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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으로 꾸는 꿈, 클로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1892-1984)”

클로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1892-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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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해 가장 ‘순수한 표현’을 찾아 헤맸던 말라르메와 서사로부터 음악을 해방하는 ‘순수한 소리’를 추구했던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서로 다른 예술을 겹칩니다. (2021.11.11)

프랑스의 상징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는 시에 등장하는 어떤 대상에 이름이 생기면 시를 읽는 즐거움이 반 이상 감소한다 말했습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라르메의 시를 들고, 상상에 상상을 거듭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즐거움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더는 문학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가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하고 헤매다 질려 버린 순간, 칼칼하게 돋아 나는 상징의 힘을 아는 사람이라면요. 시인이 대상을 지우고 그것을 암시하는 시어만 남길 때 우리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시인이 신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목신(牧神)의 오후는 1876년 출간된 말라르메의 전원시입니다. 목신은 반인반신인 신화 속 인물이지요. 신화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신 판을 피해 달아나던 님프 시링크스가 강가의 갈대로 변신해 버립니다. 그를 쫓던 판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갈대를 서로 다른 길이로 잘라 붙여 피리로 만들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팬플루트’ 혹은 ‘판의 피리’라 불리는 악기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판과 시링크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1617-1619) 

판의 신화를 바탕으로 말라르메는 「목신의 오후」를 썼습니다. 시인은 이 시를 프랑스 극장에 막간극으로 올리고 싶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극문학은 장르별로 성격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연극이 주류를 이뤘지만, 말라르메의 시는 서정, 서사, 극적인 요소가 모두 혼합되어서 이미 존재하는 분류법으로는 종류를 규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문예지, 르 파르나스 콩탕포랭에서도 시는 흥미롭지만 청중을 끌 만큼 줄거리와 세부 사항이 단단하지 않다며 게재를 거부했습니다. 말라르메는 신화를 있는 그대로 시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님프를 향한 범죄에 버금가는 지독한 갈망, 갈대를 잘라 버린 후 느낀 내적 갈등, 갈대로 만든 피리에 깊이 배인 사랑의 기억을 판이 독백하듯 홀로 읊조리는 시로 만들었습니다. 명확하게 사물을 이야기하고, 이해하기 용이한 시를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도통 뜻을 알 수 없는 시였겠지요.

관습으로 때 묻지 않은, 살아있는 시어를 추구했던 말라르메의 「목신」은 당시 문학계 기득권에는 배척당했지만, 수많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중에 젊은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많이 사용되어서 빛이 바랜 전통 화성 어법을 거부하고, 자연이나 심리를 모방하고 묘사하는 기능에서 음악을 해방해 음악의 고유한 기능을 회복시키기를 원했습니다. 한 소절만 들어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음악이 텍스트에 종속됩니다. 의미에 사로잡힌 선율로는 지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뷔시는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독특하고 섬세한 음악 색채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조했습니다. 말라르메의 시어처럼 말이죠. 음악이 가진 모호성으로 신화나 시가 전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펼친 이가 바로 드뷔시입니다.

시를 통해 가장 ‘순수한 표현’을 찾아 헤맸던 말라르메와 서사로부터 음악을 해방하는 ‘순수한 소리’를 추구했던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서로 다른 예술을 겹칩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드뷔시는 대가 말라르메의 시에 음악을 붙이며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감히, 목신이 부는 갈대 피리에 선율을 붙여 보았다고 말이죠. 음악을 들은 말라르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작곡한 전주곡은 나의 시와 딱 맞아요. 

아니, 섬세하고 불안하면서도 풍성하게 우울과 빛을 다루는 데는 시보다 훨씬 낫군요.  

존경합니다, 드뷔시 선생.”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에 음악을 붙이고 ‘전주곡’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원래, 전주곡은 독주 악기가 연주하는 작품을 주로 말합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무용 모음곡에서 작품을 시작하기 전, 준비하는 첫 악장을 ‘전주곡’이라 불렀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785-1850)는 전주곡과 푸가를 짝을 이뤄 사용했습니다. 엄격한 형식으로 작곡된 ‘푸가’를 연주하기 전, 자유로운 분위기로 작품을 시작하는 대조적인 악장을 ‘전주곡’이라 불렀지요.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음악에는 전주곡보다는 ‘교향시’가 더 어울리지만, 드뷔시는 고정관념을 깨는 첫 단계로 ‘전주곡’이라는 이름을 선택합니다. 시를 묘사하기보다 음악을 통해 시가 가진 새로운 면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드뷔시의 작품을 들은 평단은 혹독한 비평을 쏟아 냈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화성 법칙을 파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조성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악표현으로 대중이 길을 잃는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작곡하기에는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들을 것이 없는 빈 껍데기 음악이라 했습니다. 길을 잃은 것은 대중일까요, 아니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비평가일까요?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첫 소절, 플루트 독주 부분

전주곡을 시작하는 플루트 첫 음은 올림 도입니다. 플루트에서 손가락으로 구멍을 하나도 막지 않고 낼 수 있는, 악기 자체가 가진 원초적인 음이죠. 가장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소리로 음악을 시작한 플루트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유연한 아라베스크 곡선을 그립니다. 자신을 피해 달아나다가 갈대로 변해 버린 시링크스를 꺾어 만든 피리로 판이 연주하는 음악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세상 그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신비로운 주제 선율이 들릴 때, 우리는 드뷔시를 통해 상상이 구현되는 기적을 맛보게 됩니다. 목신이 연주한 음악이 드뷔시가 작곡한 선율일 리 없지만, 상관없습니다. 플루트 소리에 매료된 우리는 순식간에 고대 신화 속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정교하게 반짝이는 아라베스크 선율은 작품 내내 변형되며 등장할 때마다 목신을 불러냅니다. 여기에 연기처럼 기화하는 하프의 화성, 날아갈 듯 가벼운 현악기, 태곳적 분위기를 소환하는 심벌즈가 더해지며 신비는 더욱더 고조되고 풍성해집니다.

말라르메는 판의 독백을 백 십 개 시행으로 표현했습니다. 드뷔시는 시를 백 십 개 마디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맞춘 것은 이뿐입니다. 구체적인 줄거리를 생략하고 모호하게 감정을 토로하는 말라르메의 시처럼, 드뷔시는 시어를 넘어 목신을 둘러싼 분위기를 음악으로 그립니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끝없이 도주하는 조성, 증 6도를 비롯해 7도, 9도, 11도로 펼쳐지는 화성과 갈수록 확장되는 리듬이 만드는 공간감은 미세하고 우아하게 균형을 맞추는 목관악기 색채와 함께 신비를 드러내는 드뷔시 고유의 언어가 됩니다.

제도권 문학계에서 거부당했다고 생각한 말라르메는 자비를 들여 『목신의 오후』를 출판합니다. 장식과 활자 디자인에 특히 공을 들여 고급스러운 책으로 만들었죠. 여기에 에두아르 마네(1832-1883)가 삽화를 넣었답니다.


마네가 그린 『목신의 오후』 삽화,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당시 문학과 사회에서 위기를 느낀 말라르메는 절대적 기준과 관습을 약화하는 ‘상징’을 통해 창조를 위한 문을 열었습니다. 「목신의 오후」는 다양한 예술 장르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말라르메가 마련한 상징과 은유의 예술 위에 비밀스러운 감각을 꿰뚫는 음악과 그림, 무용이 겹쳐졌습니다. 취기와 꿈 사이에 유보된 목신의 갈등은 드뷔시 음악과 함께 공감각적 에너지를 드높였고, 바슬라프 니진스키(1889-1950)는 이 작품을 무용으로 표현하며 서로 다른 매체로 함께 빚어내는 상징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드뷔시의 전주곡에 맞춘 니진스키의 고대 그리스 화병을 뚫고 나온 듯한 신비한 안무를 보세요. 


“목신의 오후 전주곡”, 니진스키 안무, 춤(1912)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너무도 내면적인 드뷔시 음악 안에서 열정으로 흔들리고, 신경질적으로 동요하는 우리 자신의 연약한 영혼을 발견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뷔시가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신화 속 분위기를 드뷔시의 음악으로 상상하고, 마네의 삽화와 니진스키의 느리고 유연한 춤사위로 감상하다 보면 알 듯 말 듯한 말라르메의 시 속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망나니 목신, 판에게 한 걸음 가까워진 느낌이 듭니다. 스스로 꺾은 갈대가 다시 꽃으로 피어나기를 희망하는 판의 후회와 간절함에 나의 갈등과 갈망이 은밀히 겹쳐지면서요.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예술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마음을 어렴풋이 꿈 꿔 보는 것은 어떨까요?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음악과 함께 감상해 보세요. 


그러나, 아서라! 이런 비의(秘義)는 은밀한 이야기 상대로

속 너른 쌍둥이 갈대를 골랐으니 푸른 하늘 아래서 부는

갈대 피리는 뺨의 혼란을 저 자신에게 돌려,

한 자락 긴 독주 속에 꿈을 꾼다, 우리가 

주변의 아름다움을, 바로 그것과 우리의 순박한 노래 사이

감쪽같은 혼동으로, 기쁘게 하는 꿈을, 

내 감은 눈길로 따라가던 그 순결한 등이나

허리의 흔해빠진 몽상으로부터,

한 줄기 낭랑하고 헛되고 단조로운 선을

사랑이 변주되는 것만큼 높이 사라지게 하는 꿈을.

그러하니, 도피의 악기여, 오 얄궂은 피리 시링크스여,

부디 호수에 다시 꽃피어나, 날 기다려라!

_스테판 말라르메, 「목신의 오후」 중 일부, 『시집』, 스테판 말라르메 저 / 황현산 역 | 문학과 지성사, 2005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몬트리올 관현악단, 샤를 뒤투아 지휘, 1990 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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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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