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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흥의 카피라이터와 문장] 대박 파이팅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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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게 어디 그냥 말이겠어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과 바람과 생각 같은 것들이 투영된 거울 아니겠어요? (2021.11.02)


잔인함은 약한 자들에게서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는 울면서 강하게 사는 자들이 많다. 

_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대박'이란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대박이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내가 아무리 싫어한들 말이란 변하는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많이 쓰면 그 말이 새로운 말로 받아들여지는 거야 저도 잘 알지요. 산책하다가 보니까 동네에 작은 꽃집이 개업을 했더군요.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만드는 노란 소국을 기린목으로 들여다보다가 돌연 문 앞에 놓인 축하 화분에 눈길이 가닿았는데 단정한 리본에 궁서체로 '대박나세요'라고 써 있는 거예요. 친구나 지인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대박나길 기원해주는 그 마음이야 모르지 않지만 어쩐지 우리가 빌어주고 스스로의 미래에 바라는 저 대박이란 뭘까, 생각하게 됐어요.

참! 그거 아세요? 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대박'이 올라 있다는 거 말예요. 대박이란 말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대박인 상황이 된 거죠. 옥스퍼드 영어 사전엔 'banchan', 'kimbap'도 있고요, 'manhwa', 'mukbang', 'oppa', 'unni'도 새로 추가되었다지요. 'daebak'은 ‘우연히 얻거나 발견한 가치 있는 것을 뜻하는 명사’라네요. 대박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지만 저는 노름판에서 왔다는 추론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말큰사전에선 '박'을 '노름판에서 여러 번 지른 판 돈'으로 풀이하고 있다는 거죠. 한 판에 큰 돈을 왕창 따는 걸 큰 대 자 붙여 대박이라는 건데 말하자면 횡재해라, 돈벼락 맞아라, 그런 셈이지요. 말이란 게 어디 그냥 말이겠어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과 바람과 생각 같은 것들이 투영된 거울 아니겠어요?

약한 사람은 행운을 믿고 강한 사람은 인과관계를 믿는다, 그게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의 말이죠, 아마. 우리가 실은 다 약한 존재지요, 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회와 직장 같은 거대한 시스템에 비해 한 개인이란 점점 더 왜소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약한 존재로 보고 행운을, 어쩌면 삶의 유일한 희망으로 대박을, 우연히 얻거나 발견하길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올라 있는 한국어 중엔 'fighting'도 있더군요. 전 대박보다 파이팅 편이랍니다.

처음 영어를 배우면서 접한 문장들 중에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것들이 있었어요. 저만 그런가요? 예를 들면 'Heaven helps'... 그거 있잖아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 저한테는 그게 간장공장공장장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장난 같더라고요. 하지만 이젠 알 거 같아요. 우연한 행운이나 다른 사람들의 막연한 도움만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의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타개하려는 사람을 세상이 돕는다는 걸 말이죠. 저는 그걸 씩씩함의 가치라 부르고 싶어요. 씩씩하다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굳세고 당당하다’라네요. 멋지지 않나요? 어떤 상황에서도 굳세고 당당하다는 거 말예요. 씩씩하기 어려울 때조차 씩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쉬운 건 아니겠지만요. 어느 종교의 경전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참을 수 있는 걸 참는 건 참는 것이 아니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라야 진정 참는 것이다. 문장구조 때문에 어떤 분들은 간장공장공장장이라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냥 말장난은 아닌 듯해요. 어떻게든 자기가 주체적으로 뭔가 해보려는 사람만이 도움도 받는 겁니다. 하늘은 그렇게 스스로 돕는 자만을 돕는 거지요.

일이란 결국 문제를 해결해가는 전 과정일 테지요. 씩씩하게 일한다는 건 주체적으로 일한다는 게 아닐까요? 일의 목표에 맞춰 자기 스스로 계획을 짜고, 데드라인을 설정하고, 그게 타당한지 동료나 상사와 의논하고, 과정을 공유하고, 피드백에 따라 필요한 수정과 보완을 하고, 일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며, 자기가 맡은 역할과 책임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당당하게 책임지는 거지요. 굳세고 당당하게 일한다는 건 오늘 실수나 잘못으로 질책을 받더라도 흔쾌히 인정하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 내일 더 나아질 거라 스스로 믿는 것이고, 이번 일의 성과가 의도한 만큼 나오지 않았어도 다음을 도모하자 주변을 독려하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최선이 뭘까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분투하는 거죠.

쭈뼛거리는 건 씩씩하지 않아요. 눈치 보는 건 씩씩하지 않아요. 시키는 일만 하겠다는 것도, 상사에 복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도 씩씩하지 않아요. 반론이 있다면 당당하게 말해야죠. 아니다 싶으면 굳세게 거부해야죠. 상대가 부장이건 사장이건 맞다면 받아들여져서 일의 진전이나 회사 분위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맞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씩씩하게 떠나야죠.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사장에게도 말할 수 있는 거죠, 당연히. 아니 사장이 뭔 대수겠어요? 상대가 대통령이건 교황이건 굳세고 당당하게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씩씩하게 일한다고 하면 박대성 화백의 인터뷰가 생각나요. 맞아요, 아이들이 모르고 작품을 훼손했는데 미술관 측에 아무 문제 삼지 말라고 했던 그 작가죠. 세상은 그를 왼손이 없는 무학의 화가, 한국화의 거장 뭐 그렇게 부르죠. ‘전시관에 다시 가서 보니 아이들 눈에는 미끄럼틀같이도 보이겠더라’고 하셨다는 게 인상적이어서 그 분 인터뷰를 찾아 꼼꼼하게 읽었더랬지요. 불편한 손을 원망해본 적 없냐는 질문에 몸이 불편한 팔자를 타고난 걸 내 인생의 보너스로 생각한다며 몸이 불편하면 게으름도 못 피우고, 이 세상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러다 보면 남이 안 듣는 것,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스티븐 호킹이 그렇지 않냐고. 어차피 이 세상은 영원히 사는 데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저는 그 마지막 문장에 굵은 밑줄을 그었답니다. 저는 저의 업인 광고와 제가 있는 농심기획이란 회사를 사랑하지만 어차피 광고도 농심기획도 제가 영원히 사는 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태도가 굳세고 당당하게 매순간 씩씩하게 일하는 바탕이 되어줄 거라 믿어요. 또 그게 어쩌면 지금 제가 있는 곳과 하는 일에 대한 최선의 예의 아닐까요?

행운은 기대하고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무엇인지도 모르겠어요. 대박을 바라고 싶은 심정이 될 땐 제인 케니언의 시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힘 센 두 다리로 일어난 것도, 달콤한 우유와 잘 익은 복숭아를 먹은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운 것도 생각해보면 다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었다는 걸. 언젠가 그렇게 못하게 될 거라는 것도요. 행운은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이미 받은 은혜,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축복 같은 거.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이란, 그 행운에 감사한 마음으로 파이팅 하는 겁니다. 굳세고 당당하게 말이죠.

저는 파이팅이란 말을 이렇게 뜻풀이하고 싶어요. 씩씩하자. 어떤 상황이든 굳세고 당당하자. 일과 삶의 모든 국면이 싸움은 아니겠으나 피할 수 없는 싸움에 임해서는 도망가지 말자.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fighting'을 저와는 다르게 설명해 놓았겠지만 뭐 어때요? 

옥스퍼드 사전 편집자는 그들의 자리에서, 저는 또 제가 있는 여기에서, 당신은 또 당신이 계신 거기에서, 파이팅!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황현산 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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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원흥(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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