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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발 좀 받습니다

기도하며 삼키는 한 움큼의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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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라면 멀티 비타민 한 통 쯤은 늘 구비해둘 테다. 챙겨 먹기 시작하면 언젠가 한 움큼이 되고야 마는 건강 보조제와 함께하는 삶. 약을 삼키며 우리가 바라는 것과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에 대해. (2019. 0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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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 움큼의 약을 입에 털어 넣고서야 잠에 든다. 아, 내가 말하는 약이란 비타민과 각종 건강 보조제 정도이다. ‘약을 털어 넣는다’고 하니 괜히 약쟁이가 된 것 같아 괜히 붙여보는 사족이다. 앉아서만 장시간 일을 하다 보니 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게 억울해서 약을 챙겨먹기 시작했다. 직장에서의 일만으로 내 할당 에너지가 다 소진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지 않은가. 잠들기 전 약통을 여는 행위는, 일종의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제가 하고픈 걸 다 해내게 해주세요” 라고. 그것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별 체감이 되지 않더라도.

 

잠은 성실한 사람에게는 휴식이 되고, 어떤 종류의 것이든 무절제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되는 것이었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호의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원칙과도 같았다. 산업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은 잠을 잘 자는 삶, 그래서 다음 날에도 순조롭게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랑 드 쉬테르, 『마취의 시대』  中

 

하고 싶은 게 많아진 뒤로는, 아프면 쉬어야 되는데, 그 쉬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물론 내가 하고픈 것들이란 퇴근 후에 시작되는 일들이다. 운동에 흥미가 생겨 달리기에 필라테스, 그리고 수영까지 하면 일주일 치 운동이 꽉 찬다. 매주 수요일에는 오케스트라 연습을 위해 바이올린을 들고 출근한다. 가끔 요리도 하고, 지인들과의 술자리도 가지며, 애인과도 만난다. 최근에는 준비하는 자격증 시험이 있어 공부도 시작했다. 모두 하고 싶어 시작한 일들이고, 다 잘 해내고 싶어지다 보니 약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이런 내게 “힘 좀 빼고 살지”라고 하셨다. 너무 많은 걸 하려다 보면 다치기 십상이라고. 그러면서도 석류즙을 챙겨주시고, 크릴 오일 한 번 먹어보라며 약 통을 건네셨다. 할머니는 노니 캡슐을 늘 챙겨주신다. 이렇게 건강 보조제를 서로 챙겨준다는 건 서로를 응원하는 일이다. 작년에는 직장에서 애정하는 분께 프로폴리스를 선물 받았다. 함께 주신 엽서에는 나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다. 이렇게 챙겨 받은 약들은 약의 효능보다 약을 삼킬 때마다 그 마음들이 생각나 사랑을 삼키는 것만 같다. 그 마음들을 먹고 나는 또 자라나고, 점점 단단해진다.

 

프로이트의 연구가 내놓은 결론대로, 코카인은 원래는 불가능했던 활동을 그 불가능의 원인이 되는 것과 일종의 거리두기를 통해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코카인은 ‘유능한 조작자’였다. 우울증이나 신체장애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코카인을 두고 ‘활력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다. 코카인은 행동하게 만들었다. 행동하도록 자극함과 동시에 그 자극에 저항하는 것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로랑 드 쉬테르,  『마취의 시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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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우리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다. 게임 속의 캐릭터가 ‘포션’을 마시듯이, 나도 이렇게 중요한 날이면 언젠가부터 ‘수험생 비타민’으로 유명한 어느 약을 마신다. 연주회 전날 리허설로 2시간, 연주회 당일 2시간 짜리 연주를 2번해야 하는 일정이기에 체력은 필수다. 거기다 1년 간 오늘을 위해 연습해왔으니, 가장 잘 연주해낼 집중력도 필요하다.


이 모든 부담감을 담아 약을 뜯어 마셨다. 오늘 연주가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주회 전날 리허설까지도 반복적으로 틀렸던 부분이 많이 걱정되었다. 전날에는 정말 부담이 많이 되어서 무대 위의 내가 큰 실수를 하는 꿈까지 꿨다. 이런 부담과 걱정을 날려달라고 기도하면서 마셨던 약이니, 효과가 있어야만 했다.

 

약발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반복해서 틀리던 부분을 덜 틀리게 되었고, 긴장감은 생각보다 덜해졌다. 1부 연주가 끝나고 나서는 단원들끼리 “와 우리 좀 잘 한 것 같다”며 웃으며 내려왔다. 가장 걱정되었던 2부 연주에서 놓친 부분이 있었지만 티가 나지 않도록 무마할 집중력으로 버텼다. 연주회는 무사히 끝이 났다. 10개월 가량 연습한 곡이 무대 위에서 끝이 나니 무척 후련했고, 오늘도 잘 받아준 내 약발에 감사했다. 실은, 약발이 아니라 나에 대한 믿음이었겠지만.


연주회를 마치고 난 뒤에는 그래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조금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가장 크게 남는 것은 직장에서의 삶이 아닌 무대에서의 삶도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성취감이 아닐까. 이것을 위해 우리가 모여 연습을 하고, 무대를 만들어본다는 것은 모두 부정할 수 없을 테다.

 

무대뿐만이 아니라 살면서 느끼게 될 어떤 성취와 자신에 대한 애정은 어떻게든 활력이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몸에 활기를 찾기 위해 운동을 하고, 건강 보조제를 찾아 먹으며 직장 밖에서의 내 삶에 대해 꿈꾼다. 오늘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낼 힘이 생겨나게 해 달라고.


약의 효능은 크게 체감하지 못할지라도, 한 알씩 삼키면 왠지 힘이 솟는 것처럼 상상을 하면 조금씩 몸에 힘이 생겨나는 것 같다. 약발이란 정말 약의 효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런 나의 믿음이 한 알씩 몸에 쌓여 퍼져가는 게 아닐까. 약만을 믿고서는 효과가 생길 순 없다는 건 확실하다. 약으로 인해 내가 움직이고, 어떤 걸 해낼 거라고 힘을 내야만 내 몸도 반응 할 테니까.

 

누군가 건강 보조제를 한 움큼 챙겨 먹는다면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얼 그리 챙겨먹느냐고 핀잔을 주기 보다는 그를 응원해 주고 싶다. 그렇게라도 힘을 내어 보겠다는 그 마음이 대견하니까.


 

 

마취의 시대로랑 드 쉬테르 저/김성희 역 | 루아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복용하는 수면제에서부터 강력한 우울증 치료제에 이르기까지 약물을 통한 감정 조절의 역사를 살펴본다. 약물이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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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나영(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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