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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발레를 등록하게 된 학원등록중독자

학원등록병 중증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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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각박한 사회가 나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양해를 구해오는데, 나마저도 자신에게 더 이상 양해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배우자, 나중에 연봉이 오르면 하자, 혹은 이미 배우기엔 너무 늦었어 등과 같은 치졸한 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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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pixabay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초조해진다. 아마도 이 증상은 그것에 중독되거나 병에 걸리면 나타나는 현상일 터. 나는 종종 그런 증상이 보일 때가 있다. 학원등록병, 혹은 학원/취미 중독쯤으로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유년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학원을 제때 다니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평일을 좀처럼 ‘학원’이라는 공간에서 보내지 않으면 나태해진 기분이 든다. 학원에 가지 않음으로써 죄를 짓는 것 같고, 나 자신을 학대하는 강박에 사로잡힌다고나 할까. 음, 쓰고 보니 부정해왔지만 나 학원등록병 중증이 맞는 것 같다.


어쨌거나 2016년의 목표였던 일본어 초급 떼기는 3개월 만에 ‘일본어로 대화하기’의 공포에 휩싸이면서 실패했다. 모국어인 한국어로도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려워하는 실정이라 제2외국어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래도 학원을 가는 시간만큼은 기뻤다.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해가는 숙제, 주말에 펜을 잡고 암기하는 시간, 어쩌다 트위터에서 본 일어를 해석할 수 있을 때라든지 말이다. (음, 정말 중독 맞네.)


2017년은 마땅히 당장 하고 싶은 학원등록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어영부영하다 보니 3개월이 훌쩍 지났다. 회사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슬슬 발동이 걸렸다.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결제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 것. 연초에 피아노를 다시 배우자라는 생각은 악보를 보는 법까지 다 까먹은 나에게 가혹한 것 같아 접었으나, 매일 회사-집-술 하러 다니는 나 자신을 구제하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각박한 사회가 나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양해를 구해오는데, 나마저도 자신에게 더 이상 양해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배우자, 나중에 연봉이 오르면 하자, 혹은 이미 배우기엔 너무 늦었어 등과 같은 치졸한 양해.


그 날, 나는 오랫동안 선망했던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회사와 집 사이에 위치한 학원을 가 3개월 수업을 끊었다. 바로 발레 초급반 코스. 한 번도 배운 적 없고, 할 줄도 모르는 발레를 배우고 싶었다. 대학생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나는 애기를 낳으면 발레 시킬 거야.”라고 농담했었던 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이미 난 늦었어’와 ‘발레를 하고 싶어’가 결합한 소망이었다. 그리고 ‘왜 난 발레를 안 가르쳐줬어’라는 원망도 있었다. 발레수업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한 대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발레 공연을 보고 난 뒤, 억울한 감정까지 들었으니까. 이렇게 아름답고 솔직한 몸의 언어를 왜 그동안 몰랐는지 슬펐다. 그러고 보면 취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열등감을 풀기 위한 어떤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인이자 부업으로 학원등록자인 나는 이렇게 성인 취미발레를 등록했다. 학원 수강비보다 레오타드, 발레 스커트 등 장비 마련비가 더 많이 나갔지만, 후회는 없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내 몸을 이리저리 접으려고 노력하면서 발레 선생님을 본다. 우연한 몸과 아무렇지 않게 내려뜨렸지만 세련된 곡선들을 발견하면서 황홀해진다. 몸의 언어를 표현할 수 있고, 잠재되어 있는 힘이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해가면서. 물론 나의 현실은 앙바와 앙 아방도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로봇인 상태.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1년을 다니는 걸 목표로 해보련다. 언젠가 토슈즈를 신을 날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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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유리(문학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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