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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외출

다음에 꼭 같이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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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도 나처럼 뉴질랜드를 꼭 한 번 와봤으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와이토모 동굴의 반딧불이보다 영흥도 십리포해변의 보잘것없는 불꽃놀이가 훨씬 근사했다고. (2017.10.11)

 

어머니의-외출.jpg

 

스물다섯 살 무렵 뉴질랜드로 배낭여행을 떠날 때였다. 어머니는 내게 뉴질랜드 북섬에 와이토모 동굴을 꼭 가보라고 하셨다. 동굴 속에는 반딧불이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빛처럼 반짝거린다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마치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께 그걸 대체 어떻게 아시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TV에서 봤지.”

 

나는 신혼여행 포함 다섯 번이나 가본 제주도를 어머니는 아직 한 번도 못 가셨다. 우리 집 세 식구가 모처럼 제주도를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또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말씀하셨다. 나는 쇠소깍이 좋더라, 다른 데는 몰라도 쇠소깍은 꼭 가보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그럼 나는 또 바보 같은 질문(그걸 대체 어떻게 아시냐는 질문)을 반복하고, 어머니는 매번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신다.

 

“TV에서 봤지.”

 

말하자면 어머니는 이미 TV로 세계일주를 하셨고, TV로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어머니께 여행이란, 어머니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여름방학 기간에 인근 계곡으로 바람을 잠깐 쐬러 가는 게 전부였다. 해외여행도 아니고 제주도 정도는 같이 한 번 가자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왔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번번이 무산됐다. 공부방을 운영하시는 어머니의 휴일은 늘 생각보다 짧았고, 제주도는 생각보다 멀었다.

 

그런 어머니가 이번 추석 연휴 기간에는 동생과 함께 영흥도를 찾으셨다. 수원 사는 동생이 부모님이 계신 왜관까지 내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왔다. 아버지는 따라오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혼자 오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는 사소한 취향부터 입맛까지 곧잘 부딪히는 아버지와 함께 다니면 오히려 피곤하다며 혼자 올라오겠다고 하셨다. 마누라와 나는 아버지가 섭섭해 하실까 걱정됐지만, 어머니의 결심이 흔들릴까봐 내색하지 않았다. 좀처럼 집 밖을 나서지 않는 어머니께 이번 여행은 아프리카 원시 부족이 남극을 탐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아버지도 어머니께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셨다.

 

쏜살같이 지나간 2박 3일이었다. 사실 여행 치고는 너무 짧고, 조금 긴 외출이란 표현이 맞겠다. 어머니의 그 조금 긴 외출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인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어머니께 영흥도는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흥도는 어머니께 더 이상 익숙한 섬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 영흥도는 이따금 외할아버지와 낚시를 하던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섬이었다. 어머니는 영흥도 입구부터 빼곡히 들어선 펜션과 이른바 황금연휴객들의 끊이지 않는 행렬을 보며 “이게 웬일이냐”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뉴질랜드로 배낭여행을 떠날 무렵의 나이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내가 낯선 세계를 둘러보고 허무맹랑한 꿈을 좇을 때 어머니는 어린 나를 등에 업고 호된 시집살이를 하신 셈이다. 집안일이 서툴다고, 말대답을 한다고, 할머니와 할머니의 시어머니로부터 혼쭐나곤 했다. 매년 돌아오는 명절마다 안동 권 씨 급사중공파 조상님을 모시느라 친정은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고향 성주와 어머니의 고향 인천은 너무 멀기도 했고,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배려할 줄 몰랐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가족과 점점 멀어졌고, 그렇다고 아버지의 가족과 가까워지지도 못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큰집도 찾지 않으셨다. 큰집 식구들은 제사나 명절 차례를 지낼 때마다 어머니의 안부를 묻지만,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멋쩍게 웃고 만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 사이에 오랜 세월 두텁게 쌓인 앙금을 풀어줄 깜냥도 안 되고, 어머니께 화해를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어머니의 애달픈 역사를 아는 나는 집안의 평화나 조상님보다 어머니가 먼저고, 어머니 편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창 밖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횟집에서 배불리 저녁을 먹고 십리포해변을 산책했다. 어머니는 피로를 감추지 못했지만, 잠들기 싫어하는 애처럼 이야기보따리를 계속 쏟아내셨다. 지나간 일들은 웃으며 말씀하셨고, 아버지와의 일상적인 갈등도 웃으며 말씀하셨다. 애는 온몸으로 해변을 데굴데굴 굴러다녔고, 우리는 아무도 애를 말리지 않았다. 마누라와 동생이 바닷가 매점에서 사온 폭죽으로 불꽃놀이도 했다. 문득 뉴질랜드 북섬에 와이토모 동굴이 떠올랐다. 와이토모 동굴은 어머니 말씀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반딧불이들이 죄 휴가를 떠났는지, 하필 내가 갔을 때는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지기는커녕 미세먼지가 잔뜩 낀 서울의 밤하늘 같았다. 나는 동굴을 나오자마자 기념품점에 들렀다. 반딧불이가 은하수처럼 촘촘한 사진엽서를 골라 그 자리에서 어머니께 짧은 편지를 썼다.

 

“엄마, 여기 진짜 예쁘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아버지 안부도 챙겼던 것 같은데, 아무튼 거짓말을 한 셈이다. 어머니도 나처럼 뉴질랜드를 꼭 한 번 와봤으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와이토모 동굴의 반딧불이보다 영흥도 십리포해변의 보잘것없는 불꽃놀이가 훨씬 근사했다고. 물론 뉴질랜드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 힘들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어머니가 가고 싶다면 뉴질랜드든 어디든 기꺼이 모시고 싶다. 또 어머니가 남은 인생을 원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사셨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자식된 도리는 오로지 그것뿐이다.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추신
어머니는 헤어질 때 마누라 가방에 대뜸 돈봉투를 찔러주셨다. 돈봉투에는 여행 경비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마누라가 한사코 거부하자 그 다음에는 내 바지 주머니에 찔러주셨다. 내가 한사코 거부하자 그 다음에는 애 바지 주머니에 찔러주셨다. 애는 돈봉투를 넙죽 받았고, 어머니는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

.

.

“나랑 놀아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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