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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서재

이시형의 서재 의사
“중1 때였어요. 공부벌레 삼촌한테서 선물을 받았는데 『50가지 유명한 이야기Fifty Famous Stories』라는 책이었어요. 제가 읽은 책은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해서 뉴턴으로 끝나는 책이었어요. 영어로 된 책을 처음에는 뜻도 모르고 줄줄 외우고 다녔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어 웅변대회를 휩쓸고 다니고 있었고…. 이 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중2가 된 어느 날, 방 두 개에 열세 식구가 사는 우리 집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 들어앉은 걸 봤어요. 삼촌하고 형은 대단한 모범생들이었는데, 나는 촌구석에서 공부는 하기 싫고 할 일이 없어서 그 전집을 독파했어요. 그 다음에 또 읽고. 근데 1권이 『파우스트』였던 그 전집을 읽고 나서 소화를 다 못 시키니까 다음 독서생활이 지장이 왔어요. 반도 이해를 못하는데 무턱대고 글자를 읽었으니까요. 뼈아픈 실수였어요. 때와 나이에 맞는 책 읽기가 따로 있고 함부로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건데, 그러고 나서 독서에 취미를 상당히 잃고 말았으니 조금 아픈 기억이지요.”

“학교 다닐 때는 학년이 미국식으로 봄 다 지나갈 때 끝났어요. 그때 또 삼촌이 들고 온 『사카모토 료마』라는 책을 읽었어요. 사무라이에 관한 책인데 더운 여름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이틀간 우느라 내려오지를 않았어요. 너무도 눈물을 많이 흘렸지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카모토 료마는 그때부터 제 멘토가 되었어요. 사실 활약한 햇수도 몇 년 되지 않아요. 자객에게 암살당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천 년의 역사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여전히 여겨지지요.”




글쓰기 교사가 되어준 헤밍웨이와 이광수

“대구로 대학을 다니러 갔는데 아르바이트하던 곳 앞에 미국문화원이 있었어요. 거기 가면 찬물을 마시고, 선풍기 바람을 쐴 수 있었어요. 근데 명색이 문화원 안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뭐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지요(웃음). 그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눈에 들어오더란 말입니다.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타기도 전이었어요. 내가 읽는 걸 보고 문화원 원장이 재미있느냐고 물어요. 재미있다고 했지요. 원장도 헤밍웨이의 대단한 팬이었어요. 철학적인 것까지는 파악이 안 될지 몰라도, 문체가 간결하고 쉽고 읽기에 좋았어요. 원서를 보면 관계대명사가 거의 없을 정도예요. 헤밍웨이는 어느 지방에서 기자 생활을 했는데 편집장에게 기사를 계속 퇴짜를 맞았더랍니다. 평생 그 편집장에게 이를 갈면서 쓰다 보니 그렇게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이 나오게 된 거예요.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그 문화원 원장과 둘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내가 얼마나 헤밍웨이를 좋아하느냐면 킬리만자로에서부터 스페인 투우장까지 헤밍웨이가 다녔던 발자취를 다 밟아보고 다닐 정도였다니까요. 이렇게 짧고 어렵지 않은 문장을 써야겠다고 흉내 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제 집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거예요. 비슷한 이유로 춘원의 문제도 좋아했습니다.”

“제가 청년기를 넘긴 후에 이문열이 등단했어요. 초기작으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보고 이런 문장가가 한국에 나왔구나 생각했어요. 작가의 고향 사람들이 자기들 얘기를 나쁘게 썼다고 비난을 해서 곤욕깨나 치렀다고 하지요(웃음). 아주 촌에서 자라나야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이 소설에 있어요. 최인호의 『해신』도 걸출해요. 작가가 비석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 사진 한 장을 보고 착상이 들어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감탄을 하며 읽었어요. 작가란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역시 최인호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잊혀지지 않는 영화로는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꼽겠어요. 잊히지 않는 이유가 영화가 좋아서도 있겠지만 따로 있어요. 대전에서 공군 부대로 입대하러 가는 길인데 주머니에 요즘 돈으로 딱 5천원이 들어 있었어요. 밥을 먹거나, 버스 삯을 치르거나, 영화를 보거나 셋 중에 둘도 아니고 딱 하나만 할 수 있었지요. 마침 터미널 앞 극장에서 이 영화를 하기에 그냥 입장료를 치르고 들어가서 봤지요. 어찌 버스는 얻어 탔는데 부대에 도착하니 저녁밥을 안 줘요. 군대가 이런 곳이다, 알려준다고 그랬답니다. 신고식이었던 셈인데,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 기억이 나요.”


느긋한 배짱을 무기 삼아 치유의 시대로 나아가기

“책을 고를 때는…. 보고 싶은 책의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를 담은 책을 점찍어 둬요. 그러고는 저자가 누군지 살피고, 목차 보고, 한 장 정도 읽어보고 준비하고 정성을 들이고 하긴 하는데, 그러면 뭐해요? 대개는 다 사는 걸.(웃음) 서재에 이름을 붙인다면 긍헌재라고 하겠어요. 제 대학 4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붙인 이름이에요. 성균관 출신의 아버지 호가 긍헌이었거든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나를 있게 했지요. 선마을에 억새풀을 많이 심어놓았어요. 그 날카로운 잎, 선비의 붓처럼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늘 맑게 지켜가자고 다짐을 두고 있어요.”

이시형 박사는 40대 후반에 건강에 대단히 큰 위기를 맞이했다. 디스크, 관절염, 서맥 등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사람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 노릇을 하다가, 정작 제 몸 관리를 못하다니 회의가 왔다. 생활을 바꾸어 몸을 치유해보자는 생각이 자연의학 공부로 이어졌다. 바쁘게만 살다 보니 코앞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느리게, 지팡이를 짚고 걷다 보니 세상이 너르게 보였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에 제1의 문화 충격을 받고, 돌아온 한국에서 제2의 문화 충격을 받은 터였다. 너무 달라지고 너무 바빠져 있었다. 충격의 와중에 찾아온 병마에 엎드려서 『배짱으로 삽시다』를 일주일 만에 썼다. 그것이 30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파르게 올라간 산업화의 정점에서 언젠가는 정지가 걸린다고 예측했다. 5년 전쯤 웰빙 열풍이 몰아닥쳤을 무렵에, 그때로부터 5년 후면 힐링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리언스 선마을’을 강원도 홍천에 세우고 촌장이 되었다. 이번에 선마을 이야기와 더불어 시골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담아 『이젠, 다르게 살아야 한다』를 펴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공부벌레였던 삼촌이나 형과 달리 일기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학교 가서 그냥 꿀밤 한 대 맞으면 끝나고 말 걸, 뭐하러 촛불 아래 모기에 뜯겨가며 그 짓을 하느냐며, 낮에 풀 뽑고 멱 감는 게 촌놈 일상이라고 했다. 도시에 살아도 그런 촌놈 의식이 소심한 미움과 질시와 경쟁에서 그를 보호해주는 도구였고, 이제 바삐만 살던 시절에서 벗어나자고 설파한다.

이시형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고 무거운 짐을 든 임산부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한국, 각박해진 한국을 끊임없이 치유하고 싶다. 박사는 경제적으로 못 사는 나라가 아닌 한국이 지나친 분주함과 치열함과 탐욕이 버무려져 가난과 여유 없는 삶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오늘도 선마을을 가꾸고 아직도 다 풀어놓지 못한 치료의 언어를 모니터에 찍어 넣는다.

글 / 문은실 사진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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