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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비혼인 걸 언제 받아들였어?

곽민지의 혼자 쓰는 삶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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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림한 냉장고를 떡하니 들여놓던 그 순간이, 엄마 마음에 ‘막내딸은 비혼입니다’ 도장을 쾅 박은 순간이라 생각했다. (2020.07.07)

일러스트_응켱

엄마가 딸이 미혼이 아닌 비혼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된 건 함께 스페인을 여행할 때였다고 한다. 아마 그라나다에서 함께 술 먹던 밤으로 기억하는데, 딸이 최근 연인과 헤어진 이유를 들었을 때라고. 당시 내가 말하기로, 애인은 처음과 달리 점점 결혼을 원하게 돼서, 서로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했단다. 나는 이미 거나하게 취했기 때문에 그 대화까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실이기는 했으므로 내가 한 말은 맞는 것 같다. 물론 전애인은 좋은 사람이었고 헤어진 이유는 여느 이별처럼 복합적이었으며, 결혼을 원한다고 한 건 맞지만 나를 재촉하거나 강요하진 않았다.

반면 내가 짐작한 시점은 3년 전 내 이사 때였다. 서른을 넘겨 새 집에 오면서 냉장고를 살 때, 엄마는 언젠간 2인 가족이 될지 모르니 4도어 냉장고를 사라고 했고 나는 2도어 중에서도 슬림형 냉장고를 고집했다. 그 사이 엄마와 나의 작은 신경전이 있었다. ‘당장은 이게 좋아’ 대신 ‘나는 2인 가정이 될 일이 없다니까’ 하고 못 박던 내겐 신경전이었겠고, ‘사람 일 모르잖아’ 하고 여러 번 물은 엄마 입장에선 비혼 여부 탐색전이었으리라. 결국 슬림한 냉장고를 떡하니 들여놓던 그 순간이, 엄마 마음에 ‘막내딸은 비혼입니다’ 도장을 쾅 박은 순간이라 생각했다.

비교적 가족끼리 친한 편이고 삶에서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게, 내가 비혼임을 확실히 인정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다. 언니는 감자를 좋아하고 난 고구마를 좋아하는데, 엄마는 그걸 자주 헷갈렸고 그럴 때마다 난 눈을 흘겼다. 감자 고구마에서조차 내 취향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면서, 내 삶의 중대한 방향에 대해 희미하게 말하거나 웃어넘기고 싶지 않았다. 명절에 ‘저러다 가겠죠’하는 친척들이 있으면 꼭 정정하고,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에게도 내 입장을 명확히 했다. 저는 감자 아니고 고구마 좋아합니다. 고!구!마! (호박 고구마!) 외치는 기분으로, 뒤가 배기도록 꼭꼭 눌러 쓰는 글자처럼 꼭꼭 말했다. 미혼 아니고 비혼이요. 비!혼!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우듯 받아들여 주세요, 사랑과 의리를 담아서요.

최근 엄마가 한 모임에 갔다가, 작은 딸이 결혼을 했는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엄마가 우리 딸은 비혼이라고 하자, “좋은 사람 만나면 그러다가 또 가겠죠” 하는 분이 계셨다고. 그 순간 엄마는, 지난 날 엄마와 대화하던 나처럼, 그걸 너무 정정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니요, 우리 딸은 어디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혹은 결혼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결혼하지 않는 게 본인에게 맞는다는 걸 잘 알아서 그렇게 자연스레 사는 아이예요.” 하고. 몇 년 전까지 “좋은 사람 만나면 가겠지” 하던 엄마는, 이제 함부로 넘겨짚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나와 함께 답답해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중요한 우리 엄마가 그걸 알아준 것이 신나서 엄마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 뒤 이야기는 자세히 듣지도 않았다. 2020년의 우리 엄마는 비혼에 대한 내 생각을 지지해주고, 다양한 비혼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어 강제 비혼 상태가 되어있는 내 친구 유부 퀴어(?) 이야기도 선입견 없이 들으려고 하고, 3~40대 비혼 친구들끼리 어떻게 주말을 보내는지 관전하면서 내 기준의 보통을 구경하고 있다.

그런 엄마가 최근에도 하는 고민이 있다고 해서 들어봤다. “니가 그렇게 비혼 비혼 소문을 내놓고선 나중에 기적처럼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사람들이 니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니?”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답해줬다. “괜찮아. 일단 그럴 일은 없고, 만에 하나 생기더라도, 내가 갑자기 고구마 안 먹는 감자 마니아가 됐다고 해서 그걸 지적할 권리가 누구한테 있겠어?”라고. 전국의 고구마 사랑단 여러분, 괜한 걱정 하지 맙시다.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건 언제나 유효하니까요. ‘너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려고 입 벌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나의 현재를 전시할 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내 삶을 숨김 없이 즐기기로 해요, 가능하다면 내 사람들의 인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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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곽민지

작가. 출판레이블 <아말페> 대표. 기성 출판사와 독립 출판사, 기타 매체를 오가며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걸어서 환장 속으로』 『난 슬플 땐 봉춤을 춰』 등이 있다. 비혼라이프 팟캐스트 <비혼세>의 진행자, 해방촌 비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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