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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몰라도 용감하게 말하기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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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어린이들의 허세는 정말 대담하고 진지하다. 그래서 때론 틀린 표현이 있어도 잡아내기 어렵고, 대놓고 웃기도 미안해진다. (2021.04.30)


<더 파더(The father)>와 <대부(The godfather)>의 포스터
글자도 한끝 차이인데, 닮기도 묘하게 닮은 파더들.
 

며칠 전,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가 매표소 직원분께 직접 발권을 하게 됐다. 그런데 제목을 수차례 말해도 그런 영화는 상영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돌아와 크게 당황했다. 나름 기다리던 영화라 꼼꼼히 알아보고 멀리까지 간 건데, 시간대가 틀린 것도 아니고 아예 그런 영화가 없다니 잘 이해가 안됐다. 하필 핸드폰까지 두고 오는 바람에 뭘 어떻게 확인해야할지 몰라 정신만 혼미해졌다. 설마 직원분이 잘못 알았을 리는 없고, 나도 분명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왔는데, 대체 누가 뭘 잘못 안 거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 된 걸까, 잠깐 오늘 며칠이더라,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지……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보려던 영화 제목이 <더 파더(The father)>였는데 나는 계속 <갓파더(The Godfather)>(그러니까, <대부>)를 달라고 우겼다는 걸. 영화를 보는 내내 치매환자 ‘안소니’의 마음 속 불안과 공포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제목을 잘못 말한 건 꽤 오랜만이었다. 요즘은 극장에 가도 거의 모바일이나 키오스크를 통하는 시스템이고, 대화를 나눌 때에도 생각이 안 나면 바로 검색해서 확인하다 보니, 뭔가를 잘못 말할 기회 자체가 사라진 것도 같았다. 전에는 이와 관련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재밌는 일화도 많았는데. 이를테면, “<단적비연수> 2장이요” 해야 할 것을 “<단양적성비> 2장이요” 했다던가, “<라라랜드> 주세요” 해야 하는데 “<라라댄스> 주세요” 했다는 이야기들(자매품으로 <룰루랄라>도 있다). 사실 내 영화도 이런 사례를 자주 양산하는 편인데, 학생 시절에 만든 단편 영화 <콩나물>은 어떤 연상 작용 때문인지 초반에 <고사리>, <콩자반> 등으로 잘못 불린 일이 있었고, 첫 장편 영화인 <우리들> 개봉 당시엔 마케팅을 맡은 Y대리가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 개인 SNS에 이런 감상 글을 올렸다고도 들었다. “오늘 정말 좋은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할 수 있어 정말 기쁘다. <아이들>……”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무해하고 귀여운 말실수들을 무지하게 좋아한다. 사람마다 웃음 버튼이 모두 다른 곳에 달려 있다던데,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이런 ‘잘못 튀어나온 말’의 사례만 들으면 유달리 정신 줄을 놓고 웃게 된다. 고전적인 일화로, 친구 집에 놀러갔더니 친구 엄마가 콘플레이크를 꺼내놓고 “포크레인 먹어라~”고 했다던가, 택시 타고 “전설의 고향 가주세요!” 했는데 기사님이 어떻게 알고 예술의전당 앞에 잘 내려주셨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산달’을 ‘만기일’로, ‘인큐베이터’를 ‘콘테이너’로 바꿔 말한 예시들은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는 나의 웃음 폭탄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언젠가 영화에 써먹을 생각에 아이디어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 기록하곤 했는데, 노트의 반 이상이 그런 사례로만 가득 채워지는 바람에 나중엔 지루할 때 주섬주섬 꺼내보는 유머 모음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즘은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하는데 그 역시 유머 기록장이 되어가는 중이다. 최근 들었던 가장 재밌는 이야기는, 오랜만의 가족 식사 자리에 누나가 오지 않아 남동생이 궁금해 하자 엄마가 “요즘 너희 누나 엄청 바빠. 회사 일도 많고, 판교까지 텔레파시도 배우러 다니잖아~” 했다는 일화다(어머님, 필라테스요). 저 이야기를 들은 날 종일 배가 찢어지게 웃으며, 99프로의 확률로 ‘키친타올’을 ‘치킨타올’이라 부르는 우리 엄마를 떠올렸다. 텔레파시와 필라테스, 치킨과 키친 사이에 흐르는 그 희한하고도 희박한 유사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애매하게 닮은 단어를 용케 떠올리고 주저 없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사뭇 천재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기억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선 대체로 공백이 잘 채워지지 않는 나로선 그런 유연한 사고와 대범한 실행이 늘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재미로든 감동으로든 당분간 이 책을 능가할 책이 또 있을까.
최근 멋진 리커버 판이 새로 나왔다.

어린이들의 사례엔 더 큰 웃음과 감동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읽고 은혜 받기를 바라는 김소영 작가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의 도입부에는 어린이들의 기상천외한 말실수들이 소개되어 있다. 할머니 생신 잔치에 다녀와 ‘정말 성수신찬이었다’고 감탄하고(진수성찬), 피규어를 사느라 ‘용돈을 탈진했다’고 설명하는(탕진했다) 등, 희한하지만 묘하게 수긍이 가는 어린이들의 기막힌 말실수 대잔치에 나는 큰 소리로 웃으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김소영 작가는 이를 ‘새로 배운 말을 꼭 써보려는 어린이의 전형적인 허세’라고 짚어냈는데 너무나 동의하는 바였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새롭게 익힌 어려운 말을 열심히 하지만 잘못 외우고는 언제 사용해볼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어린이들, 때가 왔을 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정타를 날리고 뿌듯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만 으쓱할 어린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져, 나는 종일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또 웃어댔다. 나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집에서 읽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제발 너무 웃긴 책의 표지엔 꼭 ‘폭소주의’ 같은 경고문을 실어주면 좋겠다. 독서하러 자주 찾던 동네의 단골 카페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읽은 뒤 다시는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교훈삼아 『전국축제자랑』은 집에서 혼자 읽었지만…… 이삿날이 예상보다 앞으로 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린이들의 허세는 정말 대담하고 진지하다. 그래서 때론 틀린 표현이 있어도 잡아내기 어렵고, 대놓고 웃기도 미안해진다. 확실히 어린이들은 새로운 말을 익히는 과정에서 필히 겪을 수밖에 없는 실수나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두려울지언정 과감히 시도해보고 틀리면 수정해나갈 수 있는 엄청난 용기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새로운 말들을 쉽게 익히고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지도 모르겠고.  

사실 나도 어린이였을 땐 나름 호기롭게 허세를 부리며 새로 배운 말들을 써보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한글날을 기념하는 작은 글짓기 대회에 짧은 글을 써서 냈는데, 나중에 그 글에서 ‘한글은 서정적이다’라고 쓴 문장을 우연히 보게 된 엄마가 웃음이 빵 터져 종일 나를 놀려댔다. 나는 창피해서 더 그랬는지 잔뜩 발끈했다. 그리고 왜 한글에는 ‘정서를 듬뿍 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한글을 서정적이라고 느낀고 있다며 도리어 엄마를 강하게 추궁했었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 일로 종종 나를 놀려먹지만, 어쨌든 그날 이후 나는 ‘서정적’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아직도 1프로 정도는 한글이 서정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 특히 글을 써야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어쩐지 더 겁내고 움츠러드는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이런 저런 사람들의 다양한 말실수 일화들을 자주 떠올리는 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에도 다시 그런 마음들이 피어나면 좋겠다. 잘 몰라도 용감하게 도전해보는 마음. 틀리면 실컷 웃으며 다시 배우고 익히는 단단한 마음. 실수를 실험으로, 실패를 실현으로 뒤바꾸는 용감무쌍한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김혼비, 박태하 작가의 <전국축제자랑>
혹시 아직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부럽고), 부디 절대 쫓겨나지 않을 안전한 곳에서 맘 편히 박장대소하며 읽으시길 바란다.(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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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가은(영화감독)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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