아주 짧게 대답했다. “절대. 자아. 유일한 절대…… 이런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데요?(웃음)” 그는 이야기 중에서도 몇 가지에 있어서는 굉장히 단호했는데, 바로 시와 여행에 관한 대답을 할 때였다. 그러니까, 시와 여행은 그에게 있어서 확실한 어떤 것이다. ‘절대, 확실히, 운명, 유일한.’ 그러니까 이런 것은 아주 단단한 말이다. 시인과 여행자는 떠돌지라도, ‘절대, 혹은 운명’ 이런 말은 ‘결코’ 떠돌지 않는다. 컴퍼스의 중심같이. 이렇게 단단한 것이 있기에, 그는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가 보다.

평상시의 여가 시간에도 항공사 사이트를 클릭한다는 그. “서울에서 상파울루 왕복 비행기를 찾아봐요. 멕시코 시티에서 몰디브도 넣어 봐요. 그날 스케줄이 어떤지 날짜를 봐요. 있으면, 오~ 좋은 거고. 또는 이건 너무 비싸! 포기, 포기! 물론 갈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서 혼자 노는 거죠. 그러다 싼 티켓이나 날짜가 맞는 티켓이 있으면 구매도 하고. 제겐 일종의 게임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는 천생 여행자다. 일상이 지루할 틈이 없겠다는 말에, 냉큼, “없어요, 없어요.” 외치는 그는, 아마 오늘 아침도, 내일 아침에도 파주 어느 곳에서 홀로 여행을 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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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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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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