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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9월 대상 – 흰색 속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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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100%, 면 100수 이런 표기가 된 흰색 속옷은 왠지 믿음이 간다. 언제부턴가, 속옷도 세련된 디자인에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게 되면서, 점차 그것은 진부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2020.09.08)

픽사베이

면 100%, 면 100수 이런 표기가 된 흰색 속옷은 왠지 믿음이 간다. 예전엔 거의 모두가 흰색 속옷을 입었지만, 언제부턴가, 속옷도 세련된 디자인에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게 되면서, 점차 그것은 진부하게 느껴지게 되었다.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이 오직 특정 브랜드의 면 소재 흰색 속옷만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세대나 입는 걸로만 알았던 흰색 러닝셔츠에 사각 팬티를 입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남편이 신혼 초엔 여간 이상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번, 브랜드 제품의 세련된(?) 속옷을 남편에게 들이밀어 봤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손사래를 치며 기겁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두 환불을 해 올 수밖에 없었다.

흰색 속옷이 단지, 예스러워 보여 남편에게 색감 있는 속옷을 입히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주부이자 맞벌이를 하는 나에게 흰색 면 소재 속옷이 불편한 이유는, 여름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시사철,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푹푹 삶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옷은 금방 누렇게 변색이 되고, 냄새까지 난다. 그런데 또 그렇게 몇 번 삶아 대다 보면, 이것들은 목 주위나 겨드랑이, 고무줄 부분이 낡고 늘어져, 결국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어쨌든 남편의 흰색 속옷 사랑은 나만의 비밀이자 불편함이다.

벌써 한참 전의 일이지만, 친정아버지가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시다 보니, 아버지를 간병하시는 어머니마저 기력이 떨어지셔서, 잠시 두 분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온 적이 있었다. 머무시는 동안 몇 차례 두 분 빨래를 해 드렸는데, 문득, 아버지의 흰색 속옷을 보니, 허리 고무줄도 늘어나 있고, 목둘레도 헤어져서, 모두 당장 버려야 할 상태였다. 그 길로 흰색 속옷을 몇 벌 사 와 누워 계신 아버지께 내밀었는데, 아버지는 "그래, 고맙다… 내일 갈아입으마." 짧게 답하시고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이부자리 밑으로 쓱 넣어 두시는 것이었다. 첫 월급 타서 사 드렸던 속옷 선물은 그렇게 기뻐하셨건만,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께 무심한 자식이 내밀던 속옷 선물은 그리 떳떳하지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이 그만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우리 집에 머무시는 동안, 아버지는 새로 사 드린 속옷을 끝내 입지 않으셨는데, 딸내미가 아버지한테 속옷으로 잔소리하는 게 어째 민망해 다시 말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두 분이 다시 본집으로 돌아가신 후, 방 정리를 하다 보니, 그 속옷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방구석 낮은 책상 위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사이즈도 나와 비슷하니, 이거 이 서방 입혀라.” 짤막한 메모와 함께. 이 서방이 이런 속옷 입는 건, 또 어찌 아셨을까?

그리고 딱 2주 후 결국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고, 나는 아버지께 마지막 선물을 끝내 드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미 당신이 가실 날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그 깊은 속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만, 몇 푼 안 되는 자식 돈이 아까워 그러셨다기보다, 아마도, 마지막 가시는 길에 부질없는 낭비를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차마 남편한테 입으랄 수도, 환불도 할 수 없게 된, 몇 벌의 속옷... 그렇게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나시게 되어서야 사드리게 되었던 속옷은 어리석고, 무심한 자식의 후회로 남게 되었다. 

그 후로도, 남편은 흰색 속옷만 입고 있고, 난 무덥고 습한 오늘도 남편한테 멀쩡한 속옷을 입히겠다고, 그것들을 삶고 있다. 이 속옷들은 다시 눈부시게 하얗고 뽀송해지겠지만, 아버지를 잃고 부질없는 후회만 남은 딸내미의 마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남겨진 사람들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지만, 그곳엔 먼저 간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다. 때로 일상이 힘들어지는 이유다.


차세란 인생이란 바다에서 앞만 보고 열심히 항해하다 보니, 문득 항구로 갈 길이 걱정됩니다. 글쓰기를 등대 삼아 무사히 항구로 돌아갈 길을 찾고 있습니다.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www.yes24.com/campaign/00_corp/2020/0408Essay.aspx?Ccode=00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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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세란 (나도, 에세이스트)

인생이란 바다에서 앞만 보고 열심히 항해하다 보니, 문득 항구로 갈 길이 걱정됩니다. 글쓰기를 등대 삼아 무사히 항구로 돌아갈 길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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