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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두려움을 마주하며

신해욱 『syzygy』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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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이 낯설게 붙어 있는 단어를 통해 ‘나’라는 것이 어떻게 비스듬히 이 세계에 붙어 있는지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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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가벼움의 예술이다. 언어를 비우고, 생각을 비움으로써 다시 언어를 풍요롭게, 생각을 무겁게 만들어간다.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생각을, 하나의 단어를 그저 남김으로써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인식과 얼마나 어긋나 있었는지를 깨닫도록 한다. 그렇기에 시는 더 멀리 날아가고, 더 낮게 파고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신해욱 시인의 시에서 배웠다. 습작생 시절부터 마르고 닳도록 읽은 것이 그의 『간결한 배치『생물성이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신해욱 시인이 보여주는 놀라우리만치 가벼운 언어와, 그것을 통해 순식간에 확장되는 인식의 순간을 항상 놀라는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두 시집이 동일한 주제를 유지한 채로 더 나아간 사유 속에서 다른 세계와 언어를 펼쳐 보이는 것을 보며, 시인이 걸어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신해욱 시인의 시의 요체는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나’라는 관념을, 사유를 가로지르는 감각으로 묘파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신해욱 시인의 시에서 배웠다.

 

지난 2014년에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인 『syzygy가 등장했다. 이 낯선 이름은 매우 여러 뜻을 갖고 있다. 'syzygy'란 수학의 개념이며, 천문학의 개념이고, 생물학과 심리학, 철학의 개념이라 하는데, 삭망, 연접 등 대체로 어떤 붙어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시인은 이 낯설게 붙어 있는 단어를 통해 ‘나’라는 것이 어떻게 비스듬히 이 세계에 붙어 있는지 표현한다.

 

검은 개가 똥을 먹었다.

 

검은 개의 혓바닥이 나의 영혼을 핥았다.

 

검은 개의 눈이 나를 피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어서

 

나는 슬프고 더러웠다.

 

추문이 깊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비밀을
개와 나눌 수는 없었다.

 

- 「개의 자리」 전문

 

똥을 먹는 검은 개가 나를 핥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것은 불쾌한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혀가 나를 핥을 수 있는 혀일까. 사랑의 관습은, 혹은 욕망이라는 눈가리개는 우리로 하여금 나를 핥고 있는 혀가 무슨 혀인지를 잊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그 사랑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다시 사랑이라는 관습의 복잡하고 난감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어서// 나는 슬프고 더러웠다”는 고백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리라.

 

이 시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망설이는 시다. ‘나’라는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할 수는 없다는 것.(“태어날 때부터 지닌 비밀을/ 개와 나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시는 아니다. 오히려 이 시가 명징하게 가리키는 것은 관계 맺기란 어떤 순수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나아가 ‘나’라는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것. 신해욱 시인이 『syzygy에서 도달한 ‘나’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나’로 있는 일이 너무나 어렵고, 결국 끝없이 어떤 더러움을,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

 

영물들에게 둘러싸여
눈부신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동심원들이 찰랑거렸습니다.

 

깊이
깊이
아주 깊은 데까지 젖은 돌이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습니다.

 

바꿀 것이 있는데

 

나의 아름다운 악몽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지평선이 없었습니다.


- 「체인질링」 전문

 

신비로운 영물들과 함께 보내는 경이의 세계는 하룻밤으로 끝나고,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나의 아름다운 악몽”이다. 그 하룻밤이 아름다운 악몽이란 뜻이기도 할 터이고, 한편으로는 밤이 끝나고 찾아오는 진짜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할 터이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경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두려움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지평선이 없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시인은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체인질링’이란 도깨비와 몸이 바뀌어 태어나는 아이 혹은 뒤바뀐 아이 그 자체를 뜻한다. 시인은 뒤바뀐 세계를 마주하며, 자신이 ‘체인질링’이었음을 자각한다. 사랑의 환상, 시의 경이, 진리의 일시적인 현현, 그 놀라운 시의 위업에서 잠깐 깨어나, 공포스러운 무엇인가를 마주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진정 시가 수행해야만 하는 다른 곳으로 떠나기 아닐까. 시인은 언제나와 같이 다른 곳으로 일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진실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바꿀 것이 있”다는, 그 자각이 ‘나’를 아름다움과 놀라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꾸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새로운 ‘나’가 된다. ‘나’에 의한 ‘나’의 갱신, 그렇다, 시인은 스스로 ‘체인질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syzygy신해욱 저 | 문학과지성사
일상에서 채록됐지만 살짝 현실을 비껴가는 겹겹의 시간들, 검게 타들어가거나 하얗게 명멸하는 언어들, 그리고 ‘나’에게서 비롯됐으나 매일 아침 변신을 거듭하는 무수한 ‘나-들’의 투명한 목소리들이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에 남겨놓았던 “신해욱의 웜홀”은 이번 시집에서 좀더 전면화된 모습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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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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