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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 음악을 출판할 거야 - 파니 헨젤의 피아노 삼중주, D단조 Op. 11(1847)

파니 헨젤의 피아노 삼중주, D단조 O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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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하겠다는 결정은 파니에게는 평생을 싸워 온 내적, 외적 갈등의 결론이었습니다. (2021.09.02)

카미유 클로델, « 성숙의 시대 », 1899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에서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을 맞닥뜨린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강력한 운동성과 무릎 꿇은 여인의 절망이 빚어내는 폭풍 같은 에너지에 매료되어 한참을 그 앞에 머물렀지요. 시대를 대표했던 예술가였던 안정적인 로댕은 줄 수 없는 간절하게 분출하는 서정성, 그로 인한 위엄이 클로델의 작품에서 느껴졌습니다. 

파니 헨젤(1805-1847)의 피아노 삼중주 D단조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클로델의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불꽃 튀는 과감한 피아노 기교와 끝을 알 수 없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선율은 이전에 알지 못한 차원이 다른 낭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유려함으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죠. 


파니 헨젤, 피아노 트리오 D단조, Op.11. 아베그 트리오 연주 


1악장은 전체 네 악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큽니다. 빠르게 쉼 없이 흐르는 화려한 피아노 위로 바이올린과 첼로 선율이 넓게 펼쳐집니다. 삼중주가 아니라 거의 피아노 협주곡처럼 들리는 1악장이 지나면 관조하는 듯 고요한 2악장이 시작됩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기악으로 연주하는 가사 없는 가곡)’를 닮은 짙은 서정성이 돋보입니다. 실내악 3악장에는 보편적으로 스케르초나 미뉴에트가 등장하는데, 파니 헨젤은 ‘가곡(Lied)’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2악장과는 또 다른 노래를 이어갑니다. 마지막 4악장은 긴 피아노 독주로 시작합니다. 카덴차(협주곡에서 다른 악기들이 연주를 멈추는 동안 독주자가 홀로 즉흥연주를 하는 부분)처럼 유연한 서두에 이어서 우수 젖은 헝가리 음악 분위기를 띠는 선율이 피아노 펼침화음 위에서 노래 됩니다. 대조적인 파트를 치밀하게 엮는 구조에서 오는 잦은 템포 변화는 감정을 끌어 올렸다가 식히고, 다시 끌어 올리기를 반복합니다.


빌헬름 헨젤이 그린 파니 헨젤(1829)

이미 예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파니 헨젤은 낭만 시대 여성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의 누나이기도 합니다. 명문가였던 멘델스존 집안에 태어나 훌륭한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파니 멘델스존은 음악에서 특별히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동생 멘델스존과 함께 음악 수업을 받은 파니는 집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 일요일 음악회 »에서 피아노로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뿐 아니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집에서 열린 음악회라고는 하지만, 멘델스존 가문은 베를린에서 워낙 유명했던지라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과 예술인이 모이는 수준 높은 사교 모임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파니는 펠릭스가 받는 만큼의 기회와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열네 살이 된 파니에게 전문 음악가는 동생인 펠릭스가 가야 할 길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자신을 가꿔야 할 파니에게 음악은 인생의 ‘장식품’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아버지는 딸의 음악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동생인 펠릭스도 누나가 가진 재능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는 가정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하지만, 파니 멘델스존에게 음악은 ‘장식품’일 수 없었습니다. 동생이 세상으로 뻗어 나가며 대중과 만나는 동안 파니 멘델스존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멈추지 않고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지속했습니다. 그러던 중 화가인 빌헬름 헨젤과 결혼하게 되죠. 작품 출판에 반대한 이전 가족과는 달리 남편인 빌헬름은 부인의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파니는 아들이 태어난 1년 후부터 자신의 집에서 « 일요일 음악회 »를 다시 열었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개최했던 문화 살롱을 자신의 집에서 재개하면서 사적인 음악 모임을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하며 스스로 음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었을 때, 파니는 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처음부터 네가 원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진행하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아.
네가 비웃을지 모르겠구나. 내 나이 마흔에 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워하고 있다니.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를 비롯한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제는 이런 내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는구나. 한마디로 말 할게.

지금부터 나는 내 음악을 출판할 거야.

1846년 7월 9일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하겠다는 결정은 파니에게는 평생을 싸워 온 내적, 외적 갈등의 결론이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집안에서 연주하는 것과 작곡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외부에 출판하는 일은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출판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의 일부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파니 헨젤 혹은 멘델스존이 살던 19세기 초반에는 여성의 위치가 이전보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후퇴했습니다. 1804년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모든 계층의 여성들을 아버지나 남편에게 법적으로 소속시키는 법령을 발표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여성에게 교육받을 권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소수 특권층의 여성만 가정에서 사적으로 음악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대부분 피아노 교습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여성에게 사회, 경제적 위치를 주는 작곡과 출판은 거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원한다면 아버지나 형제의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후, 파니 헨젤은 자신의 작품을 모아 출판하기에 착수합니다. 이전처럼,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악보에 적어 넣었습니다. 1847년 1월부터는 파니 헨젤의 음악에 관한 평이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 사적 영역에 머물렀던 그의 음악이 전문 음악계로 들어섰다는 증거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음악이 바로 피아노 삼중주 D단조(Op.11)입니다. 대중과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탓에 음악계의 주요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파니는 오히려 그 덕에 배운 지식을 넘나들며 자신의 색채를 원하는 만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악보 판매를 위해 대중이 연주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량을 타협하는 기성 작곡가와 다르게 파니는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과감하고 자유롭게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파니의 피아노 삼중주는 그 열매였습니다. 동생 펠릭스가 주변의 요구를 반영하며 얌전하게 구성한 피아노 삼중주와는 달리, 파니의 삼중주는 화려하게 에너지를 분출하며 살롱을 넘어 대형 연주홀에서도 충분히 대중을 매혹할 만한 독특한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파니 헨젤이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계층 인식을 향해 반기를 들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과정은 평생에 걸쳐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대작인 피아노 삼중주에 관련해 1847년 파니는 일기장에 « 피아노 삼중주(Op.11)가 내 걸음을 인도했다 »고 적었습니다. 같은 해 5월, 연주회를 준비하던 중 그는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나와 영혼의 단짝이었던 펠릭스 멘델스존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6개월 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흔둘, 짧은 생이었지만 그동안 파니 헨젤은 450곡이 넘는 꽤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가곡을 비롯해 피아노 독주곡, 실내악, 합창곡, 오라토리오도 작품 목록에 들어갑니다. 항상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가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겸손하고 치열하게 지난 삶의 여정이 바로 그 작품 목록입니다.   

파니 헨젤이 일기장처럼 한해를 기록한 « 일년, 열두 가지 분위기 Das Jahr, 12 Charakterstücke (1841)»는 열두 달을 주제로 작곡한 연작곡입니다. 그중 ‘9월 : 강가에서’를 들으며 가을로 들어서는 9월을 시작해 보세요.


사라 로텐버그 피아노 연주 



전곡 듣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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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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