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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꼭 잡았다. 놓치면 다시 못 잡을 것 같아서

독일,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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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상처 낼 만한 말만 골라 하고, 약점을 잡아 집요하게 물어뜯는 냉전의 시대였다. 그렇게 장벽이 되어 서로 건널 수 없도록 우뚝 솟아 버렸다.

베를린, 길을 잃다

 

남녀, 여행사정 19-01@베를린.jpg

 아저씨도 길을 잃었나요? 역시 혼자는 외로워요.

 

이렇게 말하면 어이없을지 모르겠다. ‘여행이 두려워 혼자서는 떠나지 못한다고.’ 그럼 세계여행은 어찌했으며, 떠날 수 있었던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났느냐고 물을 것이다. 지인 중에는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이들이 꽤 있다. 20대 초반 나이에 세계 여행을 다녀온 H와 S. 이들은 강도에게 휴대폰을 뺏기고, 성추행도 당하고, 응급실에도 실려 가는 등 여행지에서 겪게 되는 고초 플러스 젊은 여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까지 수많은 사건, 사고를 달고 다녔다. 나라면 어땠을까? 낯선 장소에 홀로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다. 범죄자를 목도하고 있는 것 마냥 긴장하고 몸이 얼어붙는 것은 물론 동공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손은 흥건히 땀에 젖는다. 아마 H와 S 같은 일을 겪었다면 엉엉 울다 그 자리에서 귀국 편 티켓을 샀을 것이다. 농담이 아닌 게 10년 전, 캐나다 밴쿠버에 워킹 홀리데이로 가서 2주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전적이 있다. 혼자 한 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런 내가 그 남자와 여행을 떠났다. ‘옳다구나. 너 잘 걸렸다. 앞으로 평생 내 여행 메이트 하자’ 뭐 이런 심정으로 결혼을 한 건 아니나 그 남자가 신혼여행지에서 보여 준 쓸모 있는 언어 머리와 길 찾는 능력을 장착하고 있는 걸 영악하게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의 건장한 체격도 무시할 수 없다. 굵은 뼈마디와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축구 선수 뺨치는 코끼리 허벅지를 지녔으니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체격이 좋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상은 적군에게 막 돌을 던지려고 하는 다비드 조각상의 팽팽한 근육과 균형미 대신 쳐진 살과 피하지방으로 이루어진 비루한 몸이지만 상관없다. 진짜로 싸울 건 아니고 옆에 건장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범죄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24개월, 24시간을 함께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베를린에서였다. 시내 관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가 시작이었나 보다. 무엇이 맘에 안 들었는지 그 남자가 잔소리를 퍼붓는다. 말도 없이 지하철에 앉아 있는 베를린 사람들 사이에서 그 잔소리는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공공장소이니 내려서 이야기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그 남자는 한번 시작했다 하면 묵은 지 마냥 마음속 켜켜이 쌓아 두었던 서운했던 일들을 모두 쏟아낸다. 묵은 지는 맛있기라도 하지 그 잔소리는 곰팡내만 난다. 봉인을 풀지 않으려고 꽁꽁 싸매 두었는데,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혼자서는 숙소도 못 찾아가는 걸 아니까 공공장소에서도 거리낌이 없는 그다. “자꾸 쥐 잡듯이 악랄하게 굴면 머릿속 GPS를 풀가동시켜 혼자 갈 거다.” 그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내게 상처 주기 위해 가장 큰 약점을 건드렸다. 머리는 두 개이나 한 몸으로 태어난 샴쌍둥이처럼 여행지에서는 그 남자 곁을 한시도 떠날 수 없다. 혼자서는 쪼그라드는 심장을 어쩌지 못한다는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 남자다. 유감스럽게도 남자는 아직도 ‘주제에’라는 그 말이 상처가 된 걸 모른다. 나는 당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바보 천치일 수 있지만 당신에게 존경받고 싶어하는 파트너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싸움은 서로의 약점을 쥐고 흔들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후회하면서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사랑은커녕 존중하며 살아가겠다던 약속은 저기 먼 안드로메다에 날려버리곤 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영원히 그 남자로부터 사라지기로 작정한 사람 마냥 뒤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지도를 읽는 머리도, GPS 기계도 없이 말이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베를린 장벽만큼이나 높았다

 

남녀, 여행사정 19-02@베를린.jpg

 Time isn’t passing. It’s you passing.

 

베를린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고 꼬인 우리 사이부터 풀어야겠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여자는 한 달 내내 같은 길로 다녀도 늘 새로운 곳인 것처럼 낯설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날 도착한 외국의 동네에서 만취해도 완벽한 귀소 본능歸巢本能을 발휘하는 나로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감각 기관이 신비롭다.

 

그 여자가 매번 감탄하는 나의 방향 감각은 예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주변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그 불안과 초조가 길을 찾게 만든다. 생전 처음 도착한 장소도 잘 찾아다니는 것도, 여행 중에 사건, 사고가 많지 않은 것도 모두 내가 예민하기 때문이다. 눈매는 서글서글하고 통통한 바디라인에 사람 좋은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여 ‘당신의 예민함은 대체 어디에 묻어 있나요?’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 예민함은 그 여자한테만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고백처럼 길 찾는 것만 무심하면 좋으련만 나를 대하는 태도까지 놀랄 만큼 무신경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내 안에 예민함이 울부짖는다. ‘그 여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베를린 구석에 모아놓은 장벽의 흔적을 보고 온 날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해야 쿨한 거야!’ 라는 듯 나의 약점을 아무렇지 않게 들추고, 관심사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그 태도에 내가 발끈하면 상황만 모면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미안해’를 뱉는다. 그나마도 ‘미안하지 않으냐’를 수차례 강요해야 나오니 속이 터진다. 나도 사람이라 그런 태도에 지친다. 플랫폼을 뛰어가는 그 여자를 잡지 않았던 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분명 나이기도 했고 ‘얼마나 잘 찾아가나 한번 보자’라는 옹졸함도 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뱉는 독설에 비하면 내 가시쯤은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그날 우리가 보고 돌아왔던 베를린 장벽이 그러했을 것이다. 상대방을 상처 낼 만한 말만 골라 하고, 약점을 잡아 집요하게 물어뜯는 냉전의 시대였다. 그렇게 장벽이 되어 서로 건널 수 없도록 우뚝 솟아 버렸다.

 

길을 못 찾고 멈춰 서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운 좋게 집을 찾아 들어갔나?’ 내심 기대를 했지만 그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부터는 ‘애 잃은 부모’의 심정이다. 지하철역으로 달려가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이 골목으로 들어가진 않았는지 혹시 저 골목에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숨이 가뿐 지도 모르고 뛰어다닌다. 1시간을 헤매고 나서야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쓸쓸히 길을 걷고 있는 그 여자를 찾았다. “야! 이정표를 봐도 집을 못 찾으면서 땅만 보고 걸으면 어쩌냐!” 베를린 장벽이 아직 있었다면 그 여자는 총부리를 마주하고서야 멈췄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을 꼭 잡았다. 놓치면 다시 못 잡을 것 같아서. 그 때는 어렴풋이 눈치 챈 것들을 지금에서야 그 여자의 글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 너울 치던 마음이 잔잔해지고 물 속에 가라 앉은 돌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서야 서로의 날 선 가시의 정체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여자가 내게 존중 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처럼 나 역시도 그랬다. 베를린 TV타워를, 템펠호프 공항Berlin-Tempelhof Airport을,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 Gate을 그리고 커리 부어스트Currywurst 가게를 찾는 내비게이션이나 가이드가 아닌 대화를 나누며 함께 길을 찾는 상대가 되고 싶었다. 그날 이후, 손바닥 뒤집듯 서로의 태도가 바뀌면 좋으련만 그런 판타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다투고, 미안해하지 않으며, 모진 말도 하지만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사라지기까지 긴 대화의 시간이 필요했듯이 우리에게도 손을 놓치지 않고 함께 걸을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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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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