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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귀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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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밥상 앞에서도 쉴 새 없이 웃고 떠들고 지지고 볶을 준비가 된 친구들의 얼굴이 찬찬히 떠오른다. (2018. 09. 03)

출처 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입맛이 달아났다. 더 더울 수 있을까 싶으면 더 더워지는 날씨 탓이다. 밖에서는 무조건 입이 시원한 음식을 찾고, 집안에서는 되도록 가스 불을 멀리하고 싶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열심히 끼니를 챙겨 먹는다기보다는 근근이 한 끼를 때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음식 앞에서 시작부터 ‘망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데, 요즘엔 밥상 앞에 앉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정갈하게 잘 차려진 가정식백반을 앞에 두고도 계곡물에 발 담그고 앉아 도토리묵무침에 들어 있는 오이를 아삭아삭 씹으면서 주전자에 든 차가운 막걸리를 한 사발 따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먹을 때 먹는 걸 생각하는 미련한 즐거움이 요즘처럼 활발했던 적이 있나 싶다. 그뿐인가. 일하기 싫지만, 더 일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때가 또한 이때다. ‘폭염 재난’ 극복을 위해 국가적으로 주 4일 근무를 실행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염원도 모두 입이 쓰기 때문이다.


여름에 입이 쓰면 부러 뜨거운 음식을 찾아 먹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쓴맛은 쓴맛으로 해결해야 제 맛이라며 늙은 오이를 사서 무쳐 먹는 이도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입이 쓸 때는 무조건 남이 차려주는 음식이 최고의 맛이다. 이럴 때 어김없이 ‘아빠의 손맛’보다 ‘엄마의 손맛’ 같은 게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엄마의 양념게장이나 엄마의 백김치, 엄마의 닭개장 같은 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군침이 돈다. 아무에게나 묻고 싶다.


‘입맛 없는 독립생활자들의 입맛 살리는 손맛 음식을 추천해 주세요.’

 

요즘 ‘밥블레스유’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즐겨 보고 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네 명이 자신들이 살아온 바를 토대로 전국팔도의 맛집이나 혼자 먹어도 좋은 음식,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음식 같은 것들을 알려주며 떠드는 수다잔치를 보노라면 그야말로 ‘저런 게 행복이지’하고 ‘노후의 식사’를 상상하게 된다. 뷔페에 갈 때는 고무줄 바지에 노브라라는 생활의 지혜나 음식을 통해 누군가의 고민에 공감하는 와중에 들려주는 ‘나이는 노력 없이 먹는 것이니 생색내지 말 것’이라는 고품격 조언은 밥상이 먹기 위한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배우고 느끼기 위한 장소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물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먹다 남은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가지가지 반찬에 참기름과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해야 한다


하지만 재료만 늘어놓는다고 비빔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비빈다는 말은 으깬다는 것이 아니다 비빌 때에는 누르거나 짓이겨서는 안된다 밥알의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도록 살살 들어주듯이 달래야 한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슬슬 들어올려 떠받들어야 한다 *
-「비빔밥」(이대흠, 『귀가 서럽다』  중에서)


‘챔기름’ 두른 꼬막비빔밥을 맛있게 나누어 먹는 친구들(김숙, 송은이, 이영자, 최화정)을 보면서 새삼 달아난 여름 입맛은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에 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새로울 것 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어떤 밥상 앞에서도 쉴 새 없이 웃고 떠들고 지지고 볶을 준비가 된 친구들의 얼굴이 찬찬히 떠오른다. 밥상 앞에서 죽상을 하고 있으면 등짝을 때리며 음식에 예의를 갖추라는 친구, 라면은 무조건 양은냄비이고 비빔밥은 무조건 양푼에 먹어야 하는 거라며 음식과 식기의 ‘무조건적인’ 궁합을 중요시하는 친구,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회를 먹는 ‘생선회 예찬론자’, 성게비빔밥 시식 소감을 ‘바다가 입에 촥∼ 들어오는 맛이야’라고 말하며‘오, 주여!’까지 찾는, 음식 하나로 더 멀리 가는 친구와 함께 세숫대야 양푼에 쓱쓱 비벼 먹는 강된장 열무 비빔밥은 얼마나 구수하게 맛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열량이 높아지는 늦여름의 맛이다.

 

 

 


 

 

귀가 서럽다이대흠 저 | 창비
세상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생명을 북돋는 어머니의 삶을 삶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마음이 진실하게 통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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