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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관> 잊힌 가치를 옹호하는 우리 시대의 희귀종

게임은 인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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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나마 판타지로 구현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홍콩 누아르와 같은 ‘싸나이’ 영화를 부러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제 희귀종에 가까운 <보안관>의 대호 같은 이를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안쓰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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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주 감독은 1980년대 생이다. 이 세대는 영화의 세례를 담뿍 받고 영화계에 들어온 경우가 많다. 특히 남자의 경우, 홍콩 액션물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보안관>은 김형주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영웅본색>(1986)을 ‘아재’들이 출연하는 부산 기장 배경의 로컬수사극으로 개비했다. 리메이크는 무슨, 기본적으로 코미디라는 얘기다.

 

<보안관>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중년의 사내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나 장국영이나 적룡처럼 멋있지도, 비장하지도, 폼나지도 않는다. 멋있으려 해도 줄어드는 머리숱이 걸리고, 비장 하려 해도 아내와 딸 눈치 보기 바쁘고, 뭐,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대장질 정도에 그치니 무게 잡기도 영 민망하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과시할 ‘한 건’이 절실하다. 마침 그런 건수가 동네에 터진다.

 

서울에서 성공한 사업가 종진(조진웅)이 비치타운을 건설하겠다며 기장을 방문한다. 평화로운 동네에 외부인이 별안간 내려오니 토박이 대호(이성민)는 심기가 영 불편하다. 내 이놈을, 하는 순간, 종진이 대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해온다. 둘에게는 사연이 있다. 대호가 대전에서 형사로 재직하던 5년 전, 영문도 모른 채 마약 운반책을 맡던 종진을 체포한 적이 있다. 생활고를 호소하는 종진이 안쓰러워 대호는 형을 적게 받도록 힘을 써줬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종진은 대호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극진히 모신다.

 

대호는 그런 대접이 싫지 않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종진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해 인근 해운대에서 마약이 돌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대호는 종진이 연루됐던 그 사건으로 동료 형사를 잃으면서 낙향한 처지다. 형사의 촉을 잃지 않은 대호는 종진을 의심하고, 처남 덕만(김성균)을 조수로 삼아 뒤를 캐기 시작한다. 그런데 웬걸, 캐면 캘수록 나오는 대호의 미담. 돈 많고 인심 넘치는 종진을 의심할수록 동네 사람들은 대호를 ‘호로자슥’ 취급한다. 대호 왈, “두고 봐라, 이래 당하고만 있겠나. 게임은 인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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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 궁지에 몰리는 설정은 우선적으로 코미디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로컬(local)극으로 대변되는 우리네 현실이 반영된 이유가 크다. 총격전이 눈에 띄게 주목받는 홍콩 누아르의 지배적인 정서는 다름 아닌 ‘의리’다. 관련해 <영웅본색>의 마지막 장면은 유명하다. 부하 아성(이자웅)에게 배신당한 자호(적룡)와 친형 자호가 여전히 범죄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를 체포하러 온 경찰 출신의 동생 아걸(장국영)이 위기에 직면한다. 바로 그때, 마크(주윤발)는 이들을 향한 우정, 아니 ‘으리’ 하나로 위험천만한 총격전에 가세한다. 이 장면을 보며 <보안관>의 성민이 덕만에게 하는 말. “너도 내가 위험에 빠지면 저렇게 구해줄 수 있냐?”

 

홍콩 누아르가 수많은 한국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이 장르의 의리가 앞뒤 재지 않는 순수한 성질이었기 때문이다. 의리 따위 돈 앞에 서면 무용지물인 한국 사회에서 홍콩 누아르의 가치는 먼 나라 이웃 나라의 판타지 혹은 과거 호시절을 말할 때 떠올리는 향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영웅본색>을 인생의 영화로 삼아 이를 현실에까지 적용하고 싶은 대호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인 셈이다. 오히려 그럭저럭 생활을 이어가는 기장 주민들에게 호감을 사는 건 비치타운 건설로 큰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종진이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대호는 폼만 잡았지 영양가가 없는 기라.”

 

종진을 향한 대호의 적대감은 결과적으로 외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성냥개비 질끈 입에 물고 희미해가는 남성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면서 몸에 맞지 않는 코트 자락 바닥에 쓸어가며 사수하고 싶은 의리를 향한 애달픈 순애보다. 대호가 보여주는 불굴의 오지랖은 짠내나는 정서가 바탕인 기장이라는 고장과 더없이 어울린다. 이제 어렵게 쥐어짜야 겨우 한 방울 얻을 수 있는 귀한 것. 그래서 ‘으~리~’ 코미디의 소재로 소비되는 순도 100%의 의리는 잊혀가는, 아니 잊힌 가치다.

 

이 영화가 제목으로 삼은 ‘보안관’은 악당에 맞서 홀로 평화로운 마을을 지키는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한국에 존재한 적도, 존재하지도 않는 보안관 행세를 하는 대호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했다. 대호를 향한 처남 덕만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해서 “이기 다 매형이 자초한 깁니다. 지금 우리 둘만 왕따 된 거 모릅니까.” 그렇게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거나 말거나, 종진은 오늘도 한동안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영웅의 본색을 깨우느라 여념이 없다.

 

나도 한때 <영웅본색> <첩혈쌍웅>(1989) 등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싸나이’의 우정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우정이란 게 돈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실현 불가능한 가치가 되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나마 판타지로 구현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홍콩 누아르와 같은 ‘싸나이’ 영화를 부러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제 희귀종에 가까운 <보안관>의 대호 같은 이를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안쓰럽게 느껴진다. 한편으로, 과거에 열광했던 가치를 여전히 옹호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 묘한 감동에 빠진다. 날로 각박해지는 세상이 대호 같은 이들로 바뀔 리 만무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얼마간은 아름답게 느끼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가치가 있다. 그 때문에 우스갯거리가 되거나 말거나, “걱정도 팔잡니다. 우리 대호 행님, 어디다 떨궈놔도 잘 묵고 잘 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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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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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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