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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한 순리

‘마지막 혁명’과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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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내 촛불은 그만큼 가벼웠다. 촛불 따위 언제든 또 들 수 있고, 가까운 미래에는 내 아이가 나를 향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내 딴에는 아무리 똑바로 살아도 내 아이에게 나는 무너뜨려야 할 적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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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


지난 1년 동안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다. 이 말은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대개 문재인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하는 언론사 또는 시민단체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거나 제 입맛에 맞지 않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표현이다.

 

바로 어제 민주노총이 청와대 간담회에 불참하겠다는 소식에도 같은 표현이 속출했다. 이를테면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 세력은 그들에게 적폐나 다름없다. 자유한국당과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구적폐라면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 세력은 신적폐쯤 되겠다.


그들의 지상 과제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도 그들의 바람대로 됐으면 좋겠다. 나 역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그들 못지않게 간절히 바란다는 얘기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를 향한 비판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그 비판을 틀어막는 일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에 과연 도움이 될까. 또 지난겨울 다들 얼마나 무거운 촛불을 들었길래 걸핏하면 힘든 내색을 아끼지 않는 걸까.


일면 이해는 간다. 3.15 부정선거를 바로잡으려는 시민들의 저항(4.19 혁명)은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가로막힌 셈이 됐고, 6월 민주항쟁은 죽 쒀서 개(노태우) 준 셈이 됐고, 무엇보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심지어 권력을 영구히 독점하려고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은밀한(은밀했나?) 공작은 더 이상 음모가 아닌 사실이다. 물론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정당한 통치 수단의 일환이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그동안 감춰졌던 여러 불법행위가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요컨대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와 5년 후 세상이 다시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다만 그 트라우마와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산문은 러시아 소설가 예프게니 자미아친의 『우리들』이라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다. 기원후 26세기를 다룬 판타지 소설이었지만, 불순하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는 출간이 금지됐다고 한다. 조지 오웰은 『우리들』을 어렵게 구해 읽고 자신의 산문에 인상적인 대목을 인용했는데, 그 대목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게 혁명이라는 걸 아시오?”
“물론 혁명이죠. 그래서 안 될 이유가 있나요?”


“혁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우리의’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었소. 그러니까 또 혁명이 있을 순 없어요.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오.”


“세상에, 당신은 수학자 아니던가요? 마지막 숫자가 뭐요? 말해 보세요.”
“마지막 숫자라니, 무슨 소리요?”


“그럼 제일 큰 숫자라고 해요. 제일 큰 숫자는 뭐예요?”


“말도 안돼. 숫자는 무한이오. 마지막 숫자란 건 있을 수 없소.”
“그럼 마지막 혁명이란 말은 왜 하세요?”


지난겨울 촛불집회를 통한 정권교체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혁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작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도처에 여러 볼멘소리들을 함부로 걸림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 볼멘소리들을 최대한 끌어안고 가는 것이 곧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다. 또한 국정원이나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요원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마침 다가오는 29일은 촛불집회 1주년이다. 정치권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자발적인 시민들의 끈질긴 참여로, 게다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부정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날이다. 충분히 기념할 만하다. 그런데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 라는 말은 대체 어디서 유래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작년 11월 4일,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제2차 대국민담화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리며 했던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이 말은 얼마 후 일종의 관용구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려고 밥을 먹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내가 이러려고 출근을 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내가 이러려고 채널예스에 칼럼 연재를 시작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등등 여러 용례가 있겠다. 다시 말해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도 같은 맥락의 관용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 아니라 “적폐”란 표현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음 쓰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과거 <유모어일번지>의 영구와 맹구, 또는 <쇼비디오자키>의 순악질 여사에 버금가는 유행어 제조기가 아닐까 싶다. 인간적으로 너무 안타깝다. 진작 그쪽 길로 가셨더라면 국민에게 더 큰 사랑을 골고루 받으셨을 텐데. 적어도 그깟 독방 좀 넓게 썼다고 욕먹는 일은 없으셨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고맙다. 뼛속까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지난겨울 가까스로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박근혜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공공의 적이 사라진 지금은 대체 무엇과 싸워야 할까. 고백하자면 나는 촛불집회에 총 일곱 번 참여했다. 하지만 양초를 따로 챙겨간 적은 없다. 누군가 버린 양초를 주워 쓰거나 촛불을 들고 있는 척 휴대용 손전등을 켜곤 했다. 양초값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고, 나의 참여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민주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내 촛불은 그만큼 가벼웠다. 촛불 따위 언제든 또 들 수 있고, 가까운 미래에는 내 아이가 나를 향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내 딴에는 아무리 똑바로 살아도 내 아이에게 나는 무너뜨려야 할 적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상 그때가 닥치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믿고 의지했던 세상을 통째로 빼앗긴 기분일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순리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 이왕이면 그 어느 때보다 기쁜 얼굴로 네 생각이 맞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말도 함께 전해주고 싶다. 다만 그 말이 내 아이에게 터무니없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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