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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을 가까이 알게 된 느낌

『길 잃기 안내서』 편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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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들과 어떤 젊은 시절을 보내며 예술에 대한 감각을 길렀는지를, 지금의 솔닛을 형성한 몇 곳의 장소들을 자세히 알게 된다. (201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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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멀리 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 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자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어떤 사람은 가치와 관습을 상속받은 집처럼 물려받지만, 어떤 사람은 그 집을 불태워야 하고, 자기만의 땅을 찾아야 하고, 맨땅에서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

 

『길 잃기 안내서』 의 부제인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따왔다.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더 멀리 가는 사람, 더 멀리 가야만 하는 사람들.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가르치는 규범 속에서 도무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소수자, 아웃사이더, 외톨이, 생각이 많은 아이들, 줄곧 왜인지 모르게 여기 속하기 어렵다고 느껴온 모든 사람들.(책을 읽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사람이리라 짐작한다. 뭐니뭐니해도 책은 다른 세상을 만나기에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며 손쉬운 여행 수단이니까. 다른 이야기, 다른 세계를 만나야만 하는 절박함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도록 한다.)


리베카 솔닛 또한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솔닛의 애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찾기 위한 모험을 여러 차례,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에서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라는 좌우명을 갖게 한 그녀의 모험에 대해 읽었고,  『걷기의 인문학』 에서 순례길을, 전쟁 반대 시위를 걸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 사람들(여기에는 물론 솔닛 자신도 포함된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길 잃기 안내서』 는 그 모든 모험과 방랑이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를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솔닛은 이 책을 두고 “내가 길 잃기에 사용하는 몇 점의 지도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아름다운 에세이는 솔닛 자신이 인생에서 어떻게 길을 잃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지금의 자신을 형성하고 발견해왔는지에 관한 아주 내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왜 인생에서 길을 잃어야만 하는지, 길을 잃고자 하는 우리는 무엇을 지도 삼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해주는 글들이다.


이 책을 만들면서 솔닛을 더욱 가까이 알게 된 기분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2017년 방한 당시 그녀를 직접 만났던 경험보다도 더더욱 가까이 말이다.(다시 한 번, 책은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솔닛이 자신의 가계도를 말할 때 시초로 삼아야 했던 두 할머니의 이야기를, 역사가로서 그녀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관점을 갖게 되었는지를, 어떤 친구들과 어떤 젊은 시절을 보내며 예술에 대한 감각을 길렀는지를, 지금의 솔닛을 형성한 몇 곳의 장소들을 자세히 알게 된다.


그렇지만 솔닛을 ‘가까이 알게 된’ 것 같았다는 말은 단순히 솔닛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어서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그 속에서 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솔닛을 변화시켰던 장소와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이 삶을 살아오면서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놀랍고도 고통스러운 변신의 경험들과 공명한다.  『길 잃기 안내서』 에서 솔닛은 자신의 다른 그 어느 책보다도 사적이고 내밀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경험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를 길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당신’들 중 누구라도 이 책에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자기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대목을 하나 이상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도 “네”라고 대답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더 나아갈 것이지, 여기서 멈출 것인지. 나는 거기서 멈추어도 되었다. 지금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그럭저럭 살아왔고, 멈춰서더라도 아마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럭저럭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그건 정체를 알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어떤 경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 나아가서 내가 그어놓은 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겠다는 대답이었다. 그 순간 『길 잃기 안내서』 의 몇몇 대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지난 몇 달간 손에 붙들고 있던 원고는, 미지를 만나고 길을 잃는 데에 기꺼이 동의하는 일에 대한 원고였으니까.


솔닛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한 선원(禪院)에서 들은 설법의 내용을 소개한다. ‘터틀맨’이라 불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초콜릿 외판원에 대한 이야기다. 터틀맨은 온 도시를 돌아다니며 초콜릿을 솜씨 좋게 팔았다. 달아도 너무 단 초콜릿을 한 사람이 두 통씩 구매하게 만들 정도의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그러던 어느 날, 선원장은 이런 광경을 마주친다.

 

“제가 요 앞길에 서 있을 때,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터틀맨이었죠. […] 그는 길을 건너야 했는데, 그가 길 건너는 방법은 길가에 서서 그냥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길 건너는 것을 도와줄 때까지.”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 왜 설법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한 걸까?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서 만나보시라. 몇 줄의 요약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울림이 담겨 있으니까. 다만 선원장은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 터틀맨을 한 조각이라도 품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만 덧붙이겠다. 솔닛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들은 이 설법의 내용은 내게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멈춰서고 싶을 때, 안전한 집 안에 틀어박혀 세상의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을 피하고 싶을 때, “네” 또는 “아니오”라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때 나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솔닛은 말한다.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발견하는 삶은 둘 사이 미지의 땅 어딘가에 있”다고. 『길 잃기 안내서』 는 왜 인생에서 길을 잃어야 하는지, 길을 잃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책이다. 나는 솔닛이 말하는 길 잃기와 미지의 쓸모에 설득되었다. 여러분에게도 이 책이 삶이라는 광대한 풍경 안에서 길을 잃어볼 용기를, 적어도 미지를 만나볼 마음을 먹는 계기를 가져다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바로 여러분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니 말이다.

 


 

 

길 잃기 안내서리베카 솔닛 저/김명남 역 | 반비
서부 사막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또 자연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털어놓으며, 젊은 시절 예술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을 함께 길러온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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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예원(반비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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