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어. 그런 생각이 독을 품은 이슬처럼 내 마음 어두운 곳에 맺혀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생각을 끊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양 볼이 불룩해지도록 다시 한번 긴 숨을 내쉬었다. 새파란 하늘이 아름다웠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칼을 간질였다. 눈을 감고 가을을 한껏 들이마시며 나 자신을 조용히 다독였다.
됐다. 됐어.
뭘 또 다 지난 일로 상처를 받았네, 기억이 생생하네 어쩌네 징징거린단 말인가. 요 며칠 내 의지와 무관히 소환되어 버린 과거사 때문에 마음이 번잡스러웠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털어 버리고 오늘을 살면 그뿐이었다. 사는 건 매년 작년보다 나아졌다. 중학교 3학년 때보다 고등학교 1학년 때가 나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보다 2학년 때가 더 나았다. 학교생활도 그렇고 내 마음도 그랬다.
복국이 먹고 싶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식욕이 좋고 고맙다. 삶이 온통 회색이었던 시간을 살았기 때문인지 하고 싶다, 되고 싶다, 먹고 싶다, 같은 모든 욕심이 나는 반가웠다. 무너지던 표정이 다시 회복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갔다. 빵집과 카페, 자동차 정비소를 지났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금강복집이 나올 터였다.
문경민 작가의 『나는 복어』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문경민 소설가 편>
오늘은 새 장편 소설 『나는 복어』를 쓴 문경민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황정은: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문경민: 안녕하세요. 어린이가 주인공인 소설도 썼고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도 썼고 그리고 소설도 쓰고 있는 문경민입니다.
황정은: 오늘 학교에서 수업 마치고 오신 거죠?
문경민: 네, 수업 마치고 이것저것 하다가 왔습니다.
황정은: 작가님은 2016년부터 올해까지 정말 부지런히 소설을 써오셨어요.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으셨는데. 이제 한 9년쯤 됐나요?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지가?
문경민: 이제 8년 차인 것 같아요.
황정은: 얼추 8년에서 9년 사이 정도 되는 거네요. 그렇게 글을 써온 지난 시간을 좀 돌아보기도 하십니까? 요즘 어떠세요?
문경민: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죠. 저한테는 지난번에 냈던 『지켜야 할 세계』가 일종의 기점 같은 소설이었어요.
황정은: 2023년에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죠.
문경민: 네, 혼불문학상을 수상해서 출간할 수 있게 된 소설이죠. 아마 혼불문학상 수상이 안 됐으면 출간이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황정은: 왜요?
문경민: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누가 저한테 소설을 달라는 얘기를 안 하니까요. (웃음) 너무 어렵습니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지켜야 할 세계』는 제가 2016년에 쓰기 시작했던 소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언젠가는 내야 했던 소설이었는데...
황정은: 그러면 8년이나 써오신 거네요?
문경민: 고민한 기간은 7년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소설을 언젠가는 내고 싶었고, 냈고, 다음에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그러면서 과거도 돌아보게 되는... 아휴, 힘들었습니다.
황정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그런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거네요.
문경민: 그렇죠.
황정은: 매일 출퇴근하면서 산문 작업을 하기가 어떻습니까? 퇴근하고 4~5시간씩 글을 쓰신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거든요. 요즘도 그러세요?
문경민: 요즘은 약간 체력이 떨어졌어요. 하루에 3~4시간 정도는 매일 앉아 있죠. 앉아서 뭔가를 하는 시간들을 갖고 있고. 주말이라든가 공휴일에는 좀 더 많이 쓸 수 있어요. 그래서 8~10시간 정도 작업을 합니다.
황정은: 오늘은 작가님의 새 소설 『나는 복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눌 텐데요. 특성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현장 실습생이 겪는 산재 사고가 소설 안에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지기도 하잖아요. 이 소설을 쓴 계기를 듣고 싶어요.
문경민: 처음에는... 청소년 소설을 하나 더 써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황정은: 계약 때문입니까?
문경민: 네, 계약 때문이었죠. ‘그럼 무엇을 쓸 것이냐’라고 했을 때 일단은 세상에 없는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제가 학교에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교육 현장에 대해서도 알죠. 그리고 옛날에 교육 운동을 했던 가락도 있어서, 제가 쓰고 싶어 하는 그리고 남들이 잘 쓰지 않는 그런 영역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황정은: 소설로 잘 쓰지 않는.
문경민: 네, 그래서 눈에 들어오게 된 게 특성화 고등학교였고. 그 소설을 쓰려고 구상할 때쯤에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붕괴된 가정의 이야기를 듣게 됐죠. 그게 소설의 발단이 됐습니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던 소설이에요.
황정은: 『나는 복어』 안의 어떤 이야기에 그 들으신 이야기가...
문경민: 음... 그 선생님이 십여 년 전에 경험한 일이었어요. 오래 전 일인데도 울먹이면서 저한테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살다 보면 소설에서는 감히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현실에서는 마구마구 일어나잖아요. 그런 일들을 그 선생님도 겪었던 거죠. 자기 반 아이가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 부모님이 자기 아이를 죽이고 그리고 자살한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 이야기가 저한테도 뭔가를 남긴 거죠. 이야기의 발단을 좀 더 들어가서 말씀을 드리자면 ‘그때 죽은 아이들이 죽지 않았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살았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한번 써보자’라고 생각을 하게 됐던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약간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주인공 이름을 정하느라 고민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두현’이라는 주인공 이름은 그냥 떠올랐어요. 뭐랄까, 고민 같은 거 없이 ‘그 아이의 이야기를 써보자, 그 아이는 남학생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까 바로 두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갖고 있는 출발점 자체가 되게 끔찍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첫 문장도 자연스럽게 그 상황이 반영된 문장 “내 별명은 청산가리. 조폭은 아니다”로 떠올랐던 거죠.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황정은: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복어』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사실은 세상에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그런 맥락이 있었군요. 작년 12월에 ‘특성화고 소재 이야기를 쓰고 있고 『훌훌』의 후속작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이번 소설 『나는 복어』인 거예요?
문경민: 네, 맞습니다. 『훌훌』 다음으로 나올 청소년 소설.
황정은: 아, 청소년 소설이라는 면에서 후속작인 겁니까? 어떤 면에서 『훌훌』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어요.
문경민: 그러니까, 청소년 소설이라는 영역이 있죠. 그 영역은 어린이 소설과도 좀 다르고 일반 소설과도 좀 달라요. 어떤 면에서 그러냐면, 일단은 주인공이 청소년인 소설들이 많습니다. 그게 주된 흐름이에요. 그리고 청소년 소설은 제가 볼 때는 주인공인 청소년을 함부로 대상화하면 안 돼요. 함부로 써먹으면 안 됩니다. 아이들이잖아요. 아직 커나가야 되고 더 잘 살아야 되고 어른이 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한 아이들인데, 그들의 고통이라든가 어려움들을 마구 다뤄서는 안 됩니다. 써먹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예요.
황정은: 그럴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를 읽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문경민: 맞습니다.
황정은: 청소년 소설에서는 청소년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습니까?
문경민: 중학생 고등학생을 잡는 것 같아요. 사실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서 청소년이 꼭 주인공이어야 된다는 법은 없죠. 모든 소설은 어느 영역에서든 다 가능한데, 전반적인 추세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을 청소년 소설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냥 소설에서도 청소년이 주인공일 수 있죠. 당연히 그럴 수 있는데, 다만 소설에서의 청소년과 청소년 소설이라는 영역에서의 청소년은 작가와 출판사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 더 조심스럽습니다. 『나는 복어』도 『훌훌』도 문학동네에서 나왔는데, 편집부에서 원고를 교정하고 수정하는 과정들을 보면 그냥 막 쓸 수가 없어요. 엄청 신경을 많이 씁니다. 이 이야기가 다른 영역에 있는 아이들 또는 어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이런 부분들을 저보다도 더 많이 신경을 쓰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설을 완성해 가는 걸 봤습니다.
황정은: 편집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의 시선이 되게 소중한 것 같아요.
문경민: 그럼요.
황정은: 내가 아무리 조심을 해도 미처 짚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문경민: 맞습니다. 편집자 너무 중요하죠.
황정은: 청소년 소설은 독자를 좀 더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의식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문경민: 네, 맞습니다.
황정은: 『열세 살 우리는』과 『나는 복어』는 모두 노동이라는 배경이 있잖아요. 전작인 『열세 살 우리는』에서는 어른들의 노동 현장이 배경이었는데, 이번 소설 『나는 복어』에서는 청소년들의 노동 현장으로 그 장소가 이동을 했더라고요. 『열세 살 우리는』에서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보복발령이라든지 부당해고 상황에 부침을 받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 곁에 부재하고, 그래서 아이들이 겪는 영향을 위주로 소설을 쓰셨는데. 『나는 복어』의 아이들은 특성화고 실습 현장에서 자기 일로 겪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동한 이유가 있을지 그것도 궁금했어요.
문경민: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난 다음에 작가한테는 자기가 쓴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노동의 삶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실은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좀 많았어요. 특성화 고등학교의 어떤 현실이랄까, 그런 현실은 부정할 수가 없더라고요. 특성화 고등학교는 다 다릅니다. 천차만별이에요. ‘특성화 고등학교는 이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고요. 그중에서 한 지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노동에 대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이렇게 견지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저도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우리 모두 다 일을 하는 사람이고, 함께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있는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고통에서 출발을 하는 거죠. 그리고 불편하고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들, 뭔가 극복해 갈 것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소설의 큰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무슨 이야기를 쓸 것이냐’라고 했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특수화 고등학교로 시선이 옮아간 것도 있었죠. 그리고 『열세 살 우리는』에서의 희망퇴직이라든가 부당해고 같은 상황들도 당연히 그쪽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mallogirl
2024.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