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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나는 문학하는 사람"

에세이 『문학이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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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더라도, 가진 걸 모두 잃고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해도 내 머릿속에 있는 문학 작품만큼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가 없어요. 그 사실이 저를 버티게 해주고 계속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만큼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저의 친구인 거죠. (2023.01.25)


너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저절로 솔직해진다. 어떤 수식어로도 커다란 마음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여울에게는 문학이 그랬다. 감성적인 제목을 수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문학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솔직한 문장을 택한 이유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읽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작가는 어두운 삶을 빛으로 이끈 이야기들을 담아 이 책을 썼다.



책은 읽은 만큼만 말을 건다 

새해를 시작하는 기분이 어떠세요?

신년 느낌이 별로 안 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새 달력을 보면 신나고 설렜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내가 왜 이럴까, 지쳤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지난해에 이태원 참사 등 슬픈 일이 많았잖아요.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극복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도 책이 나와서 견딜 수 있었어요. 제가 책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스스로 힘을 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어요. 

책에서도 그 마음이 드러났어요.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문학과 심리학을 평생 공부했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그 모든 공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에 막막해집니다(10쪽)'라고 쓰셨죠.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제발 올해는 모두가 무사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많이 했어요. 

올해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을까요? 

20~30대 때는 작가로서 생존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글만 쓰면서 먹고 사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데, 이게 가능하다면 내 인생은 참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죠. 지금껏 투쟁하듯 목표를 이뤄왔는데요. 어느 정도 그런 삶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하니 타인의 고통이 더 많이 보여요. 지금은 그들을 위한 공감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바람을 안고 글을 써요. 올해는 다시 문학으로, 책으로 돌아오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이 책을 출간하신 것도 그 일환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어요.

지금은 모든 것이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지는 시대죠. 사람들이 이토록 문학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포기할 법도 한데, 나는 왜 아직도 문학을 붙들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요. 저에게 가장 큰 용기를 준 게 문학이더라고요. 저는 가족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책으로 배웠어요. 거꾸로 책에서 배운 사랑을 가족에게 나눠주었고요. 또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받고 있었던 사랑을 책을 통해 깨닫기도 했죠. 마치 대지의 토양처럼 나에게 계속해서 힘을 주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었어요. 만약 내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더라도, 가진 걸 모두 잃고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해도 내 머릿속에 있는 문학 작품만큼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가 없어요. 그 사실이 저를 버티게 해주고 계속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만큼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저의 친구인 거죠. 

글과 어울리는 여행 사진을 교차해 넣은 게 눈에 띄었어요. '문학의 담장을 낮추고 싶다(19쪽)'는 마음에서 비롯된 시도인가요?

읽어보지도 않은 채 '문학은 어려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께 문학적인 순간은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문학은 작가 지망생이나 전공자에게만 의미 있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해요. 이 책을 읽고 각자만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찾아보셨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그 시간은 24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30분일 수도 있죠. 하루의 몇 분만 짬을 내서 시 한 편이라도 읽어보신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향기롭게 채워지는지 경험할 수 있으실 거예요.

요약된 정보가 아니라 작품을 직접 읽어야 한다고도 강조하셨죠. '정보'와 '이야기'는 다르다고요. 

요즘은 책 내용을 10분으로 요약해주는 유튜브 채널이 많더라고요. 얼핏 효율적인 것 같지만, 그건 문학의 감동을 결코 알려주지 못해요. 언젠가 도서관에서 『데미안』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요. 수강생 두 분이 지나가면서 "오늘 강의 너무 좋았지. 『데미안』은 안 읽어도 되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 말을 듣자마자 뛰어가서 "꼭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책은 읽은 만큼만 나에게 말을 걸어요. 누구나 아는 『피터팬』도 축약본이 아니라 원본 소설을 읽으면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요.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굉장히 재밌고 복잡한 소설이거든요.


문학이 가루처럼 흩어지는 세상

고전, 현대 문학, 대중가요 가사까지 다양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미 읽었던 작품이지만 작가님의 해석을 보니 또 한 번 읽고 싶더라고요.

제가 정말 바라는 거예요. 저는 좋은 작품은 10번도 넘게 읽어요. 그러고 나면 책의 등장인물, 작가와 가족보다 더 친한 느낌이 들죠. 저와 가장 친한 친구는 어쩌면 모두 죽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웃음) 어린 시절 보았던 『빨강 머리 앤』을 10년 뒤, 20년 뒤에 다시 읽으면 전보다 100배는 더 좋아요. 과거에는 앤에게만 감정 이입을 했다면, 지금은 앤에게 잔소리하는 마릴라의 마음이 보이죠. 그래서 저는 재독을 권해요. 책을 다시 읽으면 내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알 수 있거든요.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고 그 느낌을 받았어요. 주인공 '홀든'이 "어린이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학창 시절에는 홀든이 반항아로만 보였거든요. 전보다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이 많아진 것이기도 하고요. 마음 안에 사랑이 커졌기 때문에 홀든의 아픔이 더 예민하게 느껴지는 거죠. 문학을 읽으면 세상을 예민하게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어요. 예민함은 부정적인 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사실 예민하다는 건 참 좋은 거예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예민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행복하기가 힘들어요. 고통이 많이 보이거든요. 예민한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은 누구나 살기 좋은 세상이죠.

개인적으로 신화 『바리데기』에 관한 글을 가장 인상깊게 읽었어요.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국가의 반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고 저승의 신이 되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사랑을 배우지 못한 자의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해석하셨어요. 

이 책의 전체적인 멜로디가 『바리데기』에 있어요. 저는 바리데기와 공통점이 많아요. 딸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출발하는 압박감을 느끼며 살아왔죠. 바리데기는 원래 '버려진 존재', '허섭스레기'라는 뜻이잖아요. 그럼에도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대가 없이 구원하는 더 큰 사랑을 선택해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문학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아름다운 말들이 있는 곳, 큰 상처를 받았음에도 기꺼이 다시 일어나는 주인공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문학을 등한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으시죠. 

그렇죠. 특히 "문송합니다" 같은 말을 들으면 황당해요. 저는 문과생인 게 굉장한 이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문학을 배워서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그만큼 넓어졌으니까요. 저에게 문학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마이너리티'라는 뜻은 될 수 있어도, 결코 손해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었죠. 문학을 좋아하는 분들이 세상의 편견과 나쁜 언어에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오랫동안 평론가와 작가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무의식 깊숙이 뿌리박힌 '시나 소설을 써야 문학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는 중이다(224쪽)"라고요. 

우리나라에서 문학을 하면 늘 선택지를 요구받아요. 대학원에 갈 때도 "소설을 쓸 거니, 평론을 쓸 거니?"라는 질문을 받았죠. 저는 문학이 좋아서 대학원에 갔을 뿐이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러 간 게 아니었는데, 늘 애매모호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작가가 된 뒤에도 그랬죠. "소설은 안 쓰세요?”라는 질문을 받곤 했거든요. 한 번은 제 글이 교과서에 실렸는데, 비문학으로 분류되더라고요. '평생 문학을 해왔는데, 왜 내 글은 비문학이지?' 싶어서 서운하기도 했어요. 문학이 더 큰 사랑을 받으려면 가루처럼, 공기처럼 흩어져서 경계가 사라져야 해요. 저는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도 문학을 발견해요. 대사 안에 운율이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문학하는 사람이에요. 문학이 기행문으로, 에세이로 확장되었을 뿐이죠. 문학이 아니면 정여울도 없어요.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편집자나 번역가, 아니면 도서관의 사서가 되지 않았을까요. <채널예스> 기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고요.(웃음) 어쨌든 저는 문학의 곁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문학이 필요한 시간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정여울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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