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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인생책] 최애소설입니다 - 『오만과 편견』

<월간 채널예스>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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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독서모임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이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참가자들에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받은 뒤부터 이 소설을 최애소설이라 밝히지 않게 되었다. (2021.03.09)


현존하지 않는 인물 때문에 마음을 끓였던 적이 있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다아시가 그 대상이었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때였는데, 읽으면서 느꼈던 달콤함과 저릿함이 지금도 만져질 듯 생생하다. 이십 대에 접어든 어느 날,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지금 읽어도 그렇게 설렐까? 놀랍게도 중학생이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 일었다. 설레고, 그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고, 들떠서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내게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 중 탑 쓰리를 꼽으라면 『오만과 편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안나 카레니나』를 꼽을 텐데, 그 중 『오만과 편견』은 읽었던 횟수로 보나, 실생활에서 받은 영향력으로 보나, 독서 당시의 몰입 정도로 보나, 단연코 일 순위였다. 

그러나 남들에게 말할 때 나의 최애소설은 이 소설이 아니었다. 고교시절 독서모임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이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참가자들에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받은 뒤부터 이 소설을 최애소설이라 밝히지 않게 되었다. 

당시 모임의 구성원들은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떼거지로 등장해 같이 밥 먹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얘기가 뭐 그리 좋느냐, 정도의 반응이었던 것 같다. 물론 누구도 그 소설을 ‘수준 낮다’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 소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얘기하는 게 내 ‘이미지’를 깎아먹는다는 것을. 그 뒤로, 타인에게 밝히는 나의 최애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가 되었다. 마음 속 우선순위에서 조금 밀리긴 했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소설들이었고, 톨스토이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쩐지 내가 조금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두 소설에 대해서는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왜 좋아하느냐’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특히 『전쟁과 평화』를 꼽을 때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의 반응까지 따라붙었다.  

한국 소설에 대해서도 유사한 경험이 있다. 십대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면서 나는 박완서 소설을 밥먹듯 읽었는데, 어떤 모임에서 박완서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오만과 편견』때와 비슷한 반응을 받은 뒤, 여러 사람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말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청준이나 이문열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 남자작가들 역시 무척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소설을 최애작품으로 꼽는데 데 크게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다. 왜 박완서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지? 내면에서 의문이 일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다. 현상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파악하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때였기 때문이리라. 타인에게 최애작가를 밝힐 때 나도 모르게 여성작가의 이름을 빼고 말한다는 걸 의식할 정도의 역량을.

같은 범주라도 실행자가 여성일 경우 그 결과물은 사적이고, 사소하고, 예외적이거나 특별 한 일로 여겨진다는 법칙의 예시로 나열될 수 있을 이 경험들을, 나는 마흔 고개를 넘어간 다음에야 하나의 커다란 맥락에 놓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공적인 말하기와 사적인 말하기로 분류되는 문제들. 여성의 말과 글, 행동은 사적이기 때문에 평가할 만한 가치가 떨어지고, 인류 공통의 경험이 아니며, 그렇기에 ‘정전’으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논리들.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까지, 나는 그런 논리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제인 오스틴이나 박완서가 아닌, 톨스토이나 이청준을 좋아한다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마흔이라는 관문을 넘어가면서, 인생의 순간순간 쌓아왔던, 이제는 너무 높이 쌓여 흔들릴 일밖에 남지 않는 질문의 탑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사소하다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매일 매일 밥 짓는 행위가 사소하다고? 사람을 낳고, 사람을 살게 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 가치가 없다고? 기존에 내면화한 가치관에 따르면 나와, 나를 둘러싼 많은 여성들의 삶은 너무나 사소하고, 그렇기에 가치가 없었다. 지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삶을 그린 이야기들은 높게 평가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도무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여성은 정치·경제·사회·문화 같은, 사회의 뼈대를 이루는 분야에 진출할 기회를 봉쇄당했고, 때문에 ‘사적’이라 불리는 영역에 강제로 머물렀다. 그렇다면 여성의 역사는 모두 쓰일 가치도, 읽힐 가치도, 인정받을 가치도 없단 말인가?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사인가? 누가 공과 사를 명명하는가? 누가 고전을 명명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준과 정전과 법칙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자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합니다! 『오만과 편견』이 최애소설입니다!



세월과 경험 덕에 문학작품을 그 내용만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구조, 역사와 엮어서 조망할 수 있게 된 지금, 진지하게 최애소설을 넘겨본다. 『오만과 편견』의 무엇이 그렇게 나를 끌어당겼던가?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바로 알아버린다. 왜 여러 번 반복해 읽어도 이 소설이 지겹지 않았는지. 왜 나이 쉰을 바라보는 지금도 다아시가 나오는 부분을 읽으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지. 그 이유는 ‘쓰는 손’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있었다. 뛰어난 스토리텔러로서의 자질에. 제인 오스틴이나 박완서의 소설은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 쑤욱 빨려들어간 뒤 등장인물이 된 양 생생하게 한 세상을 살다오게 만든다. 마지막장을 넘긴 다음에야, 조금 전 들어갔다 나온 세상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이며 소설가라 불리는 어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이 펼쳐가는 세상을 너무나 그럴 듯하게 만든 나머지 독자가 그것을 진짜 있었던 일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은 독자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매혹적인 여행이어야 한다고, 노력하지 않아도 손쉽게 빠져들 수 있는 재밌는 여행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내게는 제인 오스틴이나 박완서의 작품과 견줄 작품이 없었다. 같은 이유로, 톨스토이를 비롯한 다른 작가의 작품들은 ‘소설’로서의 매력이 떨어졌다.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묘사와 인물의 생생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두 범주만 놓고 보면 제인 오스틴과 박완서가 톨스토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낄 정도로.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에는 작가의 자의식과 포부, 야망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것이 작가의 육성이구나, 하고 곧바로 알아차리게 만드는 ‘설교’가 소설 여기저기에 뜬금없이 나타난다. 내용 자체는 훌륭할지 몰라도 그런 설교 부분은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급격히 떨어뜨린다. 작가의 ‘쓰는 손’을 느낀 순간 ‘아, 이게 가짜 이야기였지!’ 라는 인식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푹 잠겨있던 세계에서 갑자기 확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바로 그것이, 내 마음 속 리스트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후순위로 밀렸던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쓰는 손’이 드러나는 설교가 많이 포함된 작품들이 ‘대작’으로 불리거나 의심할 바 없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대작을 칭송하는 이들은 십중팔구 가방끈이 길거나 제도권에서 높디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누가누가 만나 밥 먹고,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이야기보다는 나라를 구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깊은 철학적 주제를 논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즉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차지했던 영역을 다루어야만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만과 편견』은 당대의 생활상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낸 걸작이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이 소설을 비롯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을 참고하며 통화가치에 대한 설명을 펼쳤다. 이 외에도 수많은 소설, 영화,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에서, 『오만과 편견』은 빈번하게 참고자료로 인용된다. 제인 오스틴이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에 대해 쓰면서 개인적인 포부와 야망을 직설적으로 섞어 넣었다면, 그래서 당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보다 작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늘어놓고 설교하는데 전념했다면, 작품이 오늘날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평가되고 인용되었을까. 출판 후 이백여 년이 흐른 뒤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에 사는 40대 여성이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을 보면서 가슴 설레 할 수 있었을까.

작품 속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또다른 이유는 작가가 소설을 전개해가는 방식에 있다. 얼핏 보기엔 평이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직접적으로 감정을 토로하거나 육체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다. 드물게 감정을 토로하더라도 대단히 이성적이고 건조한 방식을 택하여, 지금 등장인물들이 거론하는 대상이 제 감정인지 아니면 자기하고 별 상관없는 사물인지 헷갈리게 하며, 스킨십은 거의 전무하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오직 식사와 산책, 그 사이사이 일어나는 대화만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키스 씬 한번 나오지 않고 끝나는 이 건조함의 극치인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는 상상하게 된다. 어느 시점에서 이들의 손길이 만났을까. 손길이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일상적인 소재와 사건을 통해 그 어떤 성애소설보다 더 극적인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먹고, 걷고, 대화하는 우리네 자잘한 일상 속에 우주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다고 믿고 있는 내게는 이보다 더 매혹적인 소설이 있을 수가 없었다. 누가 감히 말하는가. 남들 다 먹는 걸 먹고, 남들 다 입는 걸 입는 내 삶이 가치가 없다고! 천만의 말씀. 세상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내 앞의 밥 한 공기, 내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명의 사람, 빨래대에 줄줄이 걸린 색색의 빨래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작은 사물, 작은 관계가 우리 인간이라는 우주를 이루는 가장 치명적인 입자이니. 이 소설은 그것을 가치관이 섞인 직설적인 설교를 하는 대신 평범한 이들의 삶을 그려내는 것으로 훌륭히 보여주었고, 그렇기에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남았다. 

이제 나는 어디에 가든 최애소설로 『오만과 편견』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밝혔을 때 상대가 보이는 반응을 보고 예전처럼 상처받거나, 다음부턴 톨스토이를 좋아한다고 말해야겠다 다짐하며 후회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가 걸어왔을 인생여정과 그 과정에서 바뀌거나 바뀌지 않았을 가치관, 독서편력, 그가 딛고 있을 사회적 지형과 경험치에 대해 가늠해본다. 그 과정에는 쾌감이 있다. 쾌감의 끝에는 ‘마이너리티로 살아서 좋은 점도 있구나!’라는 드문 깨달음이 따라붙는다. 



오만과 편견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저 | 류경희 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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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아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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