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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Policing : 몇 년 안에 인터넷 상용어가 될 것이다

<월간 채널예스> 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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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당하는 사람이 부당함을 주장할 때 메시지보다는 ‘톤’을 걸고넘어지는 행동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가능한 한 ‘좋은 말’로 하라는 지적이다. (2019.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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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를 번역할 때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처음 접했다. ‘누구나 남들은 모르는 역사가 있다’라는 챕터에서 저자 록산 게이는 남자들에게서 맥주 냄새를 맡거나 TV에서 여성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보거나 울창한 숲을 지나가기만 해도 자신의 집단 성폭행 트라우마가 떠올라 고통스러워하지만 트리거 워닝이 과연 우리를 보호해 주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트리거 워닝이란 주로 인터넷 게시물 앞에 적힌 “이 영상은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도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의 경고문으로 미국에서는 널리 쓰이고 있었으나 내가 록산 게이의 책을 번역하던 2015년 말에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 용어를 적절하게 번역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나처럼 이 개념을 처음 접한 독자들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 번역어를 만들고 싶었다. 인터넷을 뒤져 봐도 참고할 만한 예가 없었기에 노트에 trigger와 warning의 뜻인 방아쇠, 트라우마, 계기, 연상, 주의, 경고, 고지 등을 모두 적어 놓고 화살표를 그어 가며 조합을 시도했다. 선배 번역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번역가들이 모여 있는 게시판에도 문의했다. 최종적으로는 ‘연상 반응 주의’라고 옮긴 후에 원문과 함께 설명을 덧붙였고, 본문에서는 경고 문구, 주의 문구 등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트리거 워닝은 트리거 워닝이 되었다. 이제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많은 인터넷 사용자가 이해하는 개념이다.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둔 단어들을 한숨 쉬며 들여다보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중얼중얼하며 입에 맞는 용어를 찾아보던 나의 노력은 전부 무색해져 버렸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차라리 트리거 워닝이라고 그대로 두고 반복 사용했다면 독자들에게 새 용어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번역가들은 낯선 용어가 등장하면 제발 선례가 있기만을 바라며 국내 포털 사이트에 원문을 쳐 본다. 마땅한 대안이 없을 때는 야심이 생기기도 한다. 문화 이해력과 언어 감각을 최대한 발휘하여 앞으로 기자와 번역가들이 참고하고 사람들의 입에 자연스레 오르내릴 우리말 번역어를 최초로 소개한 사람이 되자! 하지만 꼭 한국어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2013년에 수잔 놀렌 혹스마의 『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  본문에서 ‘오버씽킹(overthinking)’이라는 용어가 수백 번 등장했을 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번역가가 ‘생각 과잉’을 고민해 보지 않았을까. 번역가는 고유 명사를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한국어로 번역하길 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버씽킹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지금은 굳이 원어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익숙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백래시(backlash)’도 마찬가지다.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  가 번역 출간되기 전에 페미니즘 책에서 이 용어나 책 제목을 만날 때마다 나는 ‘역풍’으로 옮겼고, 다른 번역가는 ‘반동’ ’반격’ 등으로 옮긴 것으로 알지만 결국 백래시는 백래시가 되었다. 입에 착착 붙을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상황에서 쓰이기도 한다.


최근에 인종 차별에 관한 책을 번역하다가 ‘톤 폴리싱(tone policing)’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는 정보가 거의 없었고 구글에서 관련 기사를 여러 편 읽은 후에야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톤 폴리싱’이란 차별당하는 사람이 부당함을 주장할 때 메시지보다는 ‘톤’을 걸고넘어지는 행동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가능한 한 ‘좋은 말’로 하라는 지적이다. 흑인이 인종 차별 논쟁 중에 흥분하거나 비속어를 사용하면 일부 백인들이 그런 태도는 용납하지 않겠다며 자리를 뜬다. 때로는 생명이 걸리기도 한 소수자의 극한 상황보다 자신의 기분과 정신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특권층의 태도다.   


나는 tone과 policing을 따로 찾기 시작했다. tone은 어조, 말투, policing의 원뜻은 (경찰의) 치안, 감시다. 어조 감시, 말투 검열, 태도 지적 등으로 옮겨 보았지만 그 어떤 용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가 번뜩 떠올랐다. 나를 몇 날 며칠 괴롭혔으나 결국 허무함만을 안겨 주었던 트리거 워닝 말이다. 사람은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 법이기에 나는 한국어 번역어를 지우고 톤 폴리싱으로 가기로 했다.


두고 보시라. 지금 국내 사이트에 폴리싱을 치면 타일 폴리싱밖에 안 나오지만 몇 년 안에 ‘톤 폴리싱’은 인터넷 상용어가 될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성차별, 인종 차별, 인권 운동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성차별을 강하게 주장할 때 ‘진정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이 용어가 적용될 상황이 많다.


물론 까다로운 용어 문제가 일단락된다 해도 번역가는 안심할 수 없다.


트리거 워닝이 나왔던  『나쁜 페미니스트』  의 그 챕터 마지막 문장에도 트리거가 포함되어 있다. 그때도 트리거는 흔하게 쓰는 단어였지만 나는 문장에 들어 있지도 않는 총이란 단어까지 넣은 후 방아쇠라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번역했다.


같은 단어나 숙어를 만나도 맥락에 따라 매번 다른 표현과 단어를 고민하는 번역가의 고충을 조금만 알아주시면 좋겠다. 원서를 보고 또 보고, 인터넷을 찾고 또 찾고, 모니터에 단어를 썼다 지웠다 하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원고료도 편집자도 마감도 없고 오직 최종 판단자인 독자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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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지양(번역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나쁜 페미니스트》, 《위험한 공주들》, 《마음에게 말 걸기》, 《스틸 미싱》, 《베를린을 그리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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