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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도 서울이 있다

스페인, 빌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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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애써 떠나왔건만 서울과 비슷한 풍경을 보게 될 줄이야. 빌바오에 와서 우리는 서울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또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2017.07.25)

 

남녀, 여행사정 27-01@빌바오.jpg 

무빙워크에 남겨진 조급함이 우리와 닮았다.

 

우리와 닮았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버스는 끝도 없이 펼쳐진 광야를 따라 반나절을 달리고 나서야 계곡 사이로 들어섰다.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파고 들어가는 버스에 앉아 있자니 조금 전까지 따라오던 황량한 풍경은 신기루였나 싶다. 보물을 숨겨 놓기로 마음먹고 깊고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었는데 뜻밖에 밥 짓는 연기를 마주했다면 이런 기분일까. 빌바오를 중심으로 한 바스크 지역을 만난 내 마음이 그랬다.

 

빌바오 사람들은 그런 땅에 산다. 라만차의 풍차를 공격하던 돈키호테의 황량한 땅에서 보기 드문 산촌이다. 대서양을 접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열차가 들어서고 도로가 놓이기 전까지 두메산골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왔다. 이를 증명하듯 스페인어, 프랑스어와 뿌리부터 다른 독자적인 언어인 에우스카라어 Euskara를 사용하고, 지금도 바스크 지역 곳곳에서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바스크 박물관에서 본 사진 속 그들의 과거는 한국의 풍경과 닮았다. 산야에 살았던 바스크인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혹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비탈진 땅에서 밭을 일구고 목축을 하면서 몸에 밴 근면과 성실함이 산업화 시대에 들어오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빛을 발했다. 아침 일찍 공장으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노동 시간에 비례해 가난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처럼 이들도 네르비온Nervion 강을 딛고 일어나 스페인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 도시가 되었다.

 

한 달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 줄 지하철 정기권을 손에 쥐었다. 산꼭대기 동네에서 대서양이 접한 바닷가 마을까지 이어주는 열차를 타려면 긴 터널을 따라 무빙워크나 에스컬레이터를 몇 차례 갈아타야 한다. 뭐, 그래 봐야 서울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의 태도도 닮았다. 무빙워크 한 켠에 서 있으면 뒷사람이 참지 못하고 이내 앞질러 간다. 에스컬레이터도 마찬가지이다. 태평하고 느긋한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보기 드문 풍경이라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도시도 이렇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웃어넘겼다.

 

긴 지하철 터널을 지나며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돌아본다. 서울에서 살았던 내 모습이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스쳐 지나간다. 때로 여행은 현실도피로서 존재하는데 ‘뭐야, 여기 서울이랑 비슷하잖아’ 싶은 현지인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서울의 내 삶을 피해 낯선 곳으로 떠나왔건만 그와 비슷한 도시의 삶을 마주하는 당혹감은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여행객이 바르셀로나와 세비야, 마드리드는 기꺼이 찾지만 스페인 북부는 건너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중해와 시에스타, 정열적이고 느긋한 스페인 문화 대신 이곳은 우리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남녀, 여행사정 27-02@빌바오.jpg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서울이다.


결국 서울이다


서울에서의 삶이 무거울 때면 스페인 행 비행기 티켓을 들여다봤다. 단행본 두 권을 출판사에 넘기고 도망치듯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장소에 도착하면 힘들었던 서울의 삶은 잊어버리고 이국의 향과 풍경, 맛에 취해 석 달을 보내리라 다짐했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낯선 도시를 달린다. 묵직한 열쇠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철렁철렁거리며 5킬로쯤 뛰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에 들러 갓 나온 바게트 하나를 산다. 막 운동이 끝난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바게트를 옆에 끼고 빵집 사장님과 '올라'하고 인사를 나누는 순간, 이방인이 아닌 이곳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잠시 내가 사는 곳에서의 고민을 벗어두고 다른 도시에 사는 내가 되어 보며 삶의 무게를 잊곤 했다.

 

여행을 하며 머무는 도시마다 서울의 삶과 비교하게 된다. 왜 우리는 이리 바쁘게 사는 것일까? 까미노 데 산티아고.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의 무덤을 향해 순례자들이 걷는 길의 이름이다. 빌바오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 놓인 제법 큰 도시이다. 큰 배낭을 들춰 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고, 작은 봇짐 하나와 동행이 되어줄 개 한 마리와 길을 걷는 이들도 있다. 순례자의 고난을 발끝부터 느끼려는 듯 맨발로 길을 걷는 이들도 종종 보인다. 수행자의 무거운 발걸음은 빌바오의 바쁜 삶과 대조된다.

 

빌바오 식당의 스텝들은 무척이나 분주하다. 사람이 몇 명 들어차지도 않았는데 서빙을 하고 그릇을 땡땡 부딪치고 잔돈을 탁 하고 내려놓는다. 스페인 다른 지역에서는 웨이터가 영수증 가져다줄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식사 후 직접 카운터로 가서 계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이 동네만의 독특한 결제 방법인 듯싶다.

 

바쁘지 않은 걸 직무유기로 여기는 듯한 그들의 행동이 시야에 자꾸 들어온다. 상대방이 문 앞에서 고리를 잡고 기다려 주면 이상하게 쳐다본다. '왜 멀뚱하니 서 있니?' 하는 표정이다. 본디 무표정함을 타고 난 듯싶은데 억센 인상과 합쳐져 '이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쓰고 다닌다'라는 오해를 부르는 것 같다.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정이 깊은 이들이라는 걸 며칠 지내고 나면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한국인과 닮았다.

 

빌바오를 걷다 보면 서울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익숙하면서도 먼 기분이 생경하다. 서울을 애써 떠나왔건만 서울과 비슷한 풍경을 보게 될 줄이야. 빌바오에 와서 우리는 서울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또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생김새도 집의 모양도 음식도 다르지만 삶의 속도가 비슷해서일까? 이질적인 공간을 찾아 먼 곳까지 찾아 왔지만 이 낯섦에도 편안함을 느끼는 걸 보면 내가 돌아갈 곳은 결국 서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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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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