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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이 소설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장편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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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제야랑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해봤다는 느낌이에요.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이요. (201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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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4일 월요일. 일기에 ‘끔찍한’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고 적었다. ‘그날’의 제야는 당숙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들이 시작됐다. 소설은 일기의 형식을 빌려 제야의 내면을 보여주고, 삼인칭 시점으로 아이에게 쏟아지는 ‘가해의 말들’을 조명한다. 지극히 평범한 유년을 지나던 소녀가, 찢어내고 싶은 순간을 맞닥뜨리고 자신이 찢기는 경험을 하면서, 그럼에도 이어지는 삶 앞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소설가 최진영은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그런 일을 겪으신 분들이 있는데, 그걸 쓰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제야가 ‘그날’을 뒤로 하고 다시 설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들을 향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일어나는 분들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최진영 소설가는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끝나지 않는 노래』 ,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 『해가 지는 곳으로』  와 소설집 『팽이』  를 썼다.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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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가득한 글을 쓴다는 것

 

<문학3>에 연재할 때와 달리 소설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고 들었어요.


거의 새로 썼어요. 2017년에 연재를 했는데요. 그때는 300매 분량이었고, 웹에 연재하는 형식이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원고를 넘겨야 했어요. 연재를 끝내고 나니까 다시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이제야’라는 인물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야라는 인물과 친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작업을 했던 것 같아서, 책으로 낼 때는 완전히 새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의 말에 “2017년에 나는 제야를 잘 알지 못했다”고 쓰셨죠.


네. 뭔가 더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연재 당시에는 사건 이후의 제야의 심정이 많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사건 이전도 많이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제야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건 전의 제야의 모습을 많이 쓰게 됐죠. 그리고 연재할 때는 편지글의 형식이어서, 아무래도 이야기를 하는 데 조금 한계를 느꼈어요. 개작할 때는 제야의 목소리를 최대한 많이 들려주기 위해서 일기 형식을 가져오게 됐죠.

 

사건 자체도 끔찍한데, 그 이야기를 당사자의 목소리로 전하는 일은 더 힘들겠죠. 제야에게 몰입하는 동안 우울하셨을 것 같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 같아요.


쓰면서 힘들었겠다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게 힘든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일을 겪은 분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겪으신 분들이 있는데, 그걸 쓰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제야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쓸 때는 오히려 통쾌한 면들이 있었어요. 이런 걸 문장으로 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통쾌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두세 달 정도 개작을 하면서, 그 시간은 하루 종일 성범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조금 피폐해진 건 있었어요.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많았죠. 그런데 써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의미’에 대해 질문했다고 하셨는데, 나름의 답을 내리셨나요?


네. 그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생겨나는데, 그게 고통스럽다고 해서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 않더라도 써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죠. 단지 고통만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혹은 바람도 있었어요. 물론 고통이 있지만 공감과 이해와 위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했죠.

 

제야의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드러낼 것인지, 많이 고민하셨겠어요.


되게 조심스러웠는데요. 이 책을 쓰기 전에 록산 게이의  『헝거』  를 읽었어요. 록산 게이도 성범죄 피해자, 생존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 건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조금 중심이 잡혔어요. ‘제야의 고통을 쓰는 것에 대해서 겁내는 대신 조금 더 진솔하게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진심을 느끼지 않을까’, ‘내가 충분히 제야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야 했죠. 성범죄 피해자가 지독한 자기혐오과 자기 파괴적인 것에 시달린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쓰기를 주저한 부분이 있었어요. ‘내가 쓰는 것이 2차 가해가 되거나 사람들의 상처를 더 헤집어 놓는 거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있었는데요.  『헝거』  를 읽고 성범죄를 당한 사람이 자기혐오나 자기 파괴적인 것을 느끼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라는 게 마음으로 이해가 됐어요.

 

“인물이 내게 먼저 다가올 때가 있다”고 하셨는데, 제야도 그랬나요?


네, 뭔가 써야만 한다는 당위로 다가왔어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 중에 하나가 아니고 ‘이제는 쓸 때가 됐잖아?’라고 말을 거는 느낌으로 다가온 거죠.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성범죄 뉴스들을 보면서 ‘오늘도 이런 기사가 있네’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너무 끔찍했어요.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잖아요. 그것에 반발하는 남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이것이 남자들이 화를 낼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더 늦기 전에 써야겠다’ 싶었어요.

 

다행히 제야의 곁에는 기다려주고 보듬어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없었다면 제야가 소설과는 다른 모습이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북 토크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작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야 내면에 강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하셨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피해자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인생은 끝났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 피해자도 자기 자신을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자살을 하든가 미치든가 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것도 어느 순간 분하더라고요. 그렇게 틀을 지어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일어나는 분들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가해의 언어들을 쓰면서 ‘그것도 내 안의 어딘가에 있다가 나온 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놀라고 반성하셨다고요.


저도... 싫더라고요, 제가.

 

우리가 가해의 언어들을 학습했듯, 피해자들도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피해자다움’에 길들여질 것 같아요.


내면화되는 게 많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말의 의미를 진심으로 알고 하는 말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지속적으로 들어오던 말이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관습적으로 하는 말이 많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런 말 자체가 가해자 편을 들고 가해자를 정당화시키는 말이라는 걸 모르고 하니까 갑갑했죠. ‘왜 가해자 입장을 옹호하지?’라는 의문을 안 가질 수가 없죠. 그런 게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견딜 수 없는 순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 예민한 사람이 되죠. ‘그냥 말한 건데 뭘 그렇게까지 따지냐,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하고요. 어느 순간 저도 예민한 사람이라는 굴레가 씌워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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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우뚝 선 이제야를 생각했어요


“단어들은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끔찍한’이란 글자를 백배 천배 부풀리고 진하게 두껍게, 종이가 찢어질 만큼 칠해도 그때의 감정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어요. 작가님도 집필 내내 ‘단어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글자는 정말 얄팍해요. 그래서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도 계속 사전을 찾아보면서 써요.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막 묘사를 하기에도 내키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붙잡는 건 사람들의 공감력과 경험과 상상력이에요. 그걸 믿자고 생각해요. ‘내가 모든 걸 다 이야기하려고 하지 말자, 내가 이 단어를 썼어도 읽는 사람은 더 깊은 곳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야는 강한 아이라고 생각돼요. 그래서 기특하다가도 ‘너 참 강한 아이구나, 대견해’라고 생각하는 게 미안해져요.


저도 그렇지만 제야한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아요. 제야한테 건네는 말이 모두 상처가 될 것 같은 거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너 참 강한 아이구나’라는 말도, 제야는 무너지면 안 될 것 같고 더 강해져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스스로의 고통을 더 눌러야 될 것 같고요.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라’라는 말도 너무 고통일 것 같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떳떳하지 못한 사람인가?’라고 다시 질문하게 될 거잖아요. 그 어떤 말도 힘들더라고요. 저도 그런 지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일인칭으로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함으로써 더 큰 공감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세요?


네, 제가 제야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으니까요. 소설에서 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되는 지점들도 있고 전부 다 일인칭으로 쓰지는 않았는데요. ‘이건 제야가 말하지 못할 것 같은데’ 혹은 ‘이건 일기에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하고 느껴지는 부분들은 삼인칭으로 쓰기도 했어요. 앞부분에 제야, 제니, 승호가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는 부분은 삼인칭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썼고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야는 내면에 강함이 있는 아이예요. 홀로 설 수 있는 아이죠. 그런데도 제니, 승호, 강릉 이모 같은 인물들을 곁에 놔주셨어요. 이유가 뭔가요?


그런 고민도 있었어요. 이런 사건일수록 혼자 외롭고 괴롭고 아픈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텐데, 내가 쓰는 이야기라고 해서 그 사람을 위로하는 주변 인물들을 그려도 되는 걸까. 그러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더 쓸쓸해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굉장히 컸어요. 그럼에도 썼던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제니와 승호와 이모의 인간됨을 보고 ‘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배우는 심정으로 썼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고 썼어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강릉 이모가 대단한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제야와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너무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야 자체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그냥 나온다고 생각해요. 제야에게 있었던 일을 부정하지도 않고 ‘별 일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지도 않고 ‘괜찮아’라고 말하지도 않고 ‘네가 그런 큰일을 겪었구나’ 하면서 대하지도 않고요. 그냥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이죠. 내가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고요. 제야한테 뭔가를 하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가 미안하고, 내가 마음이 아프다’라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모인 거죠.

 

그런 이모의 모습은 제야 엄마가 보인 반응과는 많이 다른데, 어쩌면 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이모는 단절되었던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야도 조금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요. 엄마나 제니를 보면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나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은 거죠. 내 고통과 불행만으로 너무 힘든데, 엄마와 제니를 보면 나만 괜찮아지면 괜찮을 것 같고, 그런데 나는 괜찮아지지 못하고 이 모습이고... 너무 복잡할 것 같아요.

 

‘그날’의 일은 제니와 승후에게도 영향을 미쳤어요. 삶의 일부가 망가졌다고 할까요.


망가졌죠. 그렇지만 가해자는 잘 살고 있죠. 소설에도 나오듯 법적 처벌도 물론 중요해요. 그렇지만 제야가 진짜 원하는 건 그 사람이 자기 죄를 제대로 아는 것, 인정하는 것, 내가 나를 혐오하는 것만큼 그 사람이 스스로를 혐오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죠.

 

결말에 대한 고민이 정말 크셨을 것 같아요. 제야에게 마냥 힘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아이한테 비극적인 결말을 주고 싶지도 않으셨을 테죠.


연재를 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요. 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오직 이제야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소설은 이제야 혼자 우뚝 서 있는 장면을 계속 생각하면서 썼거든요. 절대 비극적인 결말은 생각하지 않았고요. 이제야의 삶을 통째로 보여줄 수는 없지만, 제야가 어떻게 일어서는지 거기까지는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이후의 삶은 독자 분들이 만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했고, 제야가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도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야가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가요?


많이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서 경찰이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진짜 그런 일을 겪은 애들은 골방에 처박혀서 미치지, 너처럼 그렇게는 못 한다고요. 그런데 제야는 방에 갇혀있지 않을 뿐이지, 이 사회라는 곳에 갇혀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골방에 갇힌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야는 이미 많은 타인의 시선과 자기혐오와 편견과 고정관념에 갇혀 있기 때문에 더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넘어서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느끼면서 조금 더 경험하는 장면들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마지막에 제니한테 쓴 편지를 보면 ‘나는 이제 누구하고 있든 어디에 있든 늘 무서울 거야, 비로소 그걸 이해했어’라고 하잖아요. 그 지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고, 무서워하는 자기를 부정하지 말고, ‘나는 무서워하고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부분이요. 그러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무서운데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자꾸 도망가고 피하려다 보면 거기에 갇혀있을 것 같았거든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조금씩 알아가는 지점까지 쓰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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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마주친 기분이에요


처음부터 계속 ‘제야’라고 나오다가 중반부 이후에 ‘이제야’라고 나와요. 그 순간 책의 제목을 다시 떠올리게 되더군요.

 

‘이제야’라는 이름을 제일 먼저 지었어요. ‘이제서야’라는 의미도 있지만, 부모님이 제야라고 이름을 지어줬던 이유는 한 해가 넘어가는 제야의 순간에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제야는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이 아니잖아요. 제야가 넘어가면 밝아지고 새벽이 오잖아요. 어둠은 다 끝나고 이제는 점점 밝아오기만 기다리는, 그 의미도 좋았어요.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자.

 

제야 자신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이야기니까 제목을 ‘이제야 언니가’로 정했을 법도 한데요. 왜  『이제야 언니에게』  라고 지으셨어요?


편집부에서 지어준 제목이에요. 저는 이제야만 생각하면서 썼고, 그래서 파일명도 ‘이제야’라고 했어요. 초고를 넘길 때도 그랬고요. 그런데 편집부 회의에서  『이제야 언니에게』  라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저도 수긍이 됐어요. 소설 마지막에 제니가 제야에게 쓰는 편지가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되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고, 그 편지를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못 쓰겠더라고요.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제야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니가 제야에게 쓰는 편지는 독자 분들에게 맡겨두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독자 분들이 이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이나 건네고 싶은 말이 결국 제야한테 쓰는 편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독자 분들의 마음속에 드는 감정이나 질문들이다 편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을 다 읽었음에도 제야를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문득문득 제야를 떠올리면서, 조금씩 다가가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제야가 소설 속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냥 현실에 있는 것들을 가져와서 썼을 뿐이지, 인물을 만들고 플롯을 짜고 그렇게 소설을 썼다는 느낌이 아니에요. 저 혼자 쓴 소설 같지도 않고요. 저도 쓰면서 제야한테 많이 의지를 했어요. 지금도 이제야라는 인물에게 마음으로 많이 의지하는 부분이 있어요. 문득문득 ‘제야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어요.

 

소설을 쓰실 때도 그랬나요? ‘제야야, 너는 여기에서 뭘 느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무슨 생각을 했어?’ 이렇게 물으셨나요?


계속 마음으로 말을 거는 거죠. 이게 되게 조심스러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2차 가해가 되고 피해자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순간마다 이제야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괜찮겠지?’라고 계속 말을 걸고 의지를 많이 했어요.

 

이제는 제야를 많이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세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눈을 마주친 기분이에요. 잘 알지는 못하죠. 저는 저 자신도 잘 모르는데요. 그런데 그냥, 한 번은 제야랑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해봤다는 느낌이에요.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이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 소설이 불편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많이들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 번쯤은 제야에 대해서, 제야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책이라는 것은 영화나 음악이나 미술과 달라서 의지를 가지고 읽어야 되잖아요. 자기 시간과 의지를 가지고 읽는 작업이기 때문에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읽으신다는 것은, 제야에게 마음을 주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제야와 마음을 나누고자 애를 쓰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애를 쓰시면 좋겠어요.


 

 

이제야 언니에게최진영 저 | 창비
삶을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 여성이자 피해생존자의 언어를 생생하게 옮겨오는 동안, 그 고통들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했을 최진영의 끈기는 작가와 문학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용기 있는 질문이자 위로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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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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