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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릭의 창작 일기] 쏘팔메토

슬릭의 창작 일기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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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잘못된 수많은 기억 중 하나였을 뿐인 훼이크 레슨 사건은 그렇게 지나가는 듯싶었지만 사건은 평범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2022.05.09)

일러스트_한아인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은, 사건은 2022년 4월 2일 오전 12시 정각부터 시작되었다. 스케줄러에 '3시 레슨'이라고 적혀있었으니,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랩 레슨이 한 타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침 새 레슨생을 모집하던 시기라 정확히 어떤 분의 레슨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각각의 연락 루트를 확인해 새 레슨생분들의 시간을 모두 확인하였으나 4월 2일 토요일 3시에는 아무도 레슨 약속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내 스케줄러에는 정확히 '레슨'이라고 적혀있었고 나는 나의 기억력을 전혀 믿지 않기에 약간 혼란스러워졌다(다년간의 우울증 약 복용과 과음으로 내 기억력은 정말 많이 손상되어 있다)가 3분 정도 고민 끝에 내 기억력 대신 스케줄러를 믿기로 했다. 내 기억력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니 누군가와 랩 레슨 약속을 한 것을 당연히 잊어버렸고, 그나마 스케줄러가 대신 기억해 나를 살려주었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난 후 네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네 시간 동안 잠자는 척을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고, 그제서야 네 시간이나 쇼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잠들고 싶어 앵콜쇼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 반 정도 더 자는 척을 해보았지만 말똥말똥. 뭐 여기까지는 특별하거나 일생일대에 한 번 있는 사건이 전혀 아니다. 불면증에 익숙했고, 최근 질 좋은 잠을 자는 데 계속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룻밤 정도 새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력 상자는 어젯밤에도, 그제 밤에도 잠에 들면 누가 욕조에 나를 담근 것처럼 땀에 푹 절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가볍게 흘려버린다. 기억력 상자는 터널 마냥 무엇을 담을 수는 없고 통과만 잘 되는 모양으로 변했기 때문에 나는 '해가 떴지만 더 자고 작업실에 가자' 생각하고 아이유라도 되는 양 앵콜쇼를 준비했다.

좀 이상했다. 보통 하룻밤을 꼴딱 새우면 아침 10시 즈음부터 슬슬 체력적 한계에 다달아 지쳐 쓰러지곤 하기에 오전 내내 자는 것이 대충의 예상이었는데, 두 눈은 정오가 지나도록 말똥했다. 사실 말똥하다기보다는 퉁퉁 불었다. 최근 슬플 일이 많아 시간만 나면 울었기 때문. 나갈 시간에 맞추어 서너 시간 펑펑 울다가 지하철 시간이 다 되어 작업실로 향했다. 과연 레슨은 실존하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 3시.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스케줄러에 내가 잘못 표기한 것뿐이었는데 오지도 않을 레슨생을 만날 생각에 긴장을 너무 한 탓에 공황이 왔다. 내 잘못된 수많은 기억 중 하나였을 뿐인 훼이크 레슨 사건은 그렇게 지나가는 듯싶었지만 사건은 평범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마침 프로야구가 개막했고, 겨울 내내 야구를 기다렸던 나는 세 시간 삼십 분이 넘도록 개막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공황이 가져다준 긴장과 야구가 가져와준 흥분과 기다리고 있던 슬픔이 이상한 감정으로 뒤섞였고, 집에 갈 때까지 또 펑펑 울기 시작했다. 오늘은 눈물없이 잘 수 있을까? 새로운 질문 하나 더. 오늘은 땀 없이 잘 수 있을까?

그 다음날 상태는 더 가관이었다. 작업실로 손님이 오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근 석 달 동안을 울고불고 하느라 오래간만에의 곡 작업에 내 뇌는 이때부터 퓨즈를 좀 끊어먹은 것 같았다. 억지로 서너 시간 눈을 붙여보았는데, 이번에는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새벽 4시. 잠은 달아났고, 온몸이 땀으로 절어있고, 손 발이 보라색으로 변해있었으며 순간 나는 꺾기의 달인처럼 손발을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오한에 너무 놀라 곧바로 샤워실로 직행해 보았지만 온몸을 전혀 컨트롤할 수 없었고,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오들거리며 '오늘 손님 오늘 손님 어떡하지 오늘 손님' 하고 랩이 나왔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헐레벌떡 작업실로 와 생전 안 하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똑딱똑딱. 손님을 맞고, 함께 저녁으로 피자를 먹은 뒤 곡 미팅을 진행했다. 여전히 바들바들. 걱정과 다르게 비교적 무난히 미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기서부터 실시간, 현재진행형으로 공포가 엄습한다.

오늘 밤, 잠에 들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죽은 사람이 있었나. 고작 땀이 너무 많이 나버려 죽는다니. 그런데 이틀을 못 잔 내 몸은 오늘따라 졸려 죽겠단다. 이것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사고사인가 병사인가. 무슨 병이 들었길래 온몸에 물이 다 빠져나가 죽는단 말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간만 나면 울면서 죽는다고 난리 난리를 치다가, 그나마 무색무취인 삶에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프로야구가 막 시작했(고 첫 경기를 엄청 재미있게 이겼)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불어 터져 죽는단 말인가. 이 죽음을 받아들일지 말 지 큰 고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안 죽으면 어떡하지.

안돼, 죽으면 안돼. 손을 후들거리며 카톡창에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다 지웠다. 또 썼다. 또 다 지웠다. 또 또 썼다. 잠이 들었다.

커다란 사람과 함께, 커다란 사람으로 태어나면 차별받는 점에 대한 커다란 책을 출간하는 꿈을 꾸었다. 그 사람은 커다랗게 태어나 한 평생을 고생하고 상처받으며 살았고 슬릭, 그 한을 풀어주려 오랜 시간 함께 책을 쓴다. 고생하며 출간된 책은 세계적으로 대박이 나 교과서가 되기 시작한다. 커다란 사람을 껴안고 좋아한다. 드디어 너의 한이 풀리는구나. 드디어 너와 나의 울음을 세상이 알아주는구나....꿈같은 일이 벌어지는구나...꿈 같은 일...꿈...

안돼!

잠에서 깼다. 흥건하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눈만 꿈벅꿈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손과 발에 감각이 없다. 덮고 있는 이불이 땀에 절어 무겁다. 강렬한 땀의 내음이 코를 찔렀다. 나는 죽었나 살았나. 꿈벅대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살았다. 딱 죽기 직전이었다. 지금 눈을 감고 다시 뜨지 않으면 백 퍼센트 죽는 상황. 너무 춥고, 동시에 너무 더워 어찌할 바가 없었다. 온몸에 맺힌 땀이 동시에 식으며 체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무서워, 이렇게 죽는구나. 그렇게 죽을 생각만 하더니 땀에 절어 죽는구나. 사람들은 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까. 펑펑, 눈물이 터지니 손발에 온기가 돌아왔다. 밀려드는 오한에 신나게 온몸을 꺾어 후달거리며 일어나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잠옷을 갈아입었다. 몸이 말한다. '으응? 벌써 깨? 5분만 더...' 머리가 말한다. '미쳤어? 지금 자면 5분이 아니라 평생 자는 거야' 몸이 다시 말한다.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닌디 흠냐...'.

죽자. 결심했다. 그냥 죽어버리자. 그렇게 죽기를 원했던 나에게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지만 죽음이 오긴 오는구나. 땀에 절어 죽든 딸기잼에 절어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냥 지금 죽자. 쓸데없는 목숨, 지금이 절호의 찬스입니다.

꼬르륵.

이렇게 배가 고픈 채로 죽으면 구천을 떠돌며 영원히 먹을 것에 눈이 뒤집히겠지. 나는 왜 어젯 저녁에 피자를 다 안 먹고 남겼지. 천벌받을라고. 이 배고픔은 내 영혼의 짝꿍이 되어 저승을 가든 이승에 남든 세상이 멸망해 모든 생명 비생명이 멸종해도 나는 배고픈 혼이 되겠지.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겠지. 천 번을 먹어도 이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겠지. 죽기 직전의 새벽, 어머니가 출근 전 아침밥을 드신다.

부모님께 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길.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민망함과 감사함과 죄책감과 긴장감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라디오만 듣는다. 라디오에서 길고 길게 장기계약한 광고들이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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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슬릭(뮤지션, 작가)

뮤지션, 작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괄호가 많은 편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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