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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가끔은 좋은 일도 있다] 나는 ‘영원한 꽝사람’이 아니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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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주 큰 요소가 하나 있다. 그건 내 책상과 방과 집이 항상 굉장히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잠깐 시간을 들여 책상을 치우고 기분 좋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021.06.04)


6년을 붙잡고 있던 원고가 있다. 6년간 매일 쓴 것은 아니고 짬이 날 때마다 건드리던 원고인데 올해는 반드시 완성하고 출간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편집자를 만나서 이미 네 번 정도 미룬 ‘이번엔_진짜_최종’ 마감날을 정하고 돌아오니 묵직한 부담감이 왔다.  6년을 들였으면 더 잘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마음이 창작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지만 아는 것과 상관없이 그런 마음이 든다. 아는 대로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일이나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책상을 치운다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연필을 깎는다는 작가도 보았다. 다들 나름의 의식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그런 요소가 별로 없었다. 휘둘리기 싫어서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카페에서 냅킨 뒤에 가사를 쓰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핸드폰 메모장에 쓰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쓰기도 했다. 부끄럽게도 옛날엔 이런 말도 했다. ‘그냥 하면 되잖아?’ 아, 그냥 하긴 뭘 해. 인생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사실 아주 큰 요소가 하나 있다. 그건 내 책상과 방과 집이 항상 굉장히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잠깐 시간을 들여 책상을 치우고 기분 좋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하, 괜찮아, 우리 집도 더러워’하고 방문을 연 친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언니 내가 청소 도우미 한번 쏘면 안 될까?’ 하고 먼저 청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 상태로 미루고 미루기를 십 몇 년.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사람이 둘이 되고, 그렇다는 것은 CD도 두 배, 물건도 두 배. 그리고 함께 살게 된 강아지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 가득 쌓인 물건 사이로 털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런 나도 가끔은 정신이 들어 수납법에 대한 책도 몇 번 사보았다. 그렇구나, 물건의 제자리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일단 버리는 것이 중요하구나. 머리로는 알겠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위한 무슨 묘수가 없을까 해서 책을 산 건데… 아는 대로만 살 수 있다면 나는 너무나도… 

그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정리를 시작했다. 뿅, 하고 시작했다. 6년짜리 원고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이쪽으로 뻗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첫 번째 타깃은 옷방이었다. 서랍을 하나씩 열고, 전부 꺼내고, 분류했다. 너는 기부, 너는 쓰레기봉투, 너는 킵. 잠옷으로 입겠다며 안고 있던 티셔츠 모두 안녕. 미련이 남아 처분하지 못했던 스몰 사이즈 옷도 안녕. 프린트가 귀엽다는 이유로 샀던 싸구려 양말도 안녕. 

보통 이런 큰 정리를 한번 하면 다음 날 이를 부득부득 갈며 드러눕는 패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다음 날 내가 거실 서랍을 열었다. 또 뿅, 하고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천근만근이던 바위가 갑자기 돌멩이가 된 기분이었다. 7년 전에 유통기한이 끝난 휴족시간, 6년 전에 사용기한이 끝난 샴푸, 갖가지 파우치, 언젠가 독일에서 쟁여온 아스피린(대체 아스피린을 왜 쟁이냐고) 등을 전부 처분했다. 아, 샴푸는 손빨래 할 때 쓰려고 화장실에 갖다 놨다. 새 마스카라가 4개나 나왔다. 제발 재고관리 좀 해주세요. 

그리고 책장. 멋진 책이 있으면 일단 주문하고 남는 자리에 아무렇게나 꽂아 두던 버릇 때문에 종이책이 있다는 걸 까먹고 전자책을 자꾸 사던 나. 이런 사람을 요즘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라고 부른다던데, 명예로운 호칭이지만 이 패턴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또 뿅, 하고 시작했다. 과감한 분류와 장시간의 노동 끝에 드디어 책장에 책을 세로로 꽂을 수 있었다. 신간 코너도 만들었다. 한 칸짜리 독립책방의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떠나 보내기로 한 책은 전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부했다. (‘책다모아’를 검색해보세요!) 이 책이 어떤 동네의 고등학교 도서부원에게 닿길 바라며 열심히 포장을 했다. 

여행을 가면 조금 다른 삶을 살았다. 오늘부터 한동안 지낼 이 방에는 몇 년 치 물건이 뒤섞여 있는 서랍도, 옷장도, 책장도 없다. 삶의 무게는 10킬로, 트렁크 한 개 분이었다. 그럼 그제야 마음에 틈이 생겨 바람이 통하는 것 같았다. 괜히 방 여기저기를 다니며 옷을 걸고, 신중하게 골라온 책을 둘 위치를 정하고, 여행용 로션과 크림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가벼운 감각이 좋았다. 며칠간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돌아가면 똑같은 나, 똑같은 상황, 똑같은 돌덩이가 있겠지만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았다. 

기운이라는 것은 참 묘하다. 나는 아침마다 복권을 한 장 받는 기분이었다. ‘꽝’이 나오면 겨우 일을 하고, 남은 에너지로 겨우 생활을 했다.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서 내가 꽝사람인 줄 알았다. 오늘은 식기세척기를 두 번이나 돌리며 ‘나 어쩌면 꽝사람이 아닐지도 몰라’하고 생각했다. 요 며칠 당첨을 뽑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복권은 계속 변덕스러울 것이고 앞으로의 당첨 확률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꽝사람’이 아니다. 돌덩이도 치울 수 있다. 그건 굉장한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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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지은(작가, 음악가)

작가, 음악가. 책 <익숙한 새벽 세시>, 앨범 <3>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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