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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앤으로 살아갈 것

영화 <파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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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우연으로 단순하게 선택한 영화 <파리로 가는 길>.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진정되지 않는다. (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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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한 장면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삶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얼마나 멋진지 잊지 않으려고 데이빗 목걸이를 하고 다녀요.” 여주인공 앤이 39일 살다 간 아이 데이빗에 대해 고백했을 때, 이 영화가 빛깔 좋고 스타일 좋은 로드 무비라는 걸 잠시 잊고 먹먹. 


취향과 우연으로 단순하게 선택한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이번엔 무조건 ‘로드 무비’다, 떠나고 싶고 떠나야 할 이유가 넘쳐났기 때문에, 그렇게 가볍게 보았다. 앗,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진정되지 않는다.

 

저 와인, 저 치즈, 저 양고기, 저 달팽이 요리, 저 초콜릿, 저 도미...... 저것들의 습격으로 온몸이 녹을 듯 흐물거린다. 생 빅투아르 산과 가르 수도교, 액상프로방스의 라벤더밭, 베즐레 성당과 리옹 시장, 이것들의 환영으로 서울 여름의 아스팔트가 더 버거워졌다. 게다가 여주인공 앤은 사려 깊고 섬세하고 사랑스러워서 눈에 아른거린다. 잃은 아이 데이빗을 이야기할 때 맺히던 눈물방울. 그것마저도 반짝거리는 보석 같았다. 쉽게 본 영화, 쉽게 잊혀지지 않아서 며칠째 끙끙대고 있다.

 

작년, 파리도서전 한국 주빈국의 출판인들 틈에 끼어 출장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몇몇이 이틀 동안 부르고뉴 와이너리 투어를 나섰다. 몇백 년이 된 고성에서 잤던 기억, 와이너리의 서늘한 숙성 창고에서 몇 잔의 와인을 연속적으로 조금씩 맛보던 기억, 단박에 기억의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곧 다시 파리를, 부르고뉴를 와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삶이 그렇게 쉽게 다짐대로 될 것인가. <파리로 가는 길>은 삶이란 우연, 삶이란 순간이란 명제를 햇살 속에 튀어오르며 펄떡이는 바다 생선처럼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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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한 장면

 

영화 첫 장면과 끝이 관객의 호기심을 한껏 끌어올린다. 칸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베란다에서 통화 중인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 있는 앤의 뒷모습과 파리의 아침, 남편의 사업 파트너인 여행 동행남이 보낸 장미초콜릿을 베어 물고 머리를 틀어올리는 묘한 미소의 얼굴 클로즈업. 뒷모습과 얼굴 정면. 칸과 파리. 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휴가는 기다려주지Vacation can wait”는 남편의 말이다. “파리는 기다려주지Paris can wait”는 여행 동행남의 말이다. 주어 하나 바뀌었지만 삶에 대한 태도의 간극이 크다. 휴가야 언제든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중독자와 목적지 파리는 도망가지 않는다며 그 길 위의 삶을, 순간순간을 꽃피우자는 게 여행 동행남의 생각. 그 사이에 앤이 있다.

 

함께 떠나왔지만 영화 제작자 남편은 조금도 쉬지 못한다. 앤과 대화 도중에도 끊임없는 전화 응대, 앤이 귓병으로 부다페스트행을 포기하고 파리로 먼저 간다고 했을 때 ‘파리 남자’는 차로 모시겠다고 자처한다. 이 ‘파리 남자’ 자크는 그야말로 낭만파. 앤으로서는 파리 가는 길이 점점 요원해지지만 서서히 이 곁길로 새는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댓츠 굿!” 앤의 이 목소리는 여행 중 최적의 음높이와 온도를 유지한다. 돌발 상황에 대해서도 쉬 낙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거나 즐긴다.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도 유튜브 영상으로 보았던 정보대로 스타킹을 벗어 ‘팬 벨트’ 문제를 해결한다. 이 태도만 보아도 얼마나 현명하고 성숙한 인간인지 짐작된다.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형. 남편의 양말이나 약을 챙기는 일을 전담하고 딸아이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면모도 있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삶이 연약하고 고통스럽지만 멋진 일’이란 것을 알기에, 무엇을 드러내놓고 뻐긴다는 것의 허망함도 잡다하고 사소한 일의 번잡도 삶의 중요한 부분이란 것을 알기에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자세.

 

앤이 파리에 도착할 남편에게 변화된 태도를 보일까(여행 도중 남편의 실망스러운 비밀도 알게 되었는데), 한편 프러포즈한 ‘파리 남자’가 제시한 약속 장소에 과연 나갈까 솔직히 궁금하다. 앤은 어떻게든 앤으로 살 거란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앤은 앤으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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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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