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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라는 물건

사람 판단하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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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마음 한 켠에 순수를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를 지키고 있는지는 눈빛과 표정에 드러난다. (2018. 06. 04)

6월호-이기준.jpg

 

 

 

노바를 따라 스톤에이지라는 바에 갔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콘솔을 연상시키는 너른 바 한 켠에 매킨토시 기기 세 대가 피라미드 형태로, 네임 기기 두 대가 위아래로, 그 사이에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벽 모서리에는 B&W 톨보이 스피커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손님이 한 명도 없다 해도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 만한 공간이었다(그럴 리 없겠지만).

 

작업실에도 오디오 들여야 하는데. 줄곧 시디로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오디오 하면 자연스럽게 앰프, 시디플레이어, 스피커가 세트로 연상된다. 문제는 시디가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필수 가구만으로 이미 꽉 찬 공간에 시디 장을 추가로 들인다는 사안은 쉬이 여길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에 있는 시디를 작업실로 옮기면 집에서 들을 음반이 없어진다. 그날그날 들을 음반을 챙겨서 출퇴근한다는 생각은 발상만으로 피곤하고, 가지고 있는 음반을 작업실에서 듣기 위해 또 산다고 생각하니 그런 낭비가 또 어디 있으랴 싶었다. 소유한 음반을 전부 음원으로 변환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거라면 스트리밍 오디오를 들이는 편이 나을 터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갈등이 생겼다. 나한테 음악은 음반이라는 물리적 실체와 뗄 수 없는 관계다. 몸 없이 소리로만 존재하는 음악이라는 개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톨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해묵은 이원론까지 들추며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들지만 아무리 많은 음반을 사도 짐이 늘지 않는다는 ‘가벼움’은 굉장히 매력 있는 선택지였다.

 

일단 인터넷으로 기초 검색을 했다. 몇 가지 추린 다음 실물을 확인할 겸 청음하러 오디오 매장에 갔다. 내게 맞는 놈을 고르려면 들어봐야 하는데, 들으면 당연히 비교하게 되고 그리되면 결국 크고 비싼 스피커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큰 기기가 내는 소리에 여유가 있고 그런 기기는 비싸기 때문이다.

 

“잠깐. 대책없이 스피커 사서 후회하지 말고 우선 스트리밍 환경을 경험해 보면 어때?”

 

노바 없이 무얼 하랴. 그냥 돌아와 애플뮤직과 유튜브 레드에 가입했다. 당분간 두 가지 통로를 동시에 사용하며 테스트를 하다 나중에 한 가지만 남길 작정이었다. 그후 일 년이 지났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이 행보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음반 한 장 가격에도 미치지 않는 금액을 한 달 정액으로 지불하니 음반을 고르는 흥분과 긴장이 싹 사라졌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플레이했다가 한 곡이 채 끝나기 전에 끄기도 했다. 최소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고 판단한다는 기본 태도조차 유지하기 힘들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사실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잘못됐다고 여길 일은 아니었다. 세상엔 평생 다 듣지 못할 만큼 많은 음악이 있고, 세상 모든 사람과 사귈 필요 없듯이 모든 음악을 들을 필요는 없다.

 

“사람 판단하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해.”
“그건 좀 심하다.”
“식당 직원 부를 때 ‘언니야’ 하는 놈이랑 친구 하고 싶어?”

 

설득되는 데도 한마디면 충분하다.


몇 소절만 듣고 꺼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결 편했지만 정보로만 존재하는 음악은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물건으로 귀결되는 인간인가 보다.

 

물건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스트리밍 기기 중에는 끌리는 디자인이 없다는 점도 한몫 거들었다.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 안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제품의 디자인과 물건으로써의 매력은 다른 영역이니 물건으로서 매력 있는 기기가 없다고 말해야 옳겠다.

 

결정적으로 우유부단한 성격도 한몫 거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기에 당사자 탓이 아니다. 인격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해도 되지만 성격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우유부단을 거스르지 못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니 마음을 정하는 데 일 년이 걸릴지 오 년이 걸릴지 모를 노릇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탐색 기간 동안 임시로 사용할 무선 스피커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십만 원 미만 제품 중에서 골랐다. 들인 돈 이상으로 들을 만해서 우유부단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이 더욱 탄탄하게 마련되고 말았다.

 

물건으로써의 매력을 강조했지만 핵심은 당연히 음악이다. 음악을 더욱 즐기기 위해 오디오를 마련하는 것이지 오디오를 마련하기 위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좀 괴롭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공로는 책과 음악에 돌려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요새 나를 보면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다. 독서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는 지난 칼럼에 썼고, 음악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배경 음악 말고 제대로 들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마음 한 켠에 순수를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를 지키고 있는지는 눈빛과 표정에 드러난다. 물론 순수의 영역이 반드시 책과 음악일 필요는 없다. 한 곳에 집중되던 순수가 어느 시점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인간은 변하는 존재이니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다만 옮겨가는 과정인지 사라지는 과정인지 판단하기는 좀 어렵다. 하긴 자신의 순수가 어디로 향하는지 철두철미하게 관찰하고 있다면 거기에 순수는 이미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음원 얘기로 돌아와, 스트리밍 환경에서 음반을 고를 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섬네일 이미지를 보며 고른다는 점이다. 음반을 보는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음반 매장에 가서 고를 때는 주얼케이스, 디지팩, (극히 드물지만) 스마트팩 등의 패키지 형태에 따른 차이와 종이 질, 인쇄 방식, 후가공 등에 따른 차이로 몇 시간쯤은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었다.

 

살짝 옆으로 새는 얘기지만 최근에 받은 선물 얘기를 꺼내야겠다. 하나는 보이저 호에 실려 보낸 지구의 소리를 물성에 집중해 펴낸 패키지다. 검정 판지에 금박으로 다이어그램을 찍은 표지는 걸작이다. 두꺼운 화보와 함께 금색으로 만든 세 장짜리 바이닐 세트는 멋진 물건이다. 패키지에는 시대의 요구 역시 반영해 음원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시리얼 번호가 들어 있지만 내겐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가 더 의미 있다. 시디가 들어 있는 패키지도 있는데 (턴테이블도 없는 주제에) 바이닐 패키지를 선택한 이유다.

 

다른 하나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초반이다. 판을 소유했던 사람이 신문에서 오려낸 글렌 굴드 기사를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 놓아 역사의 단편을 보는 묘미가 있다. 이 선물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턴테이블을 사야 하는데…….

 

앞서 언급한 복잡한 사정과 별도로, 평소라면 듣지 못했을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점은 매우 기쁘다. 요새 즐겨 듣는 음원은 <The Philadelphia Experiment>, 막스 리히터의 <Sleep>, 셀로니어스 몽크의 <Solo Monk>. 시디나 엘피 판으로 사고 싶다. 결국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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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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