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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최선이 우리의 최선

‘그 상황에서의 최선’이라는 말조차 아내에게만 들이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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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라는 말을 좋아하므로 늘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 굉장히 엄격한 말이라 타인에게 들이밀면 안 된다. (2018. 11. 05)

김성광-11월호-(2)-1.jpg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中 「특별한 일」의 일부

 

최선이라는 말은 엄격하다. 나름 열심히 노력한 일의 경우에도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는 불투명하다. 돌아보면 늘 조금은 더 열심을 쏟을 여지가 있었으니까. 최선이라는 기준을 세워 놓으면 결코 삶이 그 기준에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몸의 일부를 잘라낼 만큼의 절박함을 최선이라 한다면 더구나 그렇다.

 

그럼에도, 최선이라는 말 앞에 내 삶을 세워보는 걸 좋아한다. 결코 닿을 수 없더라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 마음 먹는 각오의 시간이 내겐 필요하다. 시집을 그리 많이 보는 편은 아닌데도 이규리 시인의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를 몇 차례 펼친 것도, 「특별한 일」이라는 시에 자주 시선을 고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최선이라는 말을 좋아하므로 늘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 굉장히 엄격한 말이라 타인에게 들이밀면 안 된다. 몸의 일부를 잘라낼만큼 열심히 했느냐고 타인에게 묻는 일은 끔찍하다. 시인의 이야기도 우리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이야기지 타인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자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최선이라는 잣대를 엄격히 들이대는 것은 자신에게 국한되어야 한다.

 

아이가 아팠다. 그저 감기지만 열이 나면 민감해진다. 지안이는 늘 40도 부근까지 열이 오른다.  연휴 중이라 병원엘 못 가서 일단 해열제만 먹였다. 역시나 열은 잠깐 내렸다 다시 올랐다. 차로 삼사십분 거리의 연휴에도 연 병원을 찾아 다녀온 후 다행히 차도가 있었다. 완전히 떨어지진 않았지만 39도를 넘어가지는 않게 되었다.

 

그런데 기침은 더 심해졌다. 연휴가 끝나 출근을 해야 했고 아내가 집 근처 이비인후과에 데려가기로 했다. 이전 병원에서 처방한 약이 열은 잡고 있으니 처방내역을 의사에게 보여주고 새 처방을 받아달라고, 동시에 이전 병원에도 전화해 아이의 예후를 알려주고 이후 처방에 대해 문의해달라고 당부했다. 연속성 있는 처방을 받고 싶었고, 열이 조금 내려간 상황에서 해열제 강도를 낮출 필요는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내도 그게 좋겠다 했다.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하니 내가 부탁한 것들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처방받은 해열제 용량이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이부프로펜 계열. 이부프로펜 계열의 해열제는 지안이의 저체온을 불러온 적이 있어서 가급적 피하던 터였다. 저체온은 아이에게 훨씬 힘겹다. 자지러지며 울부짖는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고 내 한숨은 아내에게 질책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 했다. 건너 편에서 아내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퇴근 후 돌아오니 지안이는 새로 받은 약을 먹고 36도대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약 먹을 시간이 돌아왔으나 체온은 그리 오르지 않았다. 평소 이 정도 열이라면 해열제를 먹이지 않을 텐데, 의사가 하루 4번을 먹이라 했고, 이전 병원의 의사는 체온이 떨어진다 싶어도 계속 먹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신경 쓰였다. 우리는 고민했지만 끝내 의사의 권위를 무시하지 못했다. 투약을 했고, 약 기운이 돌자 지안이는 울며 소리치지 시작했다. 저체온이었다. 마음이 괴로워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내의 마음은 더 무거웠을 것이다. 처방을 잘못 받아왔다고 내가 질책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내 행동을 깊이 반성한다. 아내는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지안이는 병원에 가기 전부터 나가기 싫다며 발버둥을 쳤고 병원에서도 약국에서도 울어댔다. 밥 먹이고 약 먹이고 씻기고 옷 입혀 병원에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상황이었고, 우는 아이를 달래며 정신없이 의사와 상담을 했을 것이다. 더 물어보기는 커녕 의사의 설명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나도 충분히 겪어 놓고도, 나는 아내의 최선이 내가 당부한 것과 달랐다는 이유로 자책하게 한 셈이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당부는 당부가 아니고, 우리가 상대에게 요청할 수 있는 최선은 언제나 ‘그 상황에서의 최선’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한 행동이었다.

 

한편 ‘그 상황에서의 최선’이라는 말조차 아내에게만 들이밀 것은 아니었다. 나는 회사에 있고 아내 혼자 정신없는 상황에 놓인 채 일을 처리해야 했던 것 자체가, 우리 가족이 놓인 상황에서 우리가 한 최선의 판단이었다. 아내가 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내의 최선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최선이었다. 최선은 최종 행위자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다. 가급적 많은 것들을 함께 상의하겠지만, 앞으로도 아내나 내가 상의할 여유없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의 대처도 각자가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 우리의 최선을 각자가 다한 것이라 생각한다. 각자의 최선이 바로 우리의 최선이다.

아이도 그렇게 대하고 싶다. 자라면서 부모의 눈에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그게 당시 아이로서는 최선의 판단이고 최선의 노력이었다는 것을, 아이가 받아든 결과는 아이 혼자의 결과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한 일상에서 발현된 최선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가족과 가족 사이에서,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최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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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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