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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모자이크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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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보잘것없는 진실이라고 해도 감추면 감출수록 더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가려진 진실을 둘러싼 섣부른 짐작과 음모론은 시간이 갈수록 부풀어 오를 테고, 이건 비단 영화 속 모자이크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2018. 01. 31)

빌어먹을-모자이크.jpg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라미스> 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영화다. 그동안 올레TV에서 무료 서비스 중이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려고 했더니 무료 서비스가 내 허락도 없이 중단됐다. 대신 즐겨 찾던 웹스토어에 영구 소장이 가능한 HD 리마스터링 영화파일이 출시돼 있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비용을 결제하고,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맥주와 간단한 안주까지 준비했다.

 

이미 수차례 반복해서 본 영화였지만 매 장면마다 새로웠고, 드디어  <이스턴 프라미스> 의 최고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 격투 장면1)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주인공(비고 모텐슨)이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에게 맨주먹으로 맞서는데, 아니 이럴 수가! 비고 모텐슨의 불알이 움직일 때마다 빌어먹을 모자이크*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엄밀히 말하면 화면이 뿌옇게 처리된 불알만 한 동그라미, blur) 올레TV를 통해 봤던  <이스턴 프라미스> 는 방송심의 규정상 어쩔 수 없다 쳐도, 개인소장용 영화파일까지 함부로 훼손하는 야만에 나는 기어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개봉했을 때였다. 마누라와 나도 <박쥐> 가 보고 싶었지만, 생후 5개월 된 애를 돌보느라 극장 구경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침 집에 놀러온 친구가 <박쥐> 를 봤다길래 마누라와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친구에게 소감을 물었다. 친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송강호 고추 나오더라.”

 

마누라와 나는 고된 육아로 주저앉았지만, 한국영화계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구나 싶었다. 몇 개월 뒤 마침내 <박쥐> 를 극장이 아닌 집에서 볼 수 있게 됐고, 마누라와 나는 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비용을 결제했다. 송강호 고추 아니,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맥주와 간단한 안주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의 노출 장면은 어김없이 모자이크 처리됐고, 마누라와 나는 또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고 모텐슨 불알이나 송강호 고추를 못 봐서 아쉽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를테면 송강호 고추는 <박쥐>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자신을 구원자라고 철석같이 믿는 신도들 앞에서 송강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지를 추어올리는 장면은, 어쩌면 박찬욱 감독이 공을 가장 많이 들였을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방송심의위원회는 그 메시지를 훼손하면서 동시에 송강호 고추를 해롭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비고 모텐슨 불알과 송강호 고추만 수난을 겪은 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배우들의 대사 중 욕설이나 비속어에 해당되는 부분은 묵음 처리되기 시작했고, 배우들의 흡연 장면에도 모자이크가 부지런히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또 영화 속 소품으로 등장하는 여성의 누드화에도 모자이크는 빠지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누군가는 삐뚤어진 성욕을 현실에 반영할지도 모른다는 방송심의위원회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영화 속 흡연 장면 모자이크는 사실 정부의 금연정책과 맞물린 각 방송사의 임의적 조치였다. 영화 속 흡연 장면 모자이크는 법적 강제력이 없고,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기존의 모자이크를 지우는 게 더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한다.2)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흡연 장면 모자이크뿐만 아니라 영화 속 모든 모자이크는 명백한 시대착오적 퇴행인데, 그 퇴행에는 별도의 비용이 든다는 얘기다. 그리고 만일 그 퇴행을 바로잡으려면 더 큰 비용이 든다. 이쯤 되니 방송심의위원회는 치밀하고 부지런한 돌대가리 집합소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물론 영화 속 욕설과 흡연 장면과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진부한 설정과 자극적인 장면으로 관객 또는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게으른 영화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방송심의위원회의 시대착오적 퇴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방송심의위원회의 판단을 빌리자면 <살인의 추억> 은 잠재적 연쇄살인마들의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영화고, <지옥의 묵시록> 은 자칫 전쟁을 미화한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으니 세계평화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영화다. 다시 말해 방송심의위원회의 판단은 청소년과 대중의 지적 수준을 얕잡아 본 결과에 불과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무렵, 하루는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신 틈을 타 친구들과 성인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봤다. 리노 디 실베스트로 감독의 <늑대 처녀>3)라는 영화였는데, 교복만 벗으면 학부모나 다름없는 친구 덕분에 어렵지 않게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따분했고, 그 시절에도 빌어먹을 모자이크는 빠지는 법이 없었다.

 

“사팔뜨기처럼 눈동자를 가운데 모으면 모자이크가 사라진대.”

 

한 친구가 모자이크가 나타나길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친구의 말에 일제히 사팔뜨기처럼 눈동자를 가운데 모으고 화면에 집중했지만, 안타깝게도 모자이크가 사라지는 기적은 없었다. 모자이크가 정말 사려졌다고 끝까지 우기는 친구는 있었다. 당시에는 비슷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눈을 가늘게 뜨면 모자이크가 사라진다느니, 비디오테이프에 침을 바르면 모자이크가 사라진다느니, 그 시절 철없던 아이들은 가려진 진실을 그만큼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진실이라고 해도 감추면 감출수록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장막을 걷어라 /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 보자.”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첫 소절이다. 과거 군부독재정권은 한대수가 말한 행복의 나라를 북한이라며 <행복의 나라로>를 금지했다. 또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며 금지했다. 말 같잖은 이유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통제하고 단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2018년이다. 사람들이 사팔뜨기처럼 눈동자를 가운데 모으는 일이 없도록 모든 장막을 걷어야 한다. 섣부른 짐작과 음모론으로 진실이 외면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누구든 부르고 싶은 노래는 마음껏 부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결국 송강호 고추를 못 봤네? 적어도 나한테 2018년은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1) 목욕탕 격투 장면에서 비고 모텐슨 불알 노출은 사전에 충분한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송강호 고추 노출도 충분한 합의가 있었겠죠?)


2) 관련 기사 전문 : //www.the-pr.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94


3) <늑대 처녀> 관련 정보 : //en.wikipedia.org/wiki/Werewolf_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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