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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입

오늘날의 전쟁은 국지적이며 산발적으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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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라이브스 매터’(백인의 생명이 중요하다)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선 이들을 보면 이들은 흑인 노예가 목화밭에서 일하던 시절로의 회귀를 그리워한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문명을 그리워하듯이. (2017.08.22)

 

사진1segregated.jpg

분리된 식수대

 

미국 남부 중에서도 남부인 ‘딥 사우스 Deep South’에 해당하는 미시시피 주의 잭슨을 배경으로 한 영화 <더 헬프>. 흑인은 집 안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으며 집 밖에 따로 마련된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기물이 파손될 정도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도무지 밖으로 나가기가 어렵자 참다 참다 못 견딘 가정부 미니(옥타비아 스펜서)는 결국 실내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주인의 비명에 이어 해고 통보를 받았다.


세그리게이션segregation, 즉 합법적인 인종분리정책(짐 크로우 법)이 시행되던 시대에는 심지어 식수대도 ‘white’와 ‘colored’로 분리되어 있어 물도 따로 마셔야 했다. <히든 피겨스>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나온다. 화장실은 물론이요 커피가 들어있는 주전자도 결코 함께 공유하지 않는다. 흑인은 아무리 돈을 지급해도 백인과 같은 식당을 이용할 수 없었다. 너는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꾸준히 가르치는 사회적 장치다.


인종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오랜 세월 쌓이면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마치 재산으로써 가축을 아끼지만 가축과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지 않고 같은 밥상에 앉아 밥을 먹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듯이, 인종분리정책이라는 제도와 문화 속에서 흑인은 ‘인간’이 아닌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축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종이 다른 생명의 분리일 뿐 결코 차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개념이 가능했다. 두 영화 모두 196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다. 1964년 린든 존슨 정권에서 민권법을 제정하면서 인종분리정책인 ‘짐 크로우 법’은 폐지되었다. 노예제 폐지를 이끈 남북전쟁이 끝난 지(1865년) 거의 100년이 지나 공식적으로 분리 정책은 사라졌다.

 

사진2연좌농성.jpg

 간이식당 연좌 농성


얼마 전 미국 버지니아주 샬럿츠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자 시위는 집회의 자유를 빌미로 일어난 테러다. 오늘날의 전쟁은 국지적이며 산발적으로 벌어진다. 또한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벌어지기보다 내전이나 다름없는 테러 형태가 빈번해지고 있다. 버지니아 ‘테러’는 자국의 백인들이 저질렀다. 비무장의 시민들이 일상에서 테러를 접하며 전쟁이 아닌 듯 전쟁 속에 사는 셈이다. ‘화이트 라이브스 매터’(백인의 생명이 중요하다)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선 이들을 보면 이들은 흑인 노예가 목화밭에서 일하던 시절로의 회귀를 그리워한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문명을 그리워하듯이. 그 ‘문명’은 숙녀와 신사, 그리고 노예가 있던 남부의 문명을 말한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과거에 남부연합의 첫 번째 백악관이었던 집을 방문한 적 있다. 나는 실내에 장식되어 있는 목화에 시선을 올려놓았다. 나뭇가지에 맺힌 눈송이 같은 목화가 꽃병에 꽂혀있었다. 딥 사우스는 코튼 사우스라고도 불릴 정도로 남북전쟁 이전 경제의 대부분을 목화에 의존했었다. 당시 남부의 백인들에게 이 목화밭에서 일하는 가축과 같은 값싼 노동력이 똑같은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인종 문제와 미국의 KKK(쿠 클랙스 클랜 : 백인우월주의 단체)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얀 폭력 검은 저항』은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어른들도 읽기를 권한다. 신사와 숙녀만이 사람이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그 ‘하얀 폭력’은 노예제 폐지 이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백인 여성들이 보이지 않게 참여하는 방식이다.


18세 이상의 백인 남성만이 쿠 클랙스 클랜의 단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소굴에서 다른 소굴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법망을 피해 클랜 단원을 숨겨 주고 가짜 알라바이을 만들어 주며 ‘밤의 기마단’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면서 활동을 지원했던 여성들도 큰 몫을 담당했다. 게다가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호사스러운 통옷에서부터 조악한 복면에 이르기까지 단원들이 갖추어야 할 의복을 바느질해서 만들어내는 일 역시 여성들의 몫이었다. 특히 모자나 두건에는 달이나 별, 뿔 등을 정교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하얀 폭력 검은 저항』, 93쪽


은신처 제공, 식사 마련, 의복 짓기, 곧 백인 여성들은 쿠 클랙스 클랜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활동에 참여했다. 성역할을 통해 백인 남성을 보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성역할을 통해 흑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에 동참한 셈이다. 권력과 차별을 둘러싼 역사에서 여성이 처한 복잡한 위치이다.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이 사유의 중요한 축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인종분리정책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지 이제 50여 년이 지났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의 구호인 ‘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에서 눈여겨 볼 단어는 ‘어게인’이다. 어느 시절을 기준으로 ‘어게인’일까. 목화밭에서 채찍을 맞으며 굶주림 속에서 일해야 마땅한 ‘블랙’이 대통령이 되어 ‘화이트’ 하우스에 살 수 있는 시대를 통탄하는 것일까.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미국 사회에 ‘어게인’ 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백인우월주의 단체다.


일부 ‘좌파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이 되느니 차라리 트럼프가 낫다’는 주장을 했다. 슬라보예 지젝이 대표적이다. 클린턴이 되면 이 체제의 지속이지만 트럼프가 되면 어떻게든 세상이 재편된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민주당과 공화당이 기본으로 돌아가 변화가 일어난다 등의 주장을 했다. 관성을 경계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새로움을 절대 가치화하면 이런 함정에 빠진다. 전쟁으로 세상 한번 뒤집어보자며 계엄령이나 군대 타령하는 극우와 한 점에서 만날 소리다. 세상이 폭삭 망한 다음 다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누군가의 ‘희망’은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그 과정에서 처참하게 으깨어진다는 사실에 무심하다. ‘내가 당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무책임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 엄청난 무책임함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인양 위장하는 비열한 전술이 ‘지식인’의 언어로 사회에 뿜어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트럼프는 백인 남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지저분한 성추행과 성희롱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53%) 백인 여성의 지지를 받았다. (지역과 연령에 따라 홍준표의 ‘돼지발정제’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여성들도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반면 흑인 여성의 94%가 클린턴에게 투표했다. 보통 흑인 여성의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민주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집단도 흑인 여성이다. 흑인 여성을 비롯하여 비백인여성은 막돼먹은 백인 남성의 언어에 가장 실질적 공포를 느끼는 젠더와 인종이다. 76%의 흑인 여성이 트럼프 당선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사회의 기본적인 어떤 선이 무너지고 밑바닥의 흉함을 감출 줄 모르는 사회, 트럼프의 등장은 한 사회의 진보냐 보수냐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문제다. 트럼프의 대통령 ‘되기’는 혐오와 증오를 자유롭게 대방출했다.


참, <더 헬프>에서 해고되었던 가정부 미니는 며칠 후 사과를 하겠다며 초콜릿 파이를 하나 들고 고용인의 집에 찾아간다. 그가 만든 파이에 입맛이 길들었던 주인은 맛의 유혹 때문에 문을 열어준다. 초콜릿 파이를 입에 넣고 황홀한 표정을 짓는 주인에게 미니가 하는 말. “내 Shit이나 먹어랏!”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던 주인의 입 속에 나의 배설물을 ‘맛있게’ 먹이기. 입과 항문, 황홀한 맛과 구토가 올라오는 역겨움을 뒤섞어버린 파이다. 분리정책에 대한 화끈한 복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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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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