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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찾아오는 불청객과 여행하기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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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가 안 되고 변비가 지속되는 신체적 증상과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깊은 우울함이 더해진 심리적 증상이 한 달에 1/3 가량이 지속된다. 이렇게 불완전한 상태에서 낯선 길 위에 서 있다.

나는 생리하는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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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토록 평화로운 풍경이 눈 앞에 있건만……


해발고도 3,800m의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티티카카 호수가 따사로운 태양 빛에 반짝이고 있다. 하늘과 가까운 호수이니 그 빛이 더욱 또렷할 수밖에. 연평균 기온이 12℃인 온화한 마을을 거닐며 동네 사람들과 정답게 인사 나누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두통’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뱃속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였다. 여행 중 여자로서 ‘대략난감’한 시간이 매달 찾아온다. 생리일이다. 한라산 가장 높은 봉우리가 2,000m랬지? 높이가 그 두 배인 코파카바나야말로 고산병 치료제로 유명세를 떨친 그 약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씩 고통을 잠재우기 위한 진통제도. 3,800m 고도에 무참히 공격당한 생리통이었다.

 

여기에 더해 배란일에는 이 초콜릿이 먹고 싶고, 저 가방이 사고 싶은 소비 충동까지 들이닥친다. 소화가 안 되고 변비가 지속되는 신체적 증상과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깊은 우울함이 더해진 심리적 증상이 한 달에 1/3 가량이 지속된다. 이렇게 불완전한 상태에서 낯선 길 위에 서 있다. 여행이 아무리 좋다 한들 생리가 찾아오면 내 집 이불 속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배를 움켜쥐며 이불 속에서 침묵하는 여자를 두고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잠깐 나갔다 올게’라는 말을 던지고 반나절이 되었건만 소식이 없다. 거동조차 힘든 이 몸을 보살펴 달라고 요청한 건 아니니 어딘가 동네 산책이라도 나간 거겠지.

 

생리 때 찾아오는 ‘통증’이라는 불청객 다음으로 여행 중 난감한 게 또 있다. ‘탐폰’을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인도, 네팔, 미얀마 등의 나라가 그랬고 남미에서는 탐폰이 무척이나 비쌌다. 생리대, 탐폰 그리고 생리컵의 유무에 따라 그리고 그 가격이 합리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한 나라가 여성의 몸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질 내에 삽입해 생리혈을 받아내는 실리콘 재질의 생리컵은 반영구적으로 사용하는 데 반해 값이 싸며 무엇보다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약외품으로 분류돼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반면 독일은 큰 마트에만 가도 몇몇 종류의 생리컵을 손쉽게 살 수 있고 북유럽에서는 여성용 공공화장실 변기 옆에 작은 세면대를 설치해 생리컵을 씻을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한다.

 

여행 떠날 때만이라도 ‘잠시만 안녕. 다녀와서 예뻐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어르고 달래 생리 이 아이와 이별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 이별을 감행한 적도 있다. 생리주기 조절약 즉 피임약을 미리 먹어서 여행 날짜에 맞춰 생리 주기를 바꿔 버리는 방법을 썼다. 온천도 가야 하고 호텔 수영장도 이용해야 하는데 탐폰도 영 걸리적거리고 땅으로 꺼지는 이 마음까지 여행지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와 나는 생리와 배란일을 공유하는 사이다. 내 배는 살살 아파지는데 그 남자만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게 놔둘 수 없다는 고약한 심보는 물론 아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날 선 감정이 그 날따라 팽팽해지는 걸 경험하고 나니 서로가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남자가 잠시 내 곁을 비운 건 지금은 누가 뭐래도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던 게 아닐까? 창문 밖으로 티티카카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본다. 뱃속의 요동도 잔잔해지길 바래본다.

 

 

 

조금 더 다정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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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하나 주세요. 그런데 아저씨, 월경에 대한 표현이 이리 많은 줄 알았어요?


숙소 밖으로 나왔다. 방에는 그 여자만 남았다. 이럴 때는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상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를 보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달리 할 일이 없어 호수 한 켠에 앉아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본다. 매달 찾아오는 유세 아닌 유세는 왜 그 여자 만의 몫인가. 요동치는 상대방의 호르몬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호숫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 시간마다 약을 챙겨 먹으면서 날카로운 고통을 견디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에 비하면 잠시 갈 곳 없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내 처지쯤 뭐가 문제인가.

 

이전에는 월경月經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남자친구보다 여자친구가 많은 나이지만 친구들은 그것만큼은 내가 넘지 못할 비밀의 문 뒤에 숨겨 두었다. 물을 곳이 없으니 생리生理라고 해야 하는지 또는 멘스menstruation라고 불러야 할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비밀스러운 생리 작용을 목도하게 된 것은 2년 동안 여행을 떠나 그 여자와 24시간을 함께 지내면서이다.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니 그제야 여자들의 고통이 힘껏 움켜쥐어 부서진 알약 부스러기만큼 내게 다가왔다. 평생 직장생활을 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하루 중 얼굴을 봐야 고작 몇 시간이니 피하려면 얼마든지 그녀의 고통의 시간을 피할 수 있었다. 일터에서 만나는 다른 여성들도 그녀와 같은 힘겨움을 한 달에 한 번씩 마주했겠지만 자신의 생리를 숨겨야 하는 사회에서 남성인 나는 그녀들의 어려움을 짐작도 하지 못 했다. 모두 숨겼다. 심지어 유년시절에는 생리하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조차 못했다. 그녀는 매달 찾아오는 고통의 경험이 없는 삼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지했다.

 

숙소 창밖으로 투명한 호수 위를 톡톡 튀어 오르는 햇빛이 보인다. 창문을 열면 먼지 하나 없는 맑은 공기가 쓱 하고 내 몸 깊숙이 훑고 간다. 하지만 그 여자는 몸에서 피를 쏟아내는 동안 어두컴컴한 방 안에만 머물렀다. 마치 그 은밀한 생리 현상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에 길든 것처럼.

 

생리에 대한 표현으로 ‘달거리’라는 말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앓는 전염성 열병. ‘전염병’이라는 단어에서 ‘월경’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느껴진다. 네팔 서부의 어느 마을에서 발생한 비극을 기사로 접했다. 월경 중인 여성은 불경하여 신을 분노케 한다며 ‘월경 오두막’이라는 공간에 격리시킨다고 한다. 그곳에 갇힌 소녀들은 제한적인 영양 섭취로 죽거나, 추위를 피하려고 불을 지피다가 질식사 했다. 미개한 시골 마을이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만의 생리 현상을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는 사회라면 21세기에도 가능하다.

 

매달 치러야 할 일 월사, 月事은 지나가기 마련 경도, 經度 이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신 아파해 줄 수도, 더 잘 듣는 진통제를 만들지도 못한다. 고작 갑작스럽게 생리용품이 필요할 때 편의점에 가서 사다 준다거나 쉽게 그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잠시 자리를 피해 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이토록 힘든 시간을 매달 겪어야 하는 그 여자에게 조금 더 다정할 것.

 

그 여자를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해 있는 동안 궁금하기만 하고 찾아보지 않았던 ‘생리’에 대한 뜻을 찾아봤다. 뜻밖에도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며, 잠을 자는 일상적인 의미의 ‘생리 현상’과 같은 단어였다. 살아있는 육체라면 당연한 일을 우리는 왜 그리도 터부시하였을까. 월경과 비슷한 말로 월객月客이란 표현이 있다. 매달 찾아오는 손님이라니! 나만이라도 달마다 그 여자에게만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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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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