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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근 “포크는 제게 자신감 있는 음악”

‘정통’ 포크로 달려온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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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의 정서의 1차는 창작자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거예요. 외적인 흥을 줄 수 있는 무대 퍼포먼스는 부차적인 거죠. (2019. 09. 27)

포크송 가수, 통기타와 하모니카라는 어쿠스틱 음악이 전하는 향기와 힘에 대한 기억을 저버리지 않는 가수. 결코 대중적 이름이 아닌 가수 박창근은 저 1980-90년대를 감쌌던, 지금의 인디 일각에서 실험되는 얼터너티브 포크와는 다른, 이른바 '정통'포크를 고수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포크를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음악정체성의 으뜸으로 창작자의 메시지를 꼽았다. 처녀작을 1999년에 냈으니 어느덧 그것을 염두에 둔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또한 박창근은 고 김광석을 추억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을 현재의 존재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김광석이었다고 한다. 수년전 그의 음악으로 엮은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주연을 맡아 노래는 물론 연기한 바도 있다. “솔직히 그분의 페르소나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그럼에도 그렇게 봐주신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는 포크로 내달려온 20년을 '안하면 안 되는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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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현실과 관련해서 박창근씨 음악의 장르규정을 피할 수 없을 거 같다. 이른바 포크음악이라는 어휘는 현실적으로 유리된 음악이 아닌가. 지금 세대는 포크를 듣지 않는다. 1999년에 1집을 냈으니 20년간 지속적으로 활동했지만 포크음악의 현실은 20년 동안 더 열악해졌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사실 활동을 해보면 보통 아웃사이더와 메이저로 나누어지잖아요. 포크음악을 하는 분들을 대표해서 제가 얘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저런 행사나 초청공연을 하러 갈 때 보면 저 같은 음악으로 무대에 오르는 가수는 극히 드문 것 같더라고요. 자기가 추구하는 노래가 포크지만 막상 다른 장르로 알려졌다는 분도 계시고... 힘든 상황이죠.

 

실제로 관객이 적은가.

 

뮤지컬 이외에 규모를 크게 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합동공연이나 행사 때는 1~2천 명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관객들을 만날 때는 100석 이하 소극장 공연이죠. 포크음악을 향한 대중적 반응이 따뜻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이 음악을 불평 없이 해 오고 있는 이유는.

 

솔직히 회의도 들긴 해요. 특히 선배들 만나다 보면 생존을 위해 다른 장르를 취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얘기하죠. 그렇지만 제가 감동을 느꼈고, 또 다른 이도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자신감 있는 음악'이 포크였고 그게 제 옷이라는 생각을 대학교 때부터 했죠. 그 마음이 아직도 변하지 않았어요.

 

박창근씨가 이해하고 정의하는 포크음악은? 하모니카,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목소리 이 세 가지로 이뤄진 음악?

 

잘은 모르지만, 편곡이란 숙제도 있긴 하지만, 근원적으로 들어갔을 때는 포크의 정서의 1차는 창작자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거예요. 외적인 흥을 줄 수 있는 무대 퍼포먼스는 부차적인 거죠.

 

가사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최우선적이라고 한다면 방탄소년단의 '봄날', '피 땀 눈물'도 강렬한 메시지를 갖고 있고 그 메시지 이상으로 막강 댄스 퍼포먼스와 비주얼이 동반된다. 포크는 동반되는 것 없이 거의 메시지만으로 승부를 건다는 게 맞지 않을까.

 

적절한 표현이네요. 그리고 시대적 발전 이전에 포크 음악 자체, 본래적 의미는 그게 맞지 않나 싶어요.

 

포크 음악이 맞는 옷이긴 하지만 그래도 음악을 하면서 언제든 고통스러운 순간은 있을 것 같다.

 

콘서트를 하고 싶지만 했을 때 '얼마나 손실이 날까?' 이런 걱정을 할 때죠. 팬 층을 확보한 기획사 소속의 다른 유명한 가수들은 콘서트로 수입이 된다고 알고 있어요. 근데 제 경우 콘서트는 제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콘서트가 수익 창출로 연결될 수는 없는 거죠. 사실 200석도 소규모잖아요. 거기를 다 채워도 대관료, 세션 비용 등이 계산이 안 되니까요. 그런 것들로 인해 더 옛날 포크 가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거 같아요.

 

그 때문에 옛날 포크 가수 이미지가 고정될 수밖에 없다는 건가.

 

혼자 기타치고 하모니카 연주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20년을 버티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정말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혼자 앞가림은 할 정도죠. 진짜 감사하게도. (20년을 축하한다고 하자) 20년…아…네…미친 거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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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창근이란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게 아니어도 이 분야에선 나름 지분이 있다. 그래서 통기타 하모니카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 가운데 사정이 좋은 것 아닌가.

 

저는 많이 부끄럽지만 음악 하는 선배님들, 평론가 선생님들, 기획하시는 분들께 그래도 좀 열심히 한다는 인상을 드린 것 같아요. 다른 거 없이 '공연해주세요' 하고 연락 받을 수 있다는 게 저의 유일한 무기 같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피드백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부분이 좀 안타깝죠. 만날 기회가 잘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낸 앨범들이 어떻게 되나. 4집인가 <바람의 기억>은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데..

 

공식적인 정규 앨범은 바로 그 4집까지 나왔어요. 1집 만들고 나서는 '가객'이라는 밴드를 1~2년 정도 했어요. 노찾사, 신촌블루스 출신 연주자들이 그때 대구에 있었는데 제가 제안을 받아서 하게 된 거죠. 그 이후에는 2집과 3집을 냈고요. 그런지(Grunge) 장르도 좋아해서 중간에 <None Grunge>라는 음반도 냈어요. 그 앨범을 내고 4집 <바람의 기억>이 나온 거죠. 그러고 나서 박강수라는 여성 포크가수랑 <듀엣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듀엣 음반 이후로는 디지털 음원으로만 인사드리고 있고, 지금은 앞서 낸 노래들을 좀 다듬어서 내려고 계획 중입니다.

 

20년이란 긴 세월을 견디게 한 힘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안 하면 안 되는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저는 개인적인 시간을 음악적 구상을 하고, 연주하고, 고민하면서 보내요. 음반으로 발표하지 못한 200~300곡들이 있어요. 이게 제 취미가 된 거죠.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되어버린 것 같다고 할까요. 그리고 다른 거는 할 줄 모르겠고... 사회가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사람들하고 어떤 이익에 의해 만나게 되는 그런 것들이 제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요.

 

또 김광석과 분리되기 어려운 이름이 된 게 사실이다. 포크음악을 한다는 공유지점 때문이겠지만, 왜 김광석과 이름이 붙게 됐다고 보는가.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때문인 거 같아요. 의욕이 넘쳤던 무명작가 겸 제작자가 뮤지컬을 시작하기 5년 전, 그러니까 2007년에 영화를 하자고 제안을 해왔어요. 그때는 고사했죠. 무모한 거 같기도 하고, 저를 찾아온다는 것도 말이 안 됐고요.

 

1999년이 첫 앨범이었으니 2007년이면 2집 앨범이 나온 때가 아닌가.

 

네, 그때가 2집 음반 나올 때였어요. 2집이 생명과 환경을 다룬 음반이라 그런지 평론가 추천 음반상을 받았죠. 타이틀은 따로 없었지만 모던 포크 계열로 주목 받았던 곡이 '이런 생각 한번 어때요?'라는 노래였어요. 도살되는 가축들을 무심하게 학대하는 것이 우리가 평화를 주장하고 반전을 얘기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냐는 걸 한번 생각해보자는 메시지가 담긴 곡이었죠.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보니 (그분이) 다르게 느끼셨나 봐요.

 

기본적으로 김광석의 음악과 지향점도 같고 외부인이 볼 때는 출신이 대구라는 점도 같지 않나. 그런 점이 작용해서 섭외가 왔을 텐데 거절했다가 나중 승낙하게 된 이유가 뭔가.

 

제작자가 굉장히 집요했어요. 계속 연락도 하고, 공연 때 찾아오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찾아온 게 2011년 말이었는데요. 그때 제가 대구 최초로 15일 장기 소극장 콘서트를 혼자 했어요. '아트팩토리 청춘'이라는 곳에서 했죠. 그때 '매일' 무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그때 여러 상황에 의해 영화에서 뮤지컬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영화는 제 외모나 뭐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뮤지컬이라면 노래만 잘하면 되겠다' 싶어서 하게 됐죠.

 

김광석을 무대에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 제작자도 집요했다.

 

너무 부끄럽네요. 제작자가 고집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김광석에 푹 빠져있는 친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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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딱 김광석 이미지 아니었나. 객석과 유기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그때 보고 박창근이 뜨겠구나 싶었는데 뮤지컬은 몇 년 정도 한 건가.

 

원년멤버이기도 했고 햇수로는 5년 했습니다. 보통 월요일 빼고 매일 하다가 더블 캐스팅 없이 원 캐스팅으로 할 때는 월요일이랑 목요일 빼고 했어요.

 

언론이 그 뮤지컬에 주목하지 않았나. 인터뷰도 많았던 것 같고. 막상 벌이는 괜찮았나.

 

뮤지컬에 집중해야 해서 오히려 제 단독공연을 할 수 없었죠. KBS에서 <세상을 잇는 담쟁이>라는 프로그램 하나 하고. 벌이는 별로였어요.

 

대학생 때 포크음악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그전에는 인연이 없었나.

 

이전에는 산울림, 이선희 노래를 들었죠. 그때는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불러다 노래시키고, 소풍 때 노래하는 그 정도였어요.

 

포크와 연을 맺게 된 결정적 계기가 뭐였나.

 

대학교에 아무것도 모르고 딱 갔더니 운동권 단체가 있었어요. 그 당시 서로 싸우고 이념 투쟁하고 그랬죠. 거기서 후배가 들어오면 장기가 뭐냐고 물어보고 시켰어요. 제가 노래를 하니까 노래패로 시작하게 됐죠. 그러면서 노래패 출신들을 알게 됐고 김광석 노래를 알게 됐어요. 그때 정태춘 선배님 공연에도 빠지게 됐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그럼 주로 불렀던 노래가 무엇이었나.

 

노찾사, 정태춘 선배님 노래를 너무 좋아했어요. '아, 대한민국...' 이 노래는 교수님들도 제게 불러보라 하실 정도였죠.

 

김광석과 연결이 된 건 어디가 시작이었나.

 

우연히 김광석 콘서트 포스터를 보게 됐어요. 동물원의 감성과 노찾사를 더한 인물이 김광석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문구가 멋있었죠.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찬사를 하는 건가 싶었죠. 공연을 본 건 1992년쯤이었는데 무대에서 느낌이 달랐어요. 너무 커 보였어요. 그때 하모니카, 통기타가 멋지다는 걸 알았어요.

 

김광석과 개인적인 교류는 없었나.

 

그저 꿈만 꿨죠. 공연만 다니다 군대에 갔어요. 군대 가서 그분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죠. 군대에 가서도 노래를 했기 때문에 선임이 알고 달려와서 저에게 전해줬어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박창근씨는 미성이지만 발성이 좋아 강력한 미성이라고 생각한다. 김광석과 비교했을 때 장단점을 따진다면.

 

닐 영(Neil Young)이 떠올랐는데, 닐 영이 고독한 늑대잖아요. 김광석이 늑대라면 저는 여우가 아닐까. (웃음) 어떤 분들은 김광석 테이프를 빨리 돌린 것 같다고도 해요. 사실 저는 터프한 걸 좋아했었죠. 미성 얘기를 하셨는데 여성적이라는 느낌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어요.

 

김광석 노래 중에서 본인에게 잘 맞았던 곡이 뭔가.

 

'내가 필요한 거야'라는 노래가 저에게 잘 붙었어요. (김광석도) 생전엔 부르고 다니지 않은 것으로 알아요. 그게 사후에 만든 음반에 수록된 곡이죠. 듣기로는 녹음을 해놓고 발표를 못했다 하더라고요. 그 노래가 좋아서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할 때 넣었죠.

 

알려진 노래 중에서는.

 

거의 다 좋긴 하지만 '기다려줘'도 있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노래도 김광석다운 곡이라 좋았어요. '너 하나뿐임을' 이 곡도 그렇고요. 대부분 다 불러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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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노래가 갖는 매력을 표현한다면.

 

호흡이 달라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노래할 때는 사투리가 덜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김광석의 노래를) 한마디 한마디씩 소리 나는 대로 적었어요. 사투리를 없애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죠.

 

김광석은 김광석만의 독특한 호흡이 있다.

 

그렇죠. 그래서인지 다른 가수들이 부르면 감동이 덜 오더라고요.

 

작년 12월 단독 콘서트에 김광석의 친형을 초청했다고.

 

뮤지컬 때도 인사드렸지만 그 후로도 공연할 때 잠시 보고 가시기도 했죠. 그렇게 길게 광복이 형님과 함께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1월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달이다. 그와 친분도 없는데 사후에 음악적으로 김광석의 삶을 이어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에게 빚지는 삶을 사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사실 그분의 페르소나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그럼에도 그렇게 봐주신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결론하면 음악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감사한 선배님이죠. 너무 좋은 선배. 그래서 광복이 형님도 뵙고 싶었던 거고요.

 

커리어 20년을 맞은 2019년 활동 방향은 어떻게 잡고 있나.

 

우선은 제가 느낀 봄의 정서를 곡으로 써서 발표하려고 합니다. 감성적인, 좀 깊은(deep) 노래가 될 것 같아요. 발표는 3월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즘의 공식 질문이다. 내 인생의 음반은 무엇인가.

 

1장은 딱 나와요. 닐 영의 <Harvest>이고... (고민을 한 후) 닐 영의 다른 음반 중에서는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 그리고 2002년에 발표한 <Are You Passionate?>가 있어요. 국내 음반 중에서는 '비둘기에게', '매', '떠나가지마 비둘기' 등이 수록된 시인과 촌장의 <푸른 돛>이랑 김창완의 <기타가 있는 수필>입니다.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정효범

사진 : 김도헌

정리 : 정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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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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