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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침대로

영화 <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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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로와 툴리, 하나면서 둘인 그녀들은 더 늦기 전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회복할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핥으며 스스로를 치유해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201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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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툴리>의 한 장면


 

<툴리>는 극사실적으로 삶의 현장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은유와 비유의 영화다. 이를테면 육아, 단조로운 삶, 또 다른 자아를 곱씹게 한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항상 그렇지만!) 숨이 잠시 멎을 정도. 충격적이고 놀라워서라기보다는 눈물 나도록 안도하게 만든다는 것에 또 다른 반전이 있다. 그래, 나에게도 스스로를 격려할 힘이 남아 있었지라는.

 

영화 속 “이제 그만 침대로”라는 대사에 움찔했다. 온종일 끌고 다녔던 몸은 천근만근, 원하지 않은 말을 들었던 귀는 씻어내도 그 말은 몸에 남아 마음을 계속 할퀴는 밤에는 누군가 내게 ‘이제 그만’ 하며 눈을 감겨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었으니. 막 새로운 육아에 돌입한 엄마 ‘마를로’에게도 밤의 침대란 좀처럼 쉴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누가 이 산모의 눈을 감기고 편히 재울 수 있을까.
 
영화배우 샤를리즈 테론이 22킬로그램을 증량해 연기한 주인공 마를로는 여덟 살 난 첫째 딸, 특이한 자폐 성향을 보이는 둘째 아들, 그리고 막 태어난 아들 미아를 키우고 있다. 계획에 없던 셋째 아이 임신으로 육아 휴직 상태다. 주로 일 혹은 게임에 빠져 있기만 하는, 선하지만 눈치 없는 남편 드류는 ‘아무것도 모른다’. 집 안은 살림의 흔적이란 없이, 곳곳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고 냉동피자와 치킨너겟으로 연명한다. 샤를리즈 테론의 공허한 눈빛은 자체로 마를로의 눈빛이어서, 그 몸짓과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헛헛해진다.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러운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최정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중에서

 

마를로가 한 손에 아기바구니, 한 손에 둘째 아이 ‘조나’를 잡고 학교로 뛰어가는 장면을 보면, 겅중겅중 캥거루 맞다. 이상 행동으로 유치원에서 쫓겨난 조나의 돌발성을 끌어안고 마음 다스리는 현실의 여성에게 ‘엄마는 엄마고 아이는 아이다’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엄마도 아이도 사람이지만, 그 엄마 속에는 아이 셋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 이 엄마에게 인간다움을 일깨우려면 육아 노동 분담을 허해야 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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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툴리>의 한 장면

 

 

생활이 짐이 되어갈 때, 야간 보모인 ‘툴리’가 찾아온다. 젊고 건강하고 부드럽고 능숙한 손놀림의 그녀는 “아이가 아니라 엄마인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에 마를로는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진다.
 
좀처럼 일상의 생기를 찾지 못하고 의미조차 온데간데없는 마를로에게 툴리는 ‘매일 일어나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그 단조로움이 가족에게 선물 같은 것’이라고 순진하리만치 사랑 담은 말도 건넨다. (그래요, ‘가족 선물’을 누가 모르나요, 흑흑.)
 
마를로와 툴리, 하나면서 둘인 그녀들은 더 늦기 전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회복할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핥으며 스스로를 치유해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모든 그녀들이 이제 그만 피로와 남은 숙제와 걱정을 버리고 조용히 침대로 갈 수 있기를!
 
(덧) <툴리>는 2007년 10대 미혼모 이야기 <주노>로 경이로운 흥행 성적을 냈던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과 디아블로 코디 작가의 귀환작. 주노와 툴리는 극복의 절묘함을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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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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