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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의 리걸 마인드] 변호사와 자기만의 방

<월간 채널예스>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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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변호사에게 자기만의 방은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 그런 낭만적인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2022.05.02)

일러스트_키박 

내가 변호사가 된 후 최초로 감동받았던 순간은 법무부에서 변호사시험 합격 증서를 받은 때도, 변호사협회로부터 변호사 등록증을 받은 때도, 변론을 위해 처음 법정에 출석해 변호사임을 밝히며 대리인 자리에 앉은 때도 아니었다. 내게 있어 변호사 됨을 진실로 느낀 가장 극적인 순간은 법무법인에 출근하여 처음 내 방에 들어선 때였다. 

아침에 출근하면 나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곤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나만의 컴퓨터를 켜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보통 인터넷 서핑을 실컷 하는 것으로 하루를 여는데, 그것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일을 시작하기 싫으니까). 대기업에서 회사로부터 자기만의 방을 얻으려면 어떤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지 나는 알고 있었다. 요즘엔 대기업에서도 직위가 사라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을 거쳐 이사나 상무 같은 임원이 되어야만 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과정을 거치는 데 적어도 20년 세월을 보내야 한다.

방에 들어가는 과정만을 보자면, 나는 겨우 대리 직위에서 회사를 중도 탈락한 후 ‘조직 부적응자’로 로스쿨에 입학한 다음, 마침내 변호사가 되어 자기만의 방을 얻는 우회로를 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처음 갖게 된 로펌 안 나의 방이 내게는 연봉 수억을 줘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란 실상 작가가 아닌 누구에게라도, 칸막이 사무실의 비굴한 노동자로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순간 선망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일반적인 사무실은 모두가 사각형 네 귀퉁이 중 한쪽에 컴퓨터 화면이 놓여 있어서, 그 네모난 공간(‘큐브’)을 지나가는 모든 타인이 나의 컴퓨터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그 사무 공간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우리가 일하는 무대라고 할 수 있는 기역 자 책상 역시 관리자의 섬세한 설계에 따라 등장했다.

현대적인 ‘효율성 책상’의 특징은 여기서 일하는 사무원과 그가 다루는 서류들이 숨을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관리자 계층은 이를 좋아했다. 슬며시 복도를 지나가면서 직원들이 뭘 하고 있는지 쉽게 살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서류 더미는 이제 컴퓨터로 대체되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나 말고는 아무도 엿볼 수 없는 독립된 변호사 방은, 비록 사무 노동자인 변호사라도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기능한다. 이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나는, 비록 일정한 근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근로를 제공하는 시간 동안 어떻게 일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호사가 아무런 제약 없이 일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이나 의뢰인이 관리하는 기일과 기한에 맞추어 자기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제약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은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어야만 자기만의 공간을 받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임원이란 원칙적으론 근로자가 아니라 위임받은 업무를 수행하고 그에 따라 책임을 지는 관리자로서, 안정적인 신분을 보장받지 못한다. 변호사 역시 자기만의 방을 갖는 대신 온전히 자기 책임 아래 업무를 수행하고 무한 책임을 진다는 사실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 책임은 나중 문제고, 처음 내 방을 갖게 된 얼마간 나는 일이 없는 평일 저녁에도 휴일 낮에도 내 방에 출근해,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집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방을 꾸미기도 하고, 멋진 블루투스 오디오를 구입해 장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로펌에서 1년 차 변호사에게까지 별도의 방을 제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변호사 업무 자체가 갖는 독립성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한 배려의 의미가 있다. 보통 법원에 제출하기 위한 서면 작업을 위해 그에 맞는 업무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의뢰인과 통화를 하거나 간단한 미팅을 할 때 내밀한 대화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큰 것 같다(로펌마다 사정이 다르나, 여러 명의 의뢰인과 회의를 할 땐 회의실을 이용하지만 소수의 의뢰인과는 간단히 자기 방에서 회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업무 자체가 갖는 독립성과 업무를 수행하는 자의 비밀을 보장하는 것이 노동자인 변호사 업무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더 낫다는 것이 대표 변호사의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 가설이 현실에서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는 당장 나를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일하는지 노는지 감시하지 않는 환경에서, 혼자 앉아 딴짓을 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주변을 보면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문제임을 즉시 확인할 수 있다(다들 낮에는 놀다가 밤에 일하면서 얼마나 바쁜 척을 하는지). 어느 누구도 내 컴퓨터 화면을 보지 않는다는 안도감은 일과 시간에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게 한다. 물론 성실한 변호사는 미리미리 서면을 써두겠지만, 번아웃에 빠져 있거나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보통’ 변호사라면 자기만의 방에서 태업의 기회를 갖기가 훨씬 쉬운 것이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쳐, 일리노이주 시서로에 있는 웨스턴 일렉트릭의 호손 공장에서 행동심리 연구자들이 조명 실험을 했다. 조명 밝기의 변화가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내려는 실험이었다. 연구자들은 측정 가능한 인과 관계가 뚜렷이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략)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밝기는 생산성과 아무 관계가 없어 보였다. 어떤 때는 밝은 조명이 생산성을 높였지만 어떤 때는 아니었다. 수많은 가설 수정과 재실험 끝에 연구자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조명의 강도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사실(지켜볼 경우에 생산성이 높아졌다)이라고 결론 내렸다.**

얼마 전 변호사 친구가 여러 변호사와 함께 개업한, 서울 서초동 로펌 사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 사무실은 변호사 방을 모두 없애고 커다란 공용 사무실을 열 명 가까운 변호사가 공유하며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반 회사의 공간 구조를 변호사 사무실에 도입한 것이다. 반면 의뢰인을 만나는 회의실은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우아하게 꾸며두었다. 고용 변호사에서 파트너 변호사가 되어 자기 사업을 하는 친구 입장에서는, 내부 고객인 고용 변호사 대신 외부 고객인 의뢰인을 위한 공간에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한 것이고, 서초동의 높은 임대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육지책을 짜낸 것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 회사만이 아니라 새롭게 생겨나는 여러 로펌이 비슷한 사무실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다. 서초동 작은 로펌에서부터 변호사를 위한 자기만의 방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고용된 변호사에게 단독 방을 주지 않고 두세 명의 변호사가 방을 함께 쓰게끔 하는 로펌도 적지 않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한때 변호사에게 자기만의 방은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 그런 낭만적인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친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서초동 거리에 나와 보니 여전히 법원을 오가는 젊은 변호사들이 보인다. 저들이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작은 큐브 속 사무실에 들어가 다시 서면을 쓸 것이란 생각에, 그들이 조금 더 쓸쓸하게 보였다.



* 니킬 서발, 『큐브,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 이마, 2015, 64쪽

** 니킬 서발, 『큐브,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 이마, 2015, 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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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양지훈(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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