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을 맞아 짧은 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옆 호텔에 묵으며 낙산사도 둘러보고 통통한 대게도 먹었다. 편안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조식 뷔페를 먹으며 남편과 오래전 결혼식 날을 회상했다.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결혼식을 떠올리며 좋은 이야기보다 아쉬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냥 결혼식 하자.’라고 결론을 냈던 그 지점에 대해 오래 이야기한다. '결혼식은 부모님을 위한 행사’라는 말과 ‘일생에 한 번 뿐’ 이라는 말에 무력해졌던 과거의 우리를 떠올리며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다.
결혼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신부 화장과 웨딩드레스다. 초면인 메이크업 선생님에게 내 얼굴을 맡기고 안절부절했던 그날의 아침이 생생하다. 얼굴에 드리워진 커다란 속눈썹 그림자를 보고 당황했던 나, 그리고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표현하지 못했던 내가 생각난다. 웨딩드레스도 마찬가지다. 심플한 흰 원피스를 입고 싶었지만 그런 옷은 ‘재혼용’이라는 웨딩플래너의 말에 소심해져 ‘초혼용’ 드레스 중에 가장 심플한 것을 골랐다. 재혼용이면 어때서. 아니,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다고. 정신 차려보니 나는 불편한 드레스에 두꺼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했다.
얼마 전 클럽하우스에서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에 들어갔다.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은 아동문학가 김지은 선생님께서 만든 자리였는데 각자 어린이일 때 읽었던 책 특히 여자가 주인공인 책을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곳이었다. 공주 이야기가 싫어 공주가 안 나오는 책을 찾아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모험 이야기 주인공이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에 분노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읽은 책을 떠올렸다. 그림책 속 많은 여자 주인공은 공주였고 그들은 왕자를 기다렸다. 결국 왕자를 통해 행복을 찾았는데 그 행복이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사는 것이었다. 왕자를 만나는 여정은 책마다 다양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목소리를 잃은 여자도 일곱 난쟁이와 우정을 나누던 여자도 모두 왕자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한 번쯤 ‘왜 여자의 행복은 결혼이 전부인 것처럼 그렸을까?'라고 생각해 봤을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은 없다.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에서 그림책 『노를 든 신부』를 알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외딴섬에 사는 주인공 소녀는 결혼하여 섬을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본인도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부모는 기뻐하며 드레스와 노를 한 개 마련해 준다. 그러나 한 개의 노를 가지고 바다를 건널 수는 없었다. 여자는 다른 쪽 노를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노없이 움직이는 커다란 배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두 여자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한 개의 노를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꼭 바다를 건너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원한다면 배를 타는 것 말고도 바다를 건너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여자의 의연한 표정이 정말 멋지게 그려져 있다.
다시 한번 나의 결혼식을 돌아보면 내가 두려웠던 것은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도 일생에 한 번뿐인 일을 하지 않아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왜 한 개의 노를 가지고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내가 입고 싶지도 않은 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을까, 나는 왜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을까, 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지 못했을까.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의 일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자칫하면 다수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항상 눈을 번쩍 뜨고 살고 싶다. 나만의 노를 가지고 나만의 삶을 꾸리고 싶다. 노를 든 신부처럼 의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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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지(만화가)
서양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으며, 글과 그림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많다. 만화책 <3그램>, <며느라기> 등을 펴냈으며, 여러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작업했다.
khk10230
2021.05.30
seohk322
2021.05.30
잠수부
2021.05.28
거친 붓터치와 음침해보이기까지 한 강렬한 색감이 의아스러웠는데 줄거리를 읽고나니 납득이 가는군요.
그런데 ‘왜 남편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제목부터 신부라고 칭하는거지?
왜 거추장스러운 긴머리에 드레스를 입은 채로 야구를 했을까?’ 하는 사소한 의문은 남네요.
물론 우화에서의 비유와 상징성 때문이겠지만…
저는 주인공처럼 노 하나를 가지고 사냥꾼을 구해내고, 과일을 따고, 요리를 하고, 곰과 격투를 하고, 야구를 하면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힘이 세거나 재주 많고 운동 신경이 좋지도, 쉴새 없이 돌아다닐 정도로 건강하지도, 에너지가 많지도 않은데…
제가 만약 주인공이고 노 하나를 받는다면 그냥 이야기는 거기서 The End 구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도 들고요.
전형적인 삶의 궤적을 수동적으로 답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당당하고 씩씩하게 모험과 도전을 하는
주체적 여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찬양하는 줄거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한 모험조차 내가 죽어도 가지지 못한, 일련의 행운과 천부의 재능과 에너지,
그리고 참견 안하고 믿고 지켜보는 부모를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이 놈의 비관주의, 냉소주의가 문제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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