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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개똥 같아요

영화 <가버나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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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어른과 일찍 철이 든 어린이, 이 세상의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 (2019.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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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터키를 다녀왔다. 이스탄불의 마르마라해 선착장 앞에서 조악한 문방구용 악기로 연주하는 소녀들을 만났다. 연주는 제법 잘했다. 문제는 겨울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티셔츠 하나로 추위를 견디는 듯했다. 시리아 난민이었고, 소녀의 부모가 여행자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 옷을 덜 입히는 것이라고 했다. 갖고 있던 유로화 동전을 몇 개 내놓았다. 연주하는 손보다 빠른 눈놀림으로 액수를 헤아리는 것 같았다. 여행길, 소녀의 추위를 잠깐 걱정하다가 이내 잊었다. 지구상에 이런 소년소녀가 얼마나 많이 있는 것일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가버나움>은 그런 나에게 ‘가슴을 찌르는’ 영화였다. 주인공 ‘자인’은 교도소로 면회 온 어머니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엄마 말이 칼처럼 가슴을 찌르네요.” “엄만 감정이 없나 봐요.” 자인이 열두 살이란 것을 생각하면 이 말 한마디가 어떤 무게인지 알 수 있으리라.
 
지독한 가난과 부모의 몰이해 속에서 버려지듯 자라는 레바논 아이들과 난민, 불법체류자들의 아수라장이 배경이다. 자인은 출생신고서도 없이 동생 여섯 명과 부모를 위해 주스 장사와 배달 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웬만한 어른 이상의 배짱과 거친 욕설을 하는 자인을 어린이라고 선뜻 생각할 수 없다. 동네 형들과 어울려 담배를 곧잘 피우지만 그건 원해서라기보다는 놀이도 노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처럼 그곳은 성경 속 지옥 마을 ‘가버나움’이다.
 
자인은 좋아하는 여동생 ‘사하르’가 돈에 팔려 결혼하게 되자 분노의 질주를 한다. 오누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부모와 남편이 될 상점 주인의 작당을 저지할 수 없었다. 지옥도가 분명하다. 의식주 무엇 하나 제대로 영위되지 않고 돈으로 팔리기까지 하는 세상에, 부모와 자식 간의 따뜻한 정이란 소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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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절망을 안고 가출한 자인은 불법체류자인 에티오피아 미혼모 ‘라힐’의 젖먹이 아들 ‘요나스’를 돌보며(어린이가 어린이를 양육한다) 지내다가, 라힐이 단속에 걸려 귀가하지 않는 순간부터 또 하나의 지옥도를 겪는다.
 
자인은 스웨덴으로 망명하기 원하지만 돈과 신분 서류가 필요하다. 돈은 트라마돌 약으로 만든 주스로 마련하고, 서류를 챙기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지만 강제 결혼한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칼을 들고 달려가 그 남편을 찌른다.
 
법정에 선 자인은 자신의 죄명을 확인하는 판관에게 “제가 개새끼를 찔렀거든요”라고 말한다. ‘사람을 찔렀냐’는 질문에 ‘개새끼’라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자인의 눈동자에는 아무 빛이 없다. 5년 형 구속 기간에 우연히 ‘아동 학대’를 주제로 생방송 된 <윈드 오브 프리덤>에 전화를 건다. 자인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말한다. 교도소 전화로 부모를 고소한 어린이! 부모를 고소한 죄명은, ‘나를 태어나게 한 죄’다.
 
자인의 말대로 사는 게 개똥 같다. 차라리 부모가 없었더라면 지옥도 없다. 삶도 없지만 말이다.
 
영화 <가버나움>은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의 작품이다. 자인과 라힐, 요나스 등 실재 인물을 베이루트 지역에서 캐스팅했다. 제작진은 그들의 실제 삶을 영화에 반영하고 도울 방법을 찾으려 했다. 칸느영화제 상영 후 15분간 기록적인 기립박수가 터진 것도, 레바논 영화 최초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것도 영화라는 작품 이상의 현실적인 제안과 감동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똥을 어떻게 치울 수 있을까. 철없는 어른과 일찍 철이 든 어린이, 이 세상의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 어린이가 먼저인 세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자인의 웃음을 보았다. 신분증 사진 촬영을 위해 웃었다. 출생신고서도 없던 자인은 이제 신분증을 얻게 되었다. 엔딩 자막에는 영화에 출연했던 이들의 실제 삶이 바뀌었다고 써 있다. 자인은 학교에 다니겠지. 부모를, 아니 태어난 자신을 용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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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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