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용기 있게) 산책

용기 없이 사는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든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용기, 라는 단어가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2019. 03. 08)

21.-(ㅇㅛㅇㄱㅣ-ㅇㅣㅆㄱㅔ)-ㅅㅏㄴㅊㅐㄱ-00000--1.jpg

 


기차 안에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부부가 있다. 근처에 앉아 부부 싸움을 구경하던 남녀의 눈이 마주친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남자는 여자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 알아요?" 대화가 시작된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질문은 답으로 답은 또 질문으로 그 질문은 다시 답으로, 자연스레 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느새 남자가 내려야하는 역이 다가오고 그는 함께 기차에서 내리자고 제안한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해서 하루를 혼자 보내야 하는데 그 시간을 같이 하자면서. 여자는 남자를 따라 기차에서 내린다.

 

1995년에 개봉했던 <비포 선라이즈>의 줄거리다. 10여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다. 그때는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 멋졌다. 처음 보는 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 하고, 말을 거는 일은 상상도 못해본 나로썬, 그들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있다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농을 던지고, 옆에 앉고, 같이 걷자고 하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어울리는 얘길 하고, 자연스레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 어떻게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21.-(ㅇㅛㅇㄱㅣ-ㅇㅣㅆㄱㅔ)-ㅅㅏㄴㅊㅐㄱ-00000-1.jpg

 

 

여행을 떠날 때는 <비포 선라이즈> 같은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마음 깊이 용기를 넣어두곤 했다. 그리고 정말, 여행을 가서 낯선 이에게 말을 걸어본 일이 생겼었다. 흥분해서 써둔 일기도 있다.

 

'어제는 모르는 남자에게 번호를 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이라 여겼던 일이다. 망설이고 있을 때는 그래선 안 되는 이유만 떠올랐는데, 막상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그 이유들은 다 무색하다.

 

원래의 목적인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기도 한 일이 되었다. 그보단 얼른 돌아가서 번호를 물으라고 응원하던 친구의 표정, 핸드폰을 내밀 때의 떨림, 당황한 눈동자, 집에 돌아올 때 발의 리듬과 의기양양함, 한동안 지어본 적 없던 푼수 같은 웃음. 무엇보다 그간의 무력과 권태가 허무하게 무너질 때, 써본 적 없는 마음 근육을 써봤다. 그것들을 되짚으며 천장을 멀뚱히 보는 아침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들뜨고 재미있고 웃긴 거지? 오후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이라 여겼던 리스트'를 적어볼까, 싶다. 아 왜케 즐거웡….'

 

얼마 전에 <비포 선라이즈>를 또 한 번 봤는데 이번에 느낀 단 하나의 용기는 ‘기차에 오른 일’이다. 영화는 기차 안에서 시작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집에서 나오게 되는 순간이 있었을 거다. 각기 앉아 있던 일상, 어떤 이유로든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기차에 올랐다. 짐 가방을 꺼내고, 책 몇 권과 옷을 챙겨 넣고, 비행기와 기차표를 끊고, 안전한 자리에서 일어난 것. 그 용기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21.-(ㅇㅛㅇㄱㅣ-ㅇㅣㅆㄱㅔ)-ㅅㅏㄴㅊㅐㄱ-00001-1.jpg

 

 

<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보았던 10대의 나에게 기차 타는 일 따위는 용기가 아녔을 거다.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 다음의 말과 행동이 더 대단하게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기차 타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회사에 연차를 제출할 수 있을까. 그때 같이 갈 사람이 있나. 혼자 떠나볼까.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요즈음의 내 주변에는 작고 적은 용기만이 머문다. 일, 사랑, 우정, 가족, 여행, 주말 심지어 매일하는 산책에도 관성이 생겼다. 뭔가 사건을 만들려면 전과 다르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단단히 여며야 한다. 자연스레 용기 내는 사람을 보는 마음도 전과 달라졌다. 아름답다. 용기를 내 기차에 오르는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고 "멋지다."고 말하게 된다.

 

나도 멋지면 좋겠지만, 요즘은 어느 일 하나에 용기 없이 사는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든다. 기차에 오르는 일을 포기한 대신 관성에 기대 하루를 보내고, 매일 부지런히 걸어 출근을 하고, 동네에서 편안한 친구를 만나고, 자기 전에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괜찮고 충분해서 용기는 아껴 둬도 괜찮지, 싶다.

 

이러다 어느 날에는 또 거대한 용기가 올 수 있을까. 오면 좋지.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용기가 온 날,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있는데 이불 밖으로 나온 내 발가락들이 요란스레 움직이던 모양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웃다가 조용히 잠에 든다.


그렇지만 감고의 뜰에서 하는 산책과 기숙사에서의 산책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숙사의 산책과 <홍당무>에 나오는 일요일의 가족 산책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만약 <산책하면서 듣는 강연>이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걷는 동중에 안내자 모르게 슬쩍 옆으로 샐 수도 있으니까. 채찍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에 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나가면서 군인 한 사람에게서 한 떄씩 매를 맞는 벌을 받은 불쌍한 캉디드는 이런 식으로 두 번의 <산책>을 당했다. (39쪽)
-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중에서

 


 

 

일상적인 삶쟝 그르니에 저 | 민음사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을 다룬 열두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사물 혹은 행위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차근차근 치밀하게 분석한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일상적인 삶

<장 그르니에> 저/<김용기> 역8,100원(10% + 5%)

『섬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에 이어 그르니에 선집 전 4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세이집. 『일상적인 삶』은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을 다룬 열두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르니에는 각각의 사물 혹은 행위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일상적인 삶 - 그르니에 선집

<장 그르니에> 저/<김용기> 역5,600원(0% + 5%)

『섬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에 이어 그르니에 선집 전 4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세이집. 『일상적인 삶』은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을 다룬 열두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르니에는 각각의 사물 혹은 행위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사람을 남기는 독서와 인생 이야기

손웅정 감독이 15년간 써온 독서 노트를 바탕으로 김민정 시인과 진행한 인터뷰를 묶은 책이다. 독서를 통해 습득한 저자의 통찰을 기본, 가정, 노후, 품격 등 열세 가지 키워드로 담아냈다. 강인하지만 유연하게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손웅정 감독의 인생 수업을 만나보자.

쉿, 우리만 아는 한능검 합격의 비밀

한국사 하면 누구? 700만 수강생이 선택한 큰별쌤 최태성의 첫 학습만화 시리즈. 재미있게 만화만 읽었을 뿐인데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마법! 지금 최태성 쌤과 함께 전설의 검 ‘한능검’도 찾고, 한능검 시험도 합격하자! 초판 한정 한능검 합격 마스터팩도 놓치지 마시길.

버핏의 투자 철학을 엿보다

망해가던 섬유공장 버크셔 해서웨이가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난 과정을 보여준다. 버크셔의 탄생부터 버핏의 투자와 인수 및 확장 과정을 '숫자'에 집중한 자본 배분의 역사로 전한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담아 가치 투자자라면 꼭 봐야 할 필독서다.

뇌를 알면 삶이 편해진다

스트레스로 업무와 관계가 힘들다. 불안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다. 이런 현대인을 위한 필독서. 뇌과학에 기반해 스트레스 관리, 우울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수면과 식습관에 관해 알려준다. 처음부터 안 읽어도 된다. 어떤 장을 펼치든, 삶이 편해진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