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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짧은 소설] 너무 아름다운 날

<월간 채널예스>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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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굳게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J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고 앉아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너무 아름다운 날이었다. (2022.06.07)


P는 세상 근심을 모두 짊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하얀 파도가 높게 이는 7월의 경북 울진 고포 바다. 해변이 보이는 카페엔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바람을 느끼는 소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포니테일 남자. 쿵짝짝 쿵짝 리듬에 맞춰 왈츠를 추는 연인. 세 마리 개와 뒤엉켜 잔디밭을 뒹구는 선글라스 남자. 그 모습을 수채화에 담는 붉은 모자의 여자. 평온한 얼굴로 옛날 소설을 읽는 할머니와 맥주 거품을 수염에 묻히며 호탕하게 웃는 할아버지까지.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었지만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J가 P를 눈여겨본 건 P가 먼저 J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J가 카페에 들어갔을 때 구석에 앉아 있던 P는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거칠게 밀리며 끼익, 소리가 났고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P에게, 이윽고 그가 보고 있는 J에게 향했다. P는 떨리는 눈으로 J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물었다.

“혹시 나를 알지 않소?”

당혹스러웠으나 놀라지 않았다. P는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J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P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면서도 J의 얼굴을 응시했다. 확신에 찬 눈동자가 흔들리며 안개가 끼는 게 느껴졌다. P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계절과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옷에 창백한 얼굴. 턱을 괸 우울한 남자는 카페에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입구를 쳐다봤고 누군가 지나가면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게 두려워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J는 한 손엔 맥주, 다른 손으론 나초가 든 접시를 들고 P에게 다가갔다. 그는 경계하는 눈으로 흘낏 불청객을 보고 두 손으로 물잔을 움켜쥐었다.

“선생님. 기다리는 분이 있으신가요.”

“저리 가시오. 나는 이제 속지 않소. 허깨비 같은 것들.”

“무슨 말이신지.”

“내가 모를 것 같나요? 저기 컵을 닦고 있는 주인은 학교 다닐 때 친구. 춤추고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시달렸던 이모. 벤치에 앉은 사람은 오래전에 죽은 내 아버지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내가 아는 사람들입니다. 엉성한 대본을 받고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고 있지만 난 알아요. 이 사람들이 한 번에 세 마디 이상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모두 친절해 보이지만 정작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죠. 내 행동에 단순하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역할을 맡은 어설픈 배우일 뿐이니까.”

“선생님. 제게 선생님을 알지 않느냐, 물으셨죠. 우리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요.”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댁이 그 사람인 줄 알았소. 헷갈린 거지. 하지만 당신. 분명히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만났을 거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여기는 내 꿈속이니까 내 기억에 없는 건 존재할 수 없거든.”

P는 반쯤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만나야 해. 그 자를 만나서 계약서를 찢어야 해.’

“선생님. 저는 이미 세 마디 이상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도 마침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만날 사람 기다리며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P는 눈을 질끈 감고 팔짱을 끼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실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봤다. 쨍하게 열린 파란 배경에 입체적인 뭉게구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시선을 떨군 그는 물잔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꿈에서 깨고 싶소. 이런 휴가 같은 날들. 지겹고 괴로워요.”

P는 챙이 넓은 잿빛 모자를 눌러쓰고 빛이 넘실대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해변과 해안 절벽, 하염없이 고요한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외따로 선 높은 절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는 저기. 도서관이 있어요. 지금은 꿈이라서 없지만.”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는 자리는 황량했다. 바위들과 멋대로 자란 앙상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P의 눈은 절벽이 아닌 더 먼 곳, 더 먼 시간을 향해 있는 듯 보였다.

“그때의 내겐 잠이 필요했어요. 잠들 수 있는 마음의 평화도 필요했고요. 하지만 현실은 끔찍했지. 그야말로 엉망진창. 다 잃었고, 다 무너졌어. 삶을 짜내고 짜내도 한 방울의 희망도 흘러나오지 않는 완전히 망한 삶. 그게 내 삶이었으니까.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절망뿐이라면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하다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여기 고포에 온 겁니다. 이곳은 어이없을 정도로 아름답더군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해변. 먼 곳에서 온 배들과 뱃사람으로 활력이 넘치는 항구. 먹고 마시는 이들로 가득한 카페는 근사했죠. 찬란한 빛 속에 앉아 웃고 떠들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들이 느끼는 자유와 행복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에서 오는 체념과 고립감. 처음에는 억울하다는 감정으로 몸에 열이 올랐는데 이내 차갑고 차분한 포기로 이어지더군요. 그때 그 사람이 손수건을 건네며 다가왔어요. ‘왜 울고 있나요?’ 말을 걸면서.”

P는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음성과 표정을 드라마틱하게 바꿔가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처음엔 사기꾼인 줄 알았어요. 턱시도를 입고 위아래 잔뜩 꾸민 모습으로 ‘피곤해 보이시네요.’ ‘잠은 좀 주무십니까?’ ‘행복해지고 싶나요?’ 말을 붙이는 그가 성가셨죠. 나는 나아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행복이라니, 그런 단어는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자를 당겨 가까이 다가와 집요하게 속삭이더군요. ‘나는 당신의 얼굴을 잘 알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 거울 속 내 얼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내 얼굴을 봐요. 환하지 않나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즐거워 보이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랍니다. 비밀은 도서관에 있어요. 사서를 만나 이야기를 추천해 달라고 하세요. 그 이야기가 당신을 바꿀 겁니다.’ 활짝 웃고 있는 턱시도의 얼굴. 사람 표정이 저렇게 밝을 수 있나, 믿을 수가 없었죠.”

도서관이라고 말하고 P는 입을 다물었다. J는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수많은 장면이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절벽 위 커다란 범선 모양의 도서관. 먼 옛날 그 자리엔 등대가 있었다. 평생 수평선과 하늘만 바라보던 등대지기. 그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려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한 권 두 권. 일 년 이 년. 등대지기가 등대에서 내려왔을 땐 책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책을 보관할 도서관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도서관의 전설을 심드렁하게 들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P는 놀랐다. 밖에서 봤을 때는 아담해 보였는데 내부는 넓었던 것이다. 특히 천장이 높았는데 천장에 닿은 책을 보기 위해 고개를 꺾어야 했다. 마호가니로 만든 천장 높이의 책장은 몇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먼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책장은 수십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고 천장까지 닿는 사다리가 책장 사이에 놓여 있었다. 책들은 종류별 크기별로 분류되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희귀한 고서적들은 유리문이 달린 책장에 보관되고 있었다. P는 본능적으로 깊게 호흡했다. 펄프냄새와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가슴을 적시는 기분. 사서는 사다리 맨 끝에 서서 책을 꺼내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턱시도를 발견하고 느리고 꾸준하게 한 발 한 발 밑으로 내려왔다. 그는 두껍고 흐린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구부정한 몸을 느리게 움직여 책이 담긴 수레를 끌고 다가왔다.

사서와 마주 앉은 P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사서가 마치 고해 성사를 받는 신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할 수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였다. 턱시도가 ‘괜찮아요.’ ‘다 말씀하세요.’라고 부추겼기 때문일까? 그동안 누구에게라도 쏟아놓아야 할 정도로 말이 쌓여 있던 걸까? 사서는 별다른 대꾸 없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간간이 음, 음이라고 추임새만 넣었는데 P는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몽땅 털어놓았다. 사서는 타자기를 꺼내 P에게 꼭 맞는 이야기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탁탁. 타다다닥. 탁. 고요한 도서관에 타자기 소리가 영롱한 종소리처럼 울리고 또 울렸다. 사서는 빼곡하게 적힌 두 장의 종이를 세 번 접은 뒤 P에게 내밀었다. 도서관 문을 나설 때 턱시도가 말했다.

“이야기를 소리 내어 두 번 읽고 눈을 감으세요. 이야기가 감은 눈 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며 고요히 잠을 청하세요. 그러면 이야기가 눈과 코와 입과 머릿속으로 흡수될 겁니다.”

P는 그 밤이 떠오르는 듯 눈을 감고 깊은 숨을 쉬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밤. 오랜만에 단꿈을 꿨어요. 유년 시절로 돌아갔고,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만나 아름다운 여행을 떠났습니다. 몇 가지 사건 사고를 수습하고 크고 작은 실수까지 수정한 완벽한 여행이었죠. 미운 사람에게 복수했고 부러운 사람보다 높아졌으며 그가 나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희열을 느꼈습니다. 아, 정말 행복한 꿈이었죠. 꿈에서 깨어났을 때 안전한 느낌에 놀랐습니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었거든요. 하지만 이내 슬퍼지고 말았죠. 현실은 바뀐 것이 없었으니까.”

P는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때 끝냈어야 했어요. 나는 현실의 비루함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매일 도서관을 찾아 사서를 만나야 했습니다. 사서는 내가 원하는 꿈을 적어줬습니다. 내 실수. 내 소원. 내 분노. 내 사랑. 모두 꿈속에서 해결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긴 꿈을 원하게 되더군요. 밤에 꾸는 꿈이 아니라 아침과 오후, 저녁과 다음 날까지 이어지는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어요. 한 계절 아니 일 년 이 년 계속 머물고 싶었어요. 사서는 말했습니다. ‘긴 이야기를 써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거를 지불해야 해요.’ 과거? 지나간 일? 기억도 안 나는 사건 사고들? 실패로 점철된 오염된 일기들?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들이었죠. 가져간다면 나쁜 기억도 사라지고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습니다. 나는 사서에게 과거를 팔았죠. 사서가 긴 이야기를 타자기로 쓰고 있을 때 턱시도는 계약서를 작성해서 내밀었습니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서명을 했어요. 내 관심사는 오직 사서가 쓴 달콤한 이야기였으니까. 완벽한 꿈의 세계 속으로 빨리 다이빙하고 싶어서 온몸이 간지러울 정도였죠.”

P는 손을 내밀어 J의 맥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P는 옷소매로 입가를 닦아냈다.

“만약 그때라도 멈췄더라면, 그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봤더라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내내 자신의 손과 바닥만 보며 말을 하던 P는 고개를 들고 J를 바라봤다.

“끝없는 고통으로 이어진 현실. 끝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소?”

J는 미소를 지으며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글쎄요. 답하기 어렵군요. 일단 저는 고통이든 행복이든 끝이 없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지. 그래야 재미있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

P는 J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가 불꽃에 녹아가는 양초처럼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다시 삶에 적응해 보려고 했지. 우연과 변수로 가득한 날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세계.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섭고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이 너무 더디고 따분했어. 걷는 것. 하나씩 밟아 나가는 것 모두 견딜 수 없게 됐지. 무엇보다 나는 몸과 마음에 닿는 현실의 감각이 끔찍했어. 위협적이고 공포스럽기만 했지. 생각해 봤어. 왜 사는지. 결국 꿈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렇다면 이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을까? 실패하는 습작의 날들을 살 필요가 있을까? 내가 가진 모든 날과 달을 바꾸어 바로 꿈을 사면 되지 않을까? 나는 선택했어…. 평생 꿈을 꾸게 해달라고. 자, 보시오.”

P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여기가 내 꿈속이라오.”

소리 내 웃으며 J가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꿈이라면 깨지 않는 것도 괜찮겠는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고 지금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나는 몰랐어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나쁜 것을 찾아낸다는 것을. 아무리 좋아도 지겨워진다는 것을. 좋은 것이 싫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내 앞을 가로막는 것도 없는, 날마다 완벽한 어느 날 어느 순간 알았습니다. 내가 만든 꿈의 이야기는 나를 해하거나 놀라게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의 뻔한 원리를. 몰라야 되는데 깨닫게 된 거예요. 나는 이 세계의 신이자 유일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다 시시해지더군요. 배는 금방 불렀고 사랑과 친절은 다디단 사탕처럼 더는 입에 넣을 수가 없었어요. 복수조차 재미가 없었어요. 평생을 증오하던 그 사람. 내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바닥에 쓰러져 엉엉 우는데 그 모습이 모두 연기처럼 보였으니까요. 그리워지더군요. 슬프고 쓸쓸하고 억울하고 아팠던 날들이. 어둠과 두려움. 실패와 실망 수치와 부끄러움을 한 번만 더 맛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나는 턱시도 입은 그 자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 겁니다. 그와 맺은 계약을 취소해야 합니다. 내 과거, 내 시간을 마음껏 가져가도 좋으니 환하고 밝은 이 꿈에서 깨게 해달라고 말해야 해요.”

P의 말을 듣고 J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P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자신에게 속말을 하게 하는 J가 궁금해졌다.

“대화를 하자 해놓고 내 말만 많이 한 것 같네요. 당신이 만나려는 사람은 누군가요?”

J는 나초 한 개를 입에 집어 넣고 오도독 소리가 나게 씹은 뒤 맥주를 연거푸 세 모금 마셨다. 맥주가 목을 넘어가며 꿀럭꿀럭 소리가 났다. 느슨하게 풀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야무지게 잠갔다.

“아, 시원하군요. 당신의 말을 듣느라 목이 마른 줄도 몰랐어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 고객 얼굴이 가물가물하네요. 약속을 취소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문서로 서로 합의한 사안이지만 계약서에는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도 있어서요. 만나서 그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한 번 더 의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금방이라도 생을 포기할 것 같은 얼굴로 이 카페에 앉아 있었어요. 활기를 잃은 얼굴. 빛을 잃은 눈동자. 그늘로 뒤덮인 차가운 몸과 마음. 나는 그런 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견디질 못해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죠. 아름다운 바다를 품은 고포는 그런 자들로 가득했답니다. 실패한 인생. 절망에 빠진 사람들. 결국엔 그들 모두 새 삶을 얻고 다시 행복을 찾았습니다. 한없는 꿈속에서, 눈물 없고 슬픔 없는 영원히 밝고 맑은 세계 속에서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어리석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자는 다 잊어버린 겁니다. 꿈꾸기 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희망 없고 절망만 남은 낭떠러지였다는 것을요.”

J는 P의 눈을 깊숙하게 바라봤다. 아까부터 계속 투덜거리던 P는 긴장한 얼굴로 J를 봤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눈과 표정. 그린 듯 부드럽게 올라가는 미소를 머금은 입꼬리. J는 말했다.

“그 사람. 과거를 모두 잃어 생각도 못 하겠지만 무기한 장기 계약을 한 자는 그 사람의 지나온 모든 날과 기억을 하나도 남김없이 이야기에 바쳐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꿈에서 벗어나 깨어났을 때 쇠잔해진 육체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죠. 그 사람이 만약 계약서를 찢고 꿈에서 벗어난다면 우선 무사히 잠에서 깨어날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혹 깨어난다고 해도 그는 지난날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테고 평생을 자면서 늙었기 때문에 남은 날도 한 줌밖에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모르겠죠. 그 때문에 나는 그가 왜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후회와 어리석음은 인간의 영원한 양식이니까요.”

J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마셔 깨끗하게 잔을 비웠다.

“선생님. 만약 선생님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 뜻대로 해줘야 할까요. 아니면 설득해서 완벽한 꿈의 세계에 순응하며 살도록 한 번 더 도와줘야 할까요.”

P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굳게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J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고 앉아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너무 아름다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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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용준(소설가)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장편 소설 『바벨』, 『프롬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썼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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