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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월간 채널예스> 2018년 10월호 『단어수집가』, 『단어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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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언어 사이는 어떤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한 끈으로 이어져있는 것일까, 새삼 궁금해졌다. (2018. 10. 04)

정이현의 오늘 살 책_01.jpg

 

 

인생의 첫 번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 최초의 순간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양육자-목격자의 진술에 의존해야 한다. 나의 경우 평범하기 그지없는 ‘맘마’였다고 전해진다. 애석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안녕’ 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고 ‘사랑’ ‘맥주’ ‘원피스’ ‘정적’ 같은 아름다운 단어가 아닌 것은 유감천만이지만 그래도 ‘악몽’ ‘협박’ ‘감염’ 전쟁’ 같은 단어가 아닌 게 어디란 말인가.

 

양육자-목격자로서 나도 자신의 ‘첫’을 궁금해 하는 아이들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큰 아이의 첫 번째 단어 역시 ‘맘마’ 혹은 ‘엄마’였는데, 나는 자꾸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아이가 ‘엄마’ ‘맘마’ ‘아빠’ ‘무울’ ‘바압’ ‘응아’ 등등의 생존 용어 몇 가지와, ‘상자’ ‘오이’ ‘기린’ ‘토끼’ 등등의 어렵지 않은 두 음절 단어 몇 가지를 발음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볕 좋은 오후, 아이는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중얼거렸다. ‘새 날라.’ 정말로 창밖에선 전깃줄에 앉았던 새 몇 마리가 포르르 날아오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그 광경을 가리켰다. 그 순간의 놀라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연결해보지 않았을, 그러니까 저 어린아이의 머릿속에서 개마고원과 마라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었을 두 단어가 조합되어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과 언어 사이는 어떤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한 끈으로 이어져있는 것일까, 새삼 궁금해졌다.

 

피터 레이놀즈가 쓰고 그린 책  『단어수집가』  는 소년 제롬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우표를 모으고 누군가는 동전을 모으고 또 누군가는 만화책을 모은다. 학창시절 유난히 ‘잘 모으던’ 수집가 친구들이 있었다. 각종 기념우표들이 빼곡히 들어찬 그들의 컬렉션보다 더 인상적인 건 그 자부심어린 태도였다. 제롬도 모으는 사람이다. 그의 수집품은 앨범에 끼우거나 장식장에 넣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만지거나 쓰다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제롬은 ‘단어’를 모은다. 제롬이 수집한 단어들은 ‘페루’ ‘버드나무’ ‘은구두’ ‘회오리바람’ ‘사각사각’ ‘포옹’ ‘불꽃놀이’ ‘보물’ ‘지키다’ ‘속삭이다’ ‘마다가스카르’ ‘명멸하는’ ‘탐미주의자’ ‘으르렁’ ‘장대비’ ‘잠재력’ ‘푸르르다’ ‘은은한’ ‘영혼’...............이루 셀 수 없다.

 

수집한 단어가 점점 많아지자 제롬은 분류를 시작했어. 날씨, 식물, 감정, 외국어.......... 어느 날 제롬이 낱말책들을 옮기고 있는데...........으앗!....................단어들은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어.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 『단어수집가』  중에서)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이 부분을 나는 여러 번 읽고 또 읽는다. 울적할 때, 슬플 때, 불안할 때, 노래처럼 입속으로 반복하면 신기하게 마음이 가라앉고 견딜만해진다. ‘나란히 있는 것을 상상도 안 해본’ 단어들, 보편적 유사성과 무관하게 배치된 단어들은 내가 알던 그 단어가 아닌 것 같다. 이 익숙한 세계의 커튼을 한 꺼풀 벗겨내면 전혀 다른 세계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수집가가 시중의 우표를 우표수집앨범에 끼우거나 동전을 보관케이스에 집어넣는 순간, 그 우표와 동전은 본래의 기능을 멈춘다. 그것이 우표와 동전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수집가와, 그의 수집품이 맞닥뜨리는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그런데, 혹시 단어도 그런 게 아닐까? 좋은 글을 쓰려면 빈자리에 가장 적확한 단어를 찾아 맞추는 일이 기본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온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안타까운 수집가가 아닐까? 날씨는 날씨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감정은 감정대로, 그 일반적인 분류법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동안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나는 단어의 본질에 대해, 단어와 현실의 관계에 대해 더 여러 가지를 공부해야만 했다.

 

『단어 탐정』  의 저자 존 심프슨은 1976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 사전부에서 어시스턴트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37년 간 같은 회사에 재직하고 2013년 은퇴했다. 20년 동안 그는 <옥스퍼드영어사전>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역사사전(historical dictionary)으로 불리는 <옥스퍼드영어사전>(OED)는 단순한 사전이 아니라고들 한다. 『단어 탐정』 은 하나의 단어가 지금 우리가 쓰는 바로 ‘그 단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좇는 사전편집자의 모습이 범죄사건의 단서를 찾아 헤매는 탐정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제목이다.

 

‘사람들은 사전을 언어에 대한 영원한 진리를 내보내는 신탁쯤으로 여긴다.’ 이 책에 대한 스티븐 핑거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실은 수많은 언어의 달인들이 내놓은 창조적인 발명품과 입소문으로 퍼진 유행에 대해 숙고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이 만드는 작품이다’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애쓰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므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마치 나라는 인간에 대한 예상평가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고요히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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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 단어 수집가 <피터 레이놀즈> 글그림/<김경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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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어 탐정 <존 심프슨> 저/<정지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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