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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속도가 버거울 때

내 리듬이라도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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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깨울 슬픔이 없는 사람이었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세상의 속도와 잘 맞는 사람이 있을까봐 두려웠다. (2018. 03. 16)

작년, 나의 가장 큰 수확은 연애 상대의 필수 조건을 정립한 일이다. 각자의 이상형을 말하는 시간,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누군가 ‘그렇다면 이런 사람과는 절대 연애 못한다’는 조건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어왔다. 처음 받아 본 질문이었다. 고민이 길어져 옆 테이블의 잔 부딪치는 소리와 가게 배경음악만이 들려 왔다. 너무 오래 고민하나 멋쩍은 마음에 애꿎은 냅킨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깨달았다. 나와 오래 친밀한 사람들은 이런 나를 기꺼이 기다려주고, 나도 그들을 기꺼이 기다린다. 그렇게 내 연애 상대의 필수 조건은 ‘나와 속도가 맞는 사람’이 되었다.

 

 

솔직히말해서_1.jpg

           언스플래시

 


나는 느리다. 오래 고민하고 자주 머뭇거린다. 겁이 많은 데다, 내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이 많기 때문이다. 서슴지 않는 사람과는 한 발짝 떨어진다. 문제는 사회에서 느림은 실행력 부족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이제 곧 회사원으로 산 지 만 1년.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게 유독 가혹한 시간이었다. 일이 빨리 진행되도록 구성원의 자존감을 이용하는 회사의 전략을 알면서도, 자주 마음이 다쳤다. 느린 만큼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나를 향한 의심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그에 비해 마음을 회복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학 다닐 때 욕심 내던 두꺼운 인문서보다는 SNS 위로 글귀에, 문학보다는 만화책에 더 쉽게 손이 갔다. 기껏 작품성 좋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열심히 검색하고 나서는 결국 인기 검색어에 오른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잠들었다. 소화보다 배출이 급했다.


매일 쏟아지는 메일에서 잘 지내냐는 질문을 마주쳤다. 상대도 나도 관습적으로 묻고 답했지만, 그때마다 ‘잘 지낸다는 건 어떤 걸까’ 생각했다. 행복한 걸까? 불행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행복과 불행을 따지지 않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은 아니었다. 저녁이 되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모두 직장인이고, 듣기로는 회사는 다 똑같다는데, 그렇다면 행복할 리 없었다. 문득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다짜고짜 ‘당신은 잘 지내시나요?’, ‘행복하세요?’ 묻고 싶었다. 행복하다고 답하면 안심할 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멱살 잡고 흔들며 당신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그게 정말 행복 맞냐고 따지고 싶었다. 슬픔을 깨우고 싶었다.

 

잘 지내요, /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 나 혼자 듣습니다 // (중략) //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김소연, 「그래서」 부분, 『수학자의 아침』 16-17쪽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깨울 슬픔이 없는 사람이었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세상의 속도와 잘 맞는 사람. 항상 비교를 거부했으면서, 내가 뒤쳐지니 비교 우위로 내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 랜덤 재생 기능 덕에 잊고 있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아마 넌 아직도 이해를 못한것 같아 / 그래서 넌 그길을 걸으면서 생각하겠지 / 내가 뭘 놓친걸까 아니면 니가 거짓말을 한걸까 / 넌 그 길을 걸으면서 / 너는 사람들이 좀 더 예의가 발랐으면 좋겠지 / 뭔갈 물어볼때 ‘저기요’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지 / 손가락으로 찌르거나 밀치지 않았으면 좋겠지 / 아마 그게 너의 리듬 / 엄마도 이해 못하고 친구들도 가까운 애완동물도 / 이해못하는 아마 그게 너의 리듬
-이랑, 「너의 리듬」

 

울었다. 느리다는 건 나만의 리듬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마음이 급해 잊고 있었지만 내 속도에 발 맞추어 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 한때 좋아했으나 잊은 노래들을 차곡차곡 나만의 앨범 ‘위로’에 담기 시작했다. 일하다 한숨이 나올 때엔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위로’ 앨범을 재생했다. 사회의 속도는 그대로지만, 나만의 리듬(강약과 박자감)으로 애써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잡지 못한다고 내가 애쓰지 않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리듬을 타기도 했다. 책상 밑에서 발만 까딱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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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의 강약을 조절할 여유가 생겼다. (일한 시간이 쌓여서인지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두 가지 사실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일의 우선 순위를 생각해 시간을 분배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작은 일을 거절할 힘이 생겼다. 사소하지만 비로소 리듬을 탈 수 있게 된 내가 조금 좋아졌다.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에게 ‘위로’ 속 노래 목록을 적어주거나 메시지로 보내기도 했다. 그가 노래 듣는 순간만이라도 고개를 까딱일 수 있길 바랐다. ‘아, 좋다’는 말을 함께 나눴다. 각자의 리듬으로 살자고 말했다. 행복하지는 못해도 잘 지내보자고.


요즘엔 예능을 조금 덜 본다. 여전히 웃음은 부족하지만, 삭힐 울음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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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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