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에서 “상처는 자긍심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던 하미나 작가는 새 책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서 “진실에 가까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상성의 렌즈를 벗어던져야 한다”(254쪽)고 답합니다. 첫 책 이후 4년 동안, 작가가 상처를 자긍심 삼고 머리가, 정상이, 기준이, 앎이 무엇인지 재정의하기로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서 작가는 글로 복수를 하고, 지식의 허위를 폭로하고, 회복을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경험을 쓰고 살아가는 힘으로 삼고 있었으니까요. “나를 훼손시키는 데에 멈추지 않고 힘으로까지 만들게 하는” 글쓰기란 과연 상처를 자긍심 삼는 글쓰기니까요.
앎과 삶이 파열음을 낼 때, 세상의 진실이 도무지 나를 설명하지 못할 때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갈라 나를 꺼내”는 것이라고 하미나 작가는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폄훼됐던 경험과 하찮게 취급당했던 말, 억압받았던 목소리와 느낌 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로부터 세계의 진실을 찾는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드러날까요. “미쳐버릴까 봐 아니면 죽을까 봐”(75쪽) 두려워하지 않기를, “더 이상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으로 건너가”(401쪽)기를, 그리고 이 책이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기 안의 진실을 더 신뢰하게 되는” 작은 힘이 되기를 바라는 하미나 작가가 길어낸 진실은 그래서 사랑의 모양을 닮았습니다.
그토록 서로 다른 진실의 세계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책 출간을 알리면서 “스스로 알아차리기 오래전부터 나의 삶을 이끄는 내면의 질문들. 그런 질문에 여러 해 동안 몰두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특권이며 행운인지, 또 자기중심적인 일인지 갈수록 느껴요”라고 쓰신 걸 보았어요. 눈길이 머문 곳은 ‘삶을 이끄는 내면의 질문들’ 부분이었는데요. 이 질문들이 작가님께는 살아갈 힘이자, 쓰는 힘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어떤가요?
제게 그 질문들은 운명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하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는, 주어진 운명이라고요. 의식적으로 그 질문을 찾아간 것은 전혀 아니었으니까요. 사후적인 것 같은데요.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 수록된 글들은 2021년부터 썼던 것이고, 리서치는 거의 2016년쯤부터 조금씩 궁금하던 걸 찾아온 거예요. 그때는 질문이 무엇인지도 몰랐고요. 그런데 글을 모으고 보니 제가 이 질문에 아주 오랫동안 몰두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한편, 이 질문을 따라가기는 무척 힘에 부치고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러니 힘이라기보다 운명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힘은 다른 데서 오는 것 같고요.
따라가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운명이라니요.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요? 생애 초반에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경험해 버려서 나한테 새겨진, 그래서 저항해봤자 우회하는 셈이니 길만 길어질 뿐인, 그냥 따라가는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그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나요? 작가님만의 질문에 확 붙들려버린 순간 말이에요.
‘프롤로그’에 나오는 장면인데요. 기독교 집안이었지만 우리집은 무교였어요. 와중에 저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가 고등학생 때 교회를 나왔죠. 그것이 너무나 큰 경험이었어요. 교회를 나온 뒤에 도서관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거든요. 그러면서 이 세계에 다양한 세계관이 공존한다는 것,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세계관을 갖고 살아간다는 걸 알았어요. 그 세계관이라는 것이 인지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무언가를 보기도 하잖아요. 그토록 서로 다른 진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오랜 혼란이면서 질문이었고요. 동시에 발견의 기쁨을 주는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서 작가님은 계속해서 경계 자체를 회의하고, “이것이 왜 중요한가?”(129쪽)를 묻잖아요. 작가님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과학철학의 태도 같기도 했어요.
과학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진리라고 여겨진 과학이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는 걸 알고 있죠. 때문에 지금의 과학이 정말로 지식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지 회의하고요. 나아가 어떤 것이 과학이고 비과학인지, 과학의 영역에 수용할 수 있는 지식과 영역 밖으로 쫓아내야 할 지식이 무엇인지 등을 계속 이야기해요. 토마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이와 같이 설명했고요. 칼 포퍼는 역설적으로 반증 가능해야 과학이라고도 얘기했거든요. 파이어아벤트는 “anything goes”라고 얘기했죠. 뭐든 다, 심지어 창조론까지 가르치라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열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과학철학에서는 이처럼 하나의 앎 체계 안에 오래 머물기보다 각 체계들 사이에서 방향을 잡는 작업을 하는데요. 유사한 맥락에서 저 역시 무엇이 맞고 틀린지, 다 옳아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것을 오래 탐구해 왔어요.
문제는 그랬다는 것을 제가 뒤늦게야 이해했다는 거예요. 소위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계속해서 관심이 갔거든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도 그런 것이죠. 여자들이 아프니까 고통을 해석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들여다 보잖아요. 거기에는 비과학적인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에 관한 글을 쓰는 입장에서 우열을 판단하거나 ‘이 사람은 헛된 걸 믿고 있어’라고 말할 권리가 제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공존시킬지 그때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녀들에게서 나를 보았다
권김현영 선생님이 추천사에 “이 책은 또한 질문의 책이다”(404쪽)라고 했죠. 책의 입구인 제사에 등장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진실과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고요. 작가님께 질문한다는 것이, 진실을 탐구한다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 건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단순한 것 같아요. 그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에. 매번 놀라고 매번 경이로워요. 제가 책을 쓸 때는 ‘진짜 멋있지 않아요? 진짜 놀랍지 않아요?’ 하는 마음이거든요. 이때 이 경이로움과 감탄은 단순히 아름답고 좋아서만은 아니고요. 약간 지옥 구경하는 것처럼(웃음), 인간에게 이런 면들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거예요.
책에 챗지피티와의 대화를 담았나 하면요. 강의록이나 가상의 발제문, 그리고 시가 수록되어 있기도 해요. ‘인문 에세이’라는 카테고리 분류가 얼마나 협소한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의 꼴을, 의미를 구상하셨어요?
진짜 고민이 많았어요. 원고를 세 번은 엎었을 거예요. 화자의 태도를 결정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애초에 기획은 2021년에 <한국일보>에서 연재했던 ‘젠더살롱’의 글이었어요. 과학을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비판한 글들이었는데요. 지금 이것을 보니 고민이 됐어요. 제게 다른 정체성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비판만 하고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비판만 하기는 더 쉬운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뭘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고, 때문에 고민을 했던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글이 똑똑한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고 쓰는 느낌이 들었어요. 더 논리적인 근거를 대고, 더 학술적으로 쓰고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누구한테 보이려는 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쓰기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살면서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진실을 찾기 위해 모든 걸 총동원하잖아요. 내 삶 안에서 나는 꿈으로도 보고, 신화도 보고, 문학도 보고, 과학도 보면서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데요. 그러니까 창피하고 쑥스러워도 그대로 쓰기로 했어요. 있는 그대로 써도 된다, 그것이 가치롭다는 믿음을 가져야 했죠. 물론 어려웠어요. 그런 책이 별로 없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쓰는 글을 많이 읽다 보니까 그렇지 않은 구석을 내보이는 게 어렵긴 했고요. 다만 마음을 먹고 난 뒤부터는 빠르게 풀렸어요.
마녀, 히스테리와 정신병을 가진 여자들, 소외되고 오해 받아온 수많은 여성들도 호명하잖아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에서 다룬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데요. 작가님께 미친 여자의 언어를 읽고, 미친 여자의 언어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져요.
나는 내가 누군지 알잖아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걸 나는 알아요. 그렇지만 제도권 언어로 내 세계를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지죠. 와중에 그녀들에게서 나를 보았던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낙인을 가진 사람들, 공포스럽게 여겨지고 악마나 사탄 취급을 받은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우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다는 직감이 계속 드는 것 같아요.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를 쓰는 작업이 그랬거든요. 짜릿했던 몇몇 순간이 있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치유자로서 마녀 이야기와 지금도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마녀 사냥 이야기였어요. 그 내용을 통해 저의 관점과 경험이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너무 많이 오해해왔구나, 깨달을 수 있잖아요. 탁월한 지성을 가진 여성에 대한 오해 너머에서 그녀들을 비로소 다시 볼 때 얼마나 큰 슬픔과 따뜻함으로 느껴지는지 경험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영화 <엑소시스트>가 공포 영화지만 그걸 다르게 보기 시작하면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 슬프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이야기로 여기게 돼요. 무슬림도 그렇죠. 저 역시 베를린에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들에게 낙인이 너무 심하구나, 느끼는 동시에 이들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느끼기, 경탄하기, 몸의 말에 귀 기울이기
그래서 머리-글과 몸-글에 대해 설명한 부분에서 “두 개의 언어로 말하면 된단다”(75쪽)고 쓴 부분이 좋았어요. 지금까지 평가절하되어 온 몸-글, 그러니까 비이성, 비합리, 비권위라는 라벨이 달렸던 글의 가능성과 필요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거든요. 머리-글로는 결코 다 드러날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거예요.
교육 받아온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실 식민 지배 이후 만들어진 극히 일부의 앎이에요. 피식민지에서 받은 왜곡된 앎이죠. 또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너무 받잖아요. 대다수 대학 교수가 미국 박사고, 여성 교수도 별로 없고요. 하지만 우리는 한국에 사는 아시안이니까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사는 동안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계속 받아요. 이 앎들이 내 삶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니까요. 알 수 없는 노스텔지어,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는 감각을 느끼는데요. 저는 그것을 회복하고 싶어서 마녀 이야기를 듣고, 몸의 언어를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의 얘기를 놓칠 때는 단순히 그 얘기를 놓치는 것인 동시에 그들이 대표하는, 상징하고 있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잃는 거라고도 생각하고요.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작은 느끼는 것, 경탄하는 것, 그리고 몸이 말해주는 것을 듣는 것이죠. 그것이 나침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해 말할 때보다 느끼는 것에 감탄할 때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16쪽)라는 문장을 그 연장에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느낌이란 주관적 경험 같지만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거든요. 특히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들을 보면 그렇죠. 사회적 낙인이 강한 존재들, 오해 받아온 존재들, 혹은 규범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공포를 느껴요.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느낌을 깊이 들여다보면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앎이라는 것은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더 잘 감각하게 하기 위해 시작됐을 거예요. 그런데 학교나 대학에서 배우는 앎들이 그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나요. 플라톤만 해도 진선미가 일치하잖아요. 에밀리 디킨슨도 그렇고요. 그런데 대학에서 배울 때는 ‘나’라는 주어를 쓰기조차 어려워요. 앎 자체를 탐구하는 기쁨을 누리기보다 끊임없이 인정받아야 하고, 승인을 필요로 해요. 대학원에 다닐 때, 그 와중에도 많은 걸 배우긴 했지만, 저의 가장 큰 실책은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생각 같은데요. 배움은 학교 밖, 거리, 여행에서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오해가 무서워요.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네요. 힘들지 않으세요?
윤리적 목표나 대의라기보다 정말 기쁨 때문이에요. 너무 어두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되게 아름다운 것임을 알 때의 기쁨과 경이로움이 있어요. 예전에는 밝고 깨끗하고 겉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아는 데서 오는 경탄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어둡고 침침해 보이는 곳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이 더 큰가 봐요.

까다롭고 어려운 여자들
제목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는 PART 4의 제목이기도 해요. 그리고 해당 챕터의 첫 글에서 이 말이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340쪽)이며 “아주 많은 소음과 뜬소문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계속 내려가는 일”(341쪽)이라고 썼어요. 책 전체를 안는 이야기 같았고, 여기에 대해 작가님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어졌습니다.
김혜순 선생님의 『여성, 시하다』에 비슷한 표현이 나와요. 오를랑의 퍼포먼스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너무 오염된 여성, 가짜 여성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신의 진실된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거의 내가 나를 낳는 것 같은 과정이 된다고요. 이 제목을 제 메일링 할 때 썼었는데요. 여러 제목 후보가 있었으나 출판사도, 편집자 선생님도 오로지 이것으로 의견을 주셔서 제목을 쉽게 정했어요.
얼마 전에 한 뇌과학 연구를 봤어요. 흔히 뇌를 논리 기계라 생각하지만 실은 비유 기계라는 거였어요. 비유로써, 나에게 익숙한 보조 관념으로써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두뇌의 과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비슷하게 느끼거든요. 글쓰기는 하면 할수록 저에게 계속해서 진실한 걸 말하라고 요구하는 느낌이 있어요. 표면에 사회화되고, 교육받은 의식이 있다면 그로부터 조금 더 들어가라고요.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말 그렇게 경험했는지 들어가고 더 들어가 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하강의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깊이 들어가서 내가 사회에서 배운 것들 너머에 잠자고 있는 ‘진짜 나의 생각’인 것을 꺼내는 과정 같아서요.
그것은 아름답고 충만한 작업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꽤나 외로운 작업이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외롭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것 같아요.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과 거기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니까요. 알면 외면하기 어려워지는데, 그걸 바꿀 힘은 없잖아요. 또 늘 아름다운 것만 알게 되는 게 아니라 경악스러운 것까지 알게 돼요. 한국사도 그렇죠. 그동안 한국이 침략 당해온, 식민지배의 피해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왔는데 한국이 다른 사람들을 학살한 역사도 있다는 걸 알게 돼요. 너무 경악스러운 우리의 면을 배우게 되고요. 그래서 프롤로그의 질문이 나온 것 같아요. “세상을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죄가 되나요?”(9쪽) 왜냐하면 앎에서 오는 고통과 책임감, 외로움이 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분열이 일어나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지내다 성폭력의 역사를 보면 여성으로서의 나는 완전히 분열되거든요. 경악스러운 사실을 알아갈 때마다 분열되고 미칠 수밖에 없고요. 그러니까 미친 여자들의 언어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돼요. 분열되어서 미친 여자들이 있었고, 그 여자들이 낸 목소리들이 있었다는 것은 계보를 되찾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럼으로써 비로소 좀 덜 외로워지게 되죠.
그리고 계승이 되겠죠. 어떤 종류의 지식이라는 건 혼자서 할 수 없어요. 그녀들이 갈고 닦은 지혜와 발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잘 전수받는 노력이 필요해요. 잘 전수 받아서 전보다 나은 것을 다음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게 진짜 중요하죠. 저한테는 글방이 그렇게 느껴지는데요. 어딘(김현아)에서 시작한 글방이 저를 비롯해 이길보라, 이슬아, 안담 같은 작가들을 만들어냈고요. 이들이 또 글방을 하면서 이어지고 있어요. 김지승 선생님의 수업도 그렇고요. 어떤 한 명의 여성이 고군분투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의 스승을 찾아서 배우고, 그걸 자기 다음 사람에게 나누잖아요. 이렇게 밀착해서만 배울 수 있는 지혜와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여자들과 관계 맺는 법도 배우고요. 사실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 여자들이에요.(웃음) 그렇지만 언니들과, 여자 선배들과 관계 맺는 경험치를 쌓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덕분에 또 얼마나 얘기되지 않았던 것들이 폭로될까 생각해요.
그 생각을 하면 진짜 짜릿해요. 그 이야기가 훼손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상상도 못 했던 세상을 보게 될까 두근거리죠. 그래서 저는 서로에게 너무 빨리 실망하지 않았으면 해요. 어떨 때는 여성에게 더 심한 여성 혐오가 보이기도 하거든요. 훨씬 더 가혹하고, 윤리적으로 아주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밀고, 비호감이나 미움을 더 쉽게 갖고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성한테는 너무 많은 걸 요구하잖아요. 마치 가상의 엄마처럼, 너무 무한한 사랑을 요구하는 식으로 그녀를 여러 면을 가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죠. 그래서 잘 연습해야 해요. 많이 용서하고 이해하면서 관계 맺도록 말이에요. 제가 그랬어요. 이전에는 어른이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이 여자들이 나보다 상처가 더 깊다는 것, 더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는 것, 따라서 이 존재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 여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느끼면서 달라졌던 것 같아요.
여성들에게 경악스러운 역사가 너무 많으니까요.
딸을 낳으면 죽이기까지 한 세대가 있잖아요.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 더 가부장제에 편입해야 했을 사람들이 있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달라지지도 않으니까요. 저는 그럴 때 오드리 로드를 읽는데요. 『자미』를 보면 자신의 모계 가족에 대해 가차 없이 쓰면서도 작가에게 미움과 원한은 다 불타 사라진 느낌이 있거든요. 그게 너무 좋아요. 오드리 로드가 책을 시작할 때 지금까지 자신을 만들어준 여성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얘기하잖아요.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타자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다 좋은 역할만 하진 않죠.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너무나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 역시 나를 만든 일부이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저에게는 너무 감동이에요.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과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경험한 여성혐오에 관한 글들은 너무나 유구한 동시에 현재적인 이야기였어요. “진실에 가까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상성의 렌즈를 벗어던져야 한다”(254쪽)는 문장에 밑줄을 긋기도 했는데요. 앎과 삶이 달랐던 시절, 작가님을 가장 괴롭혔던 것들은 무엇이었어요?
린 마굴리스나 바바라 맥클린톡 여성 과학자 얘기에 많이 이입했어요. 이들은 자기 이론을 새롭게 이야기하면서도 좀 다른 과학을 하거든요. 바바라 맥클린톡도 느낌에 대한 중요함을 많이 말해요. 저작의 제목이 『생명의 느낌』이고요. 근데 수업 시간에는 그들 이야기가 늘 안 좋게 묘사됐어요. 중요한 부분이 있지만 주류 학문에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혹은 너무 과하다고 여긴다는 식으로요. 선생님들 이야기라 따라가면서도 그 말들이 항상 마음의 생채기였던 것 같아요. 내가 이입할 수 있는 존재들이 주류 과학계에서 왕따이거나 부차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모습에서 계속 소외가 생겼죠.
사실은 두려웠던 거예요. 내가 이입하는 존재가 칼 세이건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엑스선 사진을 도난당한 로절린드 프랭클린처럼 안 좋은 사례들을 목격하고, 그럴 때면 여성으로서 내 운명도 비극적으로 상상하게 돼요. 그러니까 싫다고 느껴 거리 두고요. 난 저 여자들과 달라, 하는 식으로요. 그것에 더해, 대학원에서 성폭력을 경험했고요.
성폭력을 고발하고 싸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힘을 느꼈다고 한 부분이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진짜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당시에는 진짜 무서웠어요. 20대 초반이었고, 학생이니까 교수님이 얼마나 크게 느껴져요. 그런데 그 존재를 대상으로 싸워본 경험이 두고두고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이길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고요. 가까이서 보면 그 사람에게도 약점이 있거든요. 무엇보다 그가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것이 정말 강력한 경험이었어요.
세상의 “변화가 물결처럼 주변으로 퍼져”(197쪽)가는 장면 가운데, 특별히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제가 온라인으로 하는 글쓰기 수업에 중국 여자분이 수강하신 적이 있어요. <더 커뮤니티>를 보고 저를 팔로우를 하셨고, 쓰기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서 오신 거예요. 한국어를 못하니까 번역기를 사용해서 모든 걸 하셨는데요. 그 글이 정말 엄청났어요. 우리 진짜 큰일 났다(웃음) 생각이 들 정도로 장엄한 느낌이 있었어요. 심한 억압 등으로 만만치 않은 성장 환경을 경험한, 거기서 살아남은 어느 여자의 증언을 듣는데 놀라운 자연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중국이 출판을 막고, 컴퓨터를 못 보게 하지만 누군가는 어떻게든 통로를 뚫어서 보고, 저를 팔로우해서 글쓰기 수업까지 듣고, 기술 덕분에 통역기를 사용해 함께 이야기 나눈 거잖아요. 정말 놀랍죠. 영어권이나 유럽권의 이야기를 수입해서 듣는 게 아니라 중국에 있는 여자와 한국에 있는 여자들이 직접 소통하는 데서 오는 짜릿함과 경이로움이 있더라고요. 이것이 저에게는 아무리 억압이 심해도,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면모라고 느껴졌어요.
지금 작가님께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제가 30대 중반이에요. 제가 저를 갈라 꺼내는 동안 친구들은 대체로 아기를 낳았습니다.(웃음) 정말로 자신을 갈라서 아기를 낳고 있어요. 저도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기존의 가족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좋은 건 계승하고,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건 멈추면서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하고요. 결국은 사랑에 대한 질문을 제일 많이 하고 있어요.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니까요. 추상화가인 힐마 아프 클린트는 여자들과 살았다고 하거든요. 그렇지만 상상과 현실을 어떻게 타협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만 하고 있는 중이에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출판사 | 동아시아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출판사 | 물결점
신연선
읽고 씁니다. 장편소설 『구름이 겹치면』, 에세이 『하필 책이 좋아서』(공저)를 출간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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