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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칼럼] 비속어 자막 어떻게 번역할까?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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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서도 비속어 자막을 쓰는 것을 경박해 보인다며 꺼리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영화의 결과 맞는다면 얼마든지 허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2020.11.05)


얼마 전 한 게임의 더빙 샘플 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올해 11월에 출시되는 <사이버펑크 2077>이란 게임인데 키아누 리브스가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으로도 게이머들을 흥분하게 했다. 해외 게임이 한국어로 더빙되는 예는 흔하지 않아도 종종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이번엔 더빙이 화제가 됐을까?

화제의 영상은 <사이버펑크 2077>의 제작사 CDPR 공동 대표인 마르친 이빈스키가 한글날을 맞아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한국 유저들을 위해 공개한 더빙 샘플 영상이었다. 나도 번역가로서, 게이머로서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영상을 끝까지 보고 나니 역시 화제가 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많은 댓글로도 그 충격적인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댓글에 가장 많이 언급된 대사는 “먹고 뒈져, 씨발 새끼들아!”다. 대사도 대사지만 성우의 욕설 발음이 차지다 못해 귀에 쩍 달라붙는다.

댓글의 반응은 대부분 호의적이다. “젠장, 제기랄, 망할, 빌어먹을” 욕설 사총사 돌려막기에 지친 게이머들은 진작부터 이런 노골적인 욕설 표현을 바랐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체이용가, 12세 이용가에 이런 욕설을 원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청소년이용불가 게임에서는 성인 게임이니만큼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원문 그대로를 즐기고 싶다는 거다.

지금껏 저런 번역이 쉽지 않았던 것은 첫 번째로 클라이언트의 입김이 가장 세기 때문이다. 아무리 차지게 번역을 하고 녹음을 하고 싶어도 클라이언트가 양손으로 엑스 표시를 하면 끝이다. <사이버펑크 2077>은 제작사에서 한글화에 의욕을 보인 게임이라 그런지 기존의 전통적인 더빙 번역과 다른 면들이 보인다. 아직 샘플밖에 없어서 어떻다 평가하긴 어렵지만 번역가로서는 아주 긍정적인 변화로 보고 있다. 용기를 내신 클라이언트와 작업자들에게 경의를.

게임 더빙과 영화 더빙은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작업 사정이 어떠할지는 대략 짐작이 된다. 더빙은 자막에 비해 프로젝트 멤버가 많아서 매번 원하는 만큼의 질을 내기가 쉽지 않다. 프로젝트 멤버가 많다는 건 그만큼 변수가 많다는 뜻도 된다. 번역, 더빙 디렉터, 사운드 엔지니어, 성우, 클라이언트. 크게는 이렇게 다섯 종류의 멤버가 참여하는데 이들 모두의 뜻이 하나로 모이는 건 쉽지 않다. 작든 크든 각자 선호하는 대사의 질감이나 대사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어서다. 그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더빙 디렉터의 역할이지만 말했다시피 쉬운 일이 아니다. 성우만 해도 한두 명이 아닌데 녹음실에선 베테랑급 성우에게 보통 “선배님”이란 호칭을 쓴다. 아무래도 선배님들과의 작업에서 의견 차이로 트러블을 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소비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구어체 더빙이 나오기 위해선 일단 번역문이 완전한 구어체로 완성되어야 한다. 또한 더빙 디렉터가 그 번역본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하고, 성우들도 그 대사의 결에 따라 극적인 톤보다는 자연스러운 톤을 구사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호흡이 딱 맞아떨어지는 일은 드물다. 비즈니스에서는 방향성이 같고 마음이 맞는 선수들끼리 짝을 짓는 프로젝트를 좀처럼 경험하기 힘들다. 늘 뜻이 다른 누군가가 있고 그들을 설득하고 논의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애초에 방향성이 같은 멤버들의 결과물에는 댈 게 아니다. 위에 언급한 욕설 대사도 클라이언트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모를까 작업자 중 한 명이 껄끄럽다고 거부하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중에서도 번역가의 입김이 가장 약하다. 늘 존재하는 작업 인원수만큼의 변수, 그렇게 생각하면 프로젝트 관련자가 몇 명 없는 자막 작업은 더빙에 비해 한결 수월한 것 같기도 하다.

2016년 이후에 성년이 된 관객들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자막에서 노골적인 욕설이 나오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씨발”, “좆나”, “딸딸이” 같은 노골적인 비속어가 규모 있는 상업 영화에 처음 쓰인 것이 <데드풀>이다. 청소년 관람불가면 당연히 비속어 자막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5년 전만 해도 극장에선 저 수준의 비속어 자막은 볼 수 없었다.

번역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 있어서 노골적인 욕설을 자막에 쓴 것도 아니고 개봉관 신인 번역가의 생각 없는 ‘똘끼’였는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미친 짓이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자 그 후 영화사들의 비속어 자막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전에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서도 비속어 자막을 쓰는 것을 경박해 보인다며 꺼리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영화의 결과 맞는다면 얼마든지 허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고 자막에 마구잡이로 배설하듯 욕설을 쓸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비속어 사용은 생각보다 많은 고민과 자제가 필요한 작업이다. 온갖 자극적인 상욕을 마구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런 건 비속어 자막을 안 쓰느니만 못하다.

이번 기회로 <사이버펑크 2077>의 더빙 번역이 게임 더빙의 물꼬를 터서 더 많은 한글화 게임이 나왔으면 한다. 또한 번역가들의 운신 폭을 확장해 줄 특별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번역가들이 더 자유롭게, 더 유저 친화적으로 번역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게임 제작사 관계자님들 보셨죠?


*원문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비속어 인용을 노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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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희(영화번역가)

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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