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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미의 관심사> 모녀가 이태원에서 만났을 때

다양성의 공간에서 확인한 모녀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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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욕을, 블루가 노래를 하는 건 속내를 직접 표현하지 못해 분노를 가장한 애정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2020.05.21)

영화 <초미의 관심사>의 한 장면


(* 제목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조민수)가 뿔났다. 둘째 딸이 엄마 돈 3백만 원을 가지고 튀어서다. 내 이년을 가만두지 않겠다! 첫째 딸 순덕(김은영)이라면 동생의 행방을 알 거로 생각해 이태원으로 향한다. 재즈 가수로 활동하는 순덕은 엄마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 일단, 순덕이라고 불리는 게 싫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순덕이라고 지을 게 뭐람. ‘블루’라고 불러줘, 부탁해도 엄마에게 돌아오는 답변이란, 블루 좋아하고 자빠졌네! 엄마가 입이 헐다. 


엄마와 순덕, 아니 블루 사이의 관계도 험악(?)하다. 블루는 엄마가 아빠와 헤어진 뒤 남자를 갈아치우는 꼴이 보기 싫어 일찍이 독립했다. 엄마는 곧 죽어도 가출이라는데 블루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두 번째 이유다. 가출했으면 집 나간 자식을 찾기라도 했어야지, 이후 엄마와 만난 게 손에 꼽을 정도다. 말이 좋아 모녀 관계이지 블루에게는 엄마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신경 안 쓴다. 동생을 찾겠다고 동행한 건, 아니 이년이 언니 돈까지 들고 튀었다!


가까이하기에 너무 멀어 보이는 모녀의 ‘관심사’는 오직 돈인 듯하다. 돈만 찾으면 엄마는 자기가 살던 집으로, 블루는 예정된 녹음과 공연을 하러 뿔뿔이 흩어질 생각이다. 서로의 안위는 관심 밖이다. 그래서 바라는 게 없다. 엄마는 엄마대로, 딸은 딸대로 알아서 살면 그만이다. 보통 모녀 관계를 다룬 영화에서 딸이 엄마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의 대사가 <초미의 관심사> 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부장의 질서 하에 희생당한 여성의 속앓이가 웬 말이냐는 태도로 이 영화 속 모녀는 속으로 화를 삭이는 게 뭐야, 안에 있는 걸 모두 끄집어내 스트레스를 푸는 쪽이다. 엄마는 자신에게 부당하다 싶은 이를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욕을 퍼부어대고, 블루는 분노한 감정을 노래로, 랩으로 쏟아낸다. 가부장의 전복과 같은 대의는 알 바 아니라는 듯 개인이 중요한 이들을 하나로 엮는 건 생활 속 소동으로 드러나는 연대 의식이다. 


연대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초미의 관심사> 의 배경은 ‘이태원'이다.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재확산 지점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지만, 이태원은 새벽 시장의 경매장처럼 다양성이 기분 좋게 시끄러운 공간이다. 가부장이 공권력의 지위를 가지고 권력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과 다르게 이 공간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 음으로, 양으로 삶을 지키고 가꾸면서 어깨동무의 높이로 서로의 문제에 대처한다. 


돈을 찾겠다며 길을 나선 엄마와 블루의 이태원 여정은 막내의 행방이 알고 싶다고 찾아간 경찰서로, 막내가 다니는 학교로, 막내의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이가 근무한다는 타투숍으로, 구석구석 범위를 넓히면서 여러 장소, 다양한 사람으로 확장한다. 엄마와 친하게 지냈던 트렌스젠더 친구,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블루의 후배, 이태원이 좋다고 찾아온 외국인 등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거나 나란히 서 있는 이미지로 이들의 지위가 드러난다.  


영화 <초미의 관심사>의 포스터


공간을 익힌다는 건 그곳에 속한 이들의 삶을 알아간다는 의미다. 자신들만 챙기느라 막내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왜 돈을 훔쳐야 했는지 관심도 없고,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던 엄마와 블루는 막내와 인연 있는 이태원의 사람들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들으면서 막내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조금씩 알아간다. 하물며 돈 찾아, 아니 막내 찾아 이태원 삼만리를 겪으며 미운 정, 고운 정, 피는 못 속이는 가족의 정까지 겹으로 쌓은 모녀의 앙숙 관계는 서서히 누그러진다. 


내색은 안 했어도 엄마와 블루는 서로를 걱정해왔다. 엄마에게 막내의 사건은 블루를 만나 어떻게 사는지 알아볼 기회였을 터다. 남성 편력 탓을 했지만, 엄마만 놔두고 집을 나온 블루에게도 마음의 빚이 있다. 엄마가 욕을, 블루가 노래를 하는 건 속내를 직접 표현하지 못해 분노를 가장한 애정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블루의 노래 중에는 가수를 꿈꿨던 엄마가 흥얼거리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곡의 후렴구가 포함되어 있다. 공연 중 이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블루는 말한다. ‘이 노래를 박초미 씨에게 바칩니다.’ 둘 사이를 관통하는 감정의 출처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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