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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을 기다립니다] 윤성희 소설가에게 - 송지현 소설가

<월간 채널예스>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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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작가님 소설에서 제가 따뜻하다고 느낀 부분을 찾고 싶어서 책을 펼쳐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남은 기억’의 이 부분입니다. (2022.05.04)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가다 몇 번 뵌 적은 있지만 저를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학에 다닐 때 작가님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습니다. 게을러서 중간에 포기했지만요. 계산해보니 학교를 다닌 것도 벌써 15년 전이네요.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그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문창과 학생들의 말도 안 되는 독서량(당연히 독서량이 적어서입니다)에 놀란 지도교수님께서 독서노트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셨고, 그 과제를 하기 위해 읽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 읽고 나서 저는 한 줄을 적었습니다. “너무 따뜻함.” 현학적이고 냉정한 것이 멋있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땐 살아가는 데에 온 힘을 다 하는 것이 멋있지 않은 거라고 여겼지요.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많이 웃어가며,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글을 쓰는 게 다른 무엇보다도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왠지 작가님 소설에서 제가 따뜻하다고 느낀 부분을 찾고 싶어서 책을 펼쳐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남은 기억’의 이 부분입니다.

산딸기를 다 먹고 영순이 여자에게 남은 걸 모두 싸달라고 했다. “제가 불쌍해서 사주시는 거면 안 팔래요.” 여자가 말했다. “내가 암환자라 그래. 죽기 전에 맛있는 거 먹으려고.” 영순이 여자에게 삼만원을 건네주었다. 여자가 오천원을 거슬러 주면서 사과를 했다. 영순이 비닐봉지를 건네받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그딴 생각 하지 마요. 그러면 불면증 걸려.”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두는 것. 그렇지만 그 존재의 숙면을 걱정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함부로 위로하지 않으려는 배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설에 저는 동생과 마사지숍에서 마사지를 받았습니다. 마사지숍의 이름은 황후약손마사지. 처음가보는 곳인데다 건물이 좀 낡아서 어깨가 움츠러들었습니다. 다행히 내부는 깔끔하고 따뜻했습니다. 이내 족욕을 하며 긴장을 풀 수 있었습니다. 마사지사는 부부로 보였는데, 서로 이야기할 때는 중국어로 대화하였습니다. 저는 부인이, 동생은 남편이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자매를 마사지해주는 내내 중국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받는 동안 잠깐 잠이 들 뻔 했는데 마사지사가 발에 묻은 로션을 닦아주러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찬 기운이 들어와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내 중국어로 이야기 하던 남자가 부인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자 “앗, 뜨거!”라고 소리쳤습니다. 동생과 저는 마사지를 받고 나오며, 깜짝 놀랐을 때 다른 나라의 언어가 튀어나오려면 어느 정도로 익숙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다 형광 분홍색 킥보드를 발견했습니다. 주인이 없어보여서 동생과 저는 킥보드를 타고 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서로 킥보드를 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동생에게 작가님의 소설, 어느 밤의 내용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동생은 얼음땡 장면이 마음에 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 설을 쇠러 부모님 댁에 가는 내내 어린 시절 우리가 몰두했던 놀이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작가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말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해서 독자에게 후일담을 이어가도록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레 날이 따뜻해져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복도식 아파트인데 술을 마시고 집에 귀가할 때마다 항상 난간이 너무 낮은 건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언제부턴가 자꾸 난간 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것만 같아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곤 합니다. 동시에 난간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도 노력합니다. 벚꽃도 목련도 피어있는데 한 번도 내려다보지 않고, 주차장에서 나무를 올려다보기만 합니다. 양지에 있는 꽃들은 벌써 떨어지고 있고 음지에 있는 꽃들은 아직 봉오리를 맺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거겠죠.

저마다의 속도.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소설가가 된지 10년이 가까워져 오니,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게 된달까요. 다들 어느 속도로 얼마큼 가고 있는지, 그리고 저는 어디쯤에 머물러있는지를 가늠해 보곤합니다. 꾸준히 책을 내고 또 발표를 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자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소설을 쓰지 않았을 저의 또 다른 미래에 대해 상상해보기도 합니다(평행우주 어딘가에는 회사원 송지현, 자영업자 송지현 등등도 존재하겠지요).

그러다보면 상실감이 밀려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저의 삶을 대어보는 것만큼 재빠르게 상실감에 빠지는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자꾸만 남들보다 한참은 느린듯한 저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다가도…… 작가님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저 음지에 핀 봉오리를 더 오래 바라보곤 합니다. 어쨌거나 꽃은 피어날 테니까요.



최근에 출간된 『날마다 만우절』을 읽을 것은 문득 잠에서 깬 새벽이었습니다. 출근을 앞두고 있었는데 좀체 잠이 오지 않아서 침대 옆에 쌓아두었던 책 중 하나를 펼쳤지요. 그리고 출근 창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동료작가 박상영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날마다 만우절』을 읽고나니 여태까지 내가 쓴 건 소설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네.

잠시 후 답장이 왔습니다.

-그러게. 우린 잔재주나 부렸지, 뭐.

답장을 읽고 한참동안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너무 쓰고 싶어졌습니다. 내내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는데 갑자기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소설 속 모든 인물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를 건네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제가 어떤 글을 쓰더라도 세상의 단 한 명만은 괜찮다고 말해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덕분에 두려움 없이 잔재주를 부려보았습니다.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간을 기다리는 동안 작가님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거꾸로 걸어보겠습니다. 나의 유령과 함께 걷는 느낌으로. 어떤 속도라도 세상의 단 한명은 위로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누군가가 제 소설을 읽고나서 “너무 따뜻함.”이라고 적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만우절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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