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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94화 : 이진오의 농성해지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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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그가 굴뚝에 올라간 지 일 년이 넘을 때까지 쓰다달다 반응이 없던 회사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2020.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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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진오는 꿈결에 어깨가 각이 지고 넓은데다 키 큰 여자와, 그에 대조적으로 어깨가 좁게 흘러내리며 가냘프고 아담한 작은 키의 여자가 나란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다.

 

 “어, 누구세요?”

 

중얼거리며 그는 고개를 쳐들었는데 작은 여자가 손을 뻗치더니 그의 가슴을 지긋이 눌러주었다.

 

 “어서 더 자려무나. 해 뜨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녀는 신금이 할머니였다.

 

 “이제 좋은 소식이 있을 게다.”

 

신금이 할머니의 모습과 목소리는 생전과 같았고 옷차림도 시장에 나가 앉았을 때 늘 입던 흰 셔츠에 편의바지 차림이었다. 옆의 할머니는 아마 그가 주위에서 늘 들어오던 주안댁 증조할머니였을 것이다. 그녀는 고름 없는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었다. 주안댁 큰할머니는 머리가 새하얗게 세고 온몸이 쪼그라든 며느리 신금이보다 훨씬 젊은 검은 머리의 건장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진오를 향하여 웃더니 돌아서서 허공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할머니 같이 가요!”

 

이진오는 부르짖으며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사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침낭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퍼를 내리고 잠시 텐트 자락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었다. 초여름 밤의 기분 좋은 냉기가 어깨에 느껴졌다.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은 진오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때 일흔 여덟 살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했던 셈이었다. 진오는 그이의 임종을 지키진 못했지만 나중에 할머니에게 들었다. 숨이 가빠지더니 며느리에게 미안하다고 그랬고 한쇠야, 한쇠야, 두 번이나 장남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고는 숨이 멎었다고 한다. 이진오는 아버지 이지산이 할아버지 이일철을 따라 이북에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리 한쪽을 잃고 돌아온 뒤에 증조할아버지 이백만과 짝이 되어 공방을 지키며 살아왔던 세월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작업 중에 두런거리며 나누던 옛날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 이일철과 작은 할아버지 이이철의 행적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할머니에게는 끝내 귀하고 여린 아들이었던 아버지 이지산은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등과 어깨를 안마해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었다. 지산이 신금이에게 몇 번이나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대전역은 미군 폭격기의 수차례에 걸친 대공습으로 파괴되었고 동북쪽 외곽에 임시 선로가 은폐되어 있었다. 낮에는 나뭇가지와 풀 더미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선로는 운행되었다. 대전 옥천 구간이 일차 구간이었고 옥천에서 영동 추풍령 터널까지가 이차 구간이었다. 군수물자의 수송로는 생명선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도중에 끊긴 철로나 다리는 지역 농민들과 인민군 공병들에 의하여 밤새워 복구되고는 했다. 날이 밝으면 열차는 몇 겹의 위장망과 풀과 나무로 가려진 채 언덕 사이와 굽잇길에 서있었다. 주간에 전선으로 가는 물자와 증원 병력은 철로변의 행군로와 인근 야산의 산줄기를 타고 노무대의 지겟짐이 되어 도보로 지나갔다. 도중에 끊긴 길목에서 옮겨온 물자들은 수레와 지게 또는 목도를 이용해서 풀숲으로 가려놓은 화물차량에 실었다. 지산이는 철로변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바위에 자리를 잡고 오후 내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간밤에 꼴딱 새우고 기관차를 몰아 영동까지 수십 차례 왕래하며 화물을 날랐던 것이다. 군가소리에 잠이 깨어 내려다보니 새 군복을 입고 군모와 배낭에 풀을 꽂은 의용군 일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 거의가 남한에서 입대한 젊은이들이었고 신병들이었다. 잠이 깨어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무심하게 행렬을 지켜보던 지산은 갑자기 일어나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선옥이 이모!”

 

박선옥은 아직도 무명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 군복을 입고 있었고 작은 별 셋이 달린 상위계급 견장을 어깨에 달고 있었다. 선옥이 땀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지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오오 지산이구나!”

 

왼쪽 가슴에 붙인 휘장으로 그녀가 정치군관인 것을 지산이는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길가의 나무그늘에 앉아서 서로가 알고 있는 소식을 주고받았다. 지산은 평양의 아버지 얘기를 박선옥은 영등포와 신금이 이야기를 전했다. 그녀는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 중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에 관하여 얘기했다. 그녀가 조영춘의 소식을 말할 때에는 갑자기 눈이 충혈 되면서 눈물이 흘러내려 두 뺨이 흠뻑 젖었다. 지산이도 철도관사나 샛말 집에 찾아오던 양평동 삼촌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영춘은 옥사한 작은아버지 때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늘 측근이었던 활동가였고 피가 끓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 김삼룡 등과 함께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총살당했다. 지산이는 평양에서 우연히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영등포 전평지회장 안대길에 대하여 말했다. 그는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인민군 선봉부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개성과 서울의 형무소를 전격 점령하는 통에 살아남았던 수많은 좌익 활동가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단발머리에 검게 그을린 얼굴의 박선옥은 지산이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말했다.

 

 “우리 꼭 승리해서 영등포에 돌아가자.”

 

 “그래요, 몸조심하세요.”

 

선옥은 걸어가다가 돌아보더니 귓가에 꼽고 있던 머리핀을 하나 뽑아서 지산이에게 내밀었다. 

 

 “금이 언니 만나면……이거 전해 주렴.”

 

지산은 자잘한 꽃무늬 두 개가 새겨진 그 꽃핀을 작업복 윗주머니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포로가 된 뒤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전선이 붕괴되고 갑작스런 철수가 시작되던 무렵까지 수송대는 영동 추풍령 계선에서 보급 작전 중이었는데, 나중에는 터널을 통과하여 계곡의 초입에까지 이르는 짧은 구간만을 오락가락했다. 어느 날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와 좁은 계곡이 끝나는 곳으로 나아갔을 때 전투기 편대가 날아와 대지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기관차의 전방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정차 손잡이를 당겼다. 쇠바퀴가 철로에 쓸리는 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져 갔고 바로 기관차 정면에서 폭음과 함께 거대한 검은 연기가 눈앞을 덮쳤다. 기관차는 위로 솟았다가 궤도를 이탈하면서 옆으로 넘어졌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튿날이었고 미군의 야전치료소 천막 안이었다. 그때까지 오른쪽 다리는 붕대에 감긴 채로 그의 몸에 붙어 있었다. 그가 후방으로 옮겨가기 전에 치료가 늦었던 다리는 가차 없이 잘려 나갔다. 그는 오랫동안 사라진 다리의 엄지발가락을 긁으려고 손을 뻗치곤 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이지산은 환자로 분류되어 모든 작업을 면제받고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수용되었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자 수용소 당국은 포로들에 대한 분류 심사를 실시했다. 미군 장교 옆에 앉은 한국군 심사관이 지산에게 물었다.

 

 “당신은 서울 영등포가 주소지로 되어있다. 석방된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지산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집으로 가야죠.”

 

지산이 영등포 샛말로 돌아와 두어 달 지나서 사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박헌영과 남로당 간부들이 체포 되었다는 평양 방송의 발표를 한국의 방송과 신문에서 크게 보도했다. 이튿날인가, 이백만이 지산에게 막걸리 한 되를 받아오라고 했고 김치와 두부를 놓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이백만은 아무 말 없이 막걸리만 마셨다. 됫병들이 술병이 다 비워갈 즈음에 이백만은 그저 한 마디 했다.

 

 “한쇠는 잘 있는지…….”    

 

그가 큰할아버지라고 불렀던 이백만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버지 이지산도 비록 불구의 몸이었지만 혼자 공방을 지키며 살았다. 전통 가내수공업인 금속공예 자체가 차츰 쇠퇴하면서 아버지 이지산은 엄마 윤복례와 함께 시장 옷가게를 지키러 나갔고 할머니 신금이는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 이지산은 목발을 짚고 다니는 불편한 몸으로 환갑이 지나 칠십 가까이까지 살았는데 신금이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훨씬 더 살고 아흔 살이 되어서야 돌아가셨다. 그러니 진오가 그녀와 작별한 것은 불과 오년 전의 일이다. 이런 모든 일이 그들 가족이 살아가던 같은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다니, 깊은 계곡을 빠르게 굽이쳐 흘러가는 성난 물결의 소용돌이 같은 세월이었다.

 

지난주에 이진오의 굴뚝 농성 사백일 기념 문화제가 발전소 담장 바깥 공터에서 열렸고, 사흘 전 그가 굴뚝에 올라간 지 일 년이 넘을 때까지 쓰다달다 반응이 없던 회사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서로 간에 요구 조건과 협의 사항은 수년 동안 이끌어온 노사쟁의 과정에서 수십 번 되풀이되어 왔으므로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집권당 측에서는 그 해가 8.15 광복 칠십 주년이 되는 해인데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 해결을 요구해 온 노동자 장기농성 문제를 더욱 시끄러워지기 전인 7월에 정리하기를 원했던 듯했다. 회사 측에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협상해 보자고 나올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저쪽은 회장과 전무가 나오고 이쪽에서는 금속노조 사무처의 교섭위원장과 해고자 대표를 맡은 김철수 노동자가 나가기로 했다. 회사 측은 자회사를 신설해서 고용을 승계하고 노조활동을 보장하겠다고 순순히 나왔고 단체협약은 내년 1월까지 타결하겠다고 했다. 더 이상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쟁의를 벌이지 않고 농성자가 굴뚝에서 내려온다면 그동안 고소해 놓았던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협의서를 작성하고 타결 내용을 보도진에게 알렸다. 이진오의 회사 동료이며 함께 노동조합 일을 해왔던 같은 나이의 김철수 형은 먼저 휴대폰으로 그에게 타결 소식을 알려왔다.

 

굴뚝에 올라간 지 410일 째가 되는 날 이진오의 농성해지를 경찰에 통보했다. 노조 측은 그의 환영대회를 굴뚝 아래에서 열겠다고 했으며, 경찰 측은 농성자는 그동안 치안을 어지럽히고 업무를 방해 하였으므로 먼저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며 행사는 담장 바깥 공터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농성을 풀지 않을 것이며 이제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항거하겠다고 받아쳤다. 어제 하루 종일 보도진들과의 전화 인터뷰가 차례로 진행 되었다. 노조는 1년 45일 동안 삶의 악조건을 견디며 세계최장의 고공농성을 해온 해고 노동자를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속하여 유치장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은, 온 세상에 우리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를 드러내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여튼 이러한 상태에서 날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난간에 걸었던 밧줄들을 풀어 위에 덮었던 천막을 걷고 아래 쳐둔 캠핑텐트까지 걷어냈다. 침구는 차례로 개어서 줄에 묶었다. 그동안 살림이 늘어나서 별의별 것들이 많았다. 학생들이 책상 위에 얹어 쓰는 이층짜리 책장이 두 개나 되었고 거기에 칸마다 책이 꽂혀 있었다. 페트병을 잘라내고 심었던 화초며 상추 등속의 화분이 열 개 가까이 되었으며 공구도 칼 몽키 망치 펜치 드라이버 등속에다 옷가지도 계절이 바뀌었지만 미쳐 내려주지 못한 지난 철의 방한복들이며 짐을 꾸리다보니 그야말로 하숙을 옮기는 이삿짐처럼 보였다. 그는 수시로 말을 걸었던 빈 페트병이 나란히 난간에 붙들어 매어져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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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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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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