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읽다
[나이듦을 읽다] 인생의 겨울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법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겨울이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며 산다. 러너인 내가 내내 여름이길 바라는 것처럼 다들 자신의 인생에 밝고 환한 낮과 따스한 계절만이 계속될 거라 믿으며 산다.
글: 정세희
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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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달리는 곳은 사시사철 늘 같다. 하지만 같은 곳의 풍경도 참 부지런히 바뀐다. 겨울이 되면 눈에 띄게 황량해지는데 황량해지는 것이 풍경만은 아니다. 달리는 이들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한겨울에도 살아남아 추위를 뚫고 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달리며, “아니, 그 많던 러너들 다 어디간 거야?”라고 배신이라도 당한 듯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 추위를 뚫고 달리는 누군가가 ‘매일 달리던 그 사람, 요즘 통 안 보이네?’라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바로 나니까 말이다.

 

트레드밀에서는 영 달리기가 안 되는 나는 춥건 덥건 어쨌든 야외로 나간다. 달리기로 사계절을 지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텐데, 줄곧 밖에서 달리다 보면 계절의 요소요소를 다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계절을 타지 않고자 해도 야외 러너는 유난히 계절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된다. 

 

일 년 중 내가 가장 많이 달리는(러닝 마일리지가 길다고 표현한다) 계절은 단연 여름이다. 여름철 무더위와 습도는 달리는 이를 괴롭히지만, 여름에는 그야말로 느긋하게 달리기를 즐길 수 있다. 낮이 기니 시간도 여유롭다. 준비운동도 필요 없다. 그래서 달리기 관점에서만 본다면, 나는 여름이 길기를 바라는 편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름은 지날 것이고 가을은 다가올 것이다. 더위가 한풀 꺾일 때 나는 좋으면서도 불안해진다. 추워질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계절을 앞두고 마음을 여미게 되는 건 겨울이 유일한 것 같다. 겨울은 늘 나를 꽤 긴장시킨다. 몸이 움츠러들어서 마음까지 덩달아 그런 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마 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긴장은 훨씬 덜했을 것 같다. 매번 겨울을 맞이하면서는 ‘이번 겨울은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미리 항복하고 납작 엎드려 보낼 것인가’ 사이에서 쓸데 없이 갈등을 하기도 한다. 이번 겨울은 ‘집에 있는 건데, 괜히 나와서는 고생이다.’ 라든지 ‘바람이 진짜 야속하구먼.’ 같은 생각이 안 들도록 좀 덜 추웠으면 희망하기도 한다. 길고양이나 강아지들에게 괜히 마음이 더 가고, 돈과 시간만 허락한다면 어디 따뜻한 나라에서 좀 지내다 오는 꿈을 꾸기도 한다. 유난히 겨울에만 이런다.

 

동물이나 식물이 겨울을 견디고 나는 일을 ‘윈터링(wintering)’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겨울나기’다. ‘윈터링’ 이란 제목의 책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저자 캐서린 메이는 이 책에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인생의 휴한기’에 대해서 말한다.

 

 

겨울나기를 말하는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9월’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아직 겨울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때. 하지만 푹푹 찌던 더위가 걷히고 해가 짧아지며 슬슬 서늘해지는 기분이 드는 그 시기. 내가 매해 묘하게 가라앉고 알 듯 말 듯 활력이 떨어지는 바로 그 시기. 저자 캐서린 메이 역시 ‘어떤 겨울은 햇살 속에 온다.’라는 첫 문장으로 이런 나의 공감을 기가 막히게 끌어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겨울이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며 산다. 러너인 내가 내내 여름이길 바라는 것처럼 다들 자신의 인생에 밝고 환한 낮과 따스한 계절만이 계속될 거라 믿으며 산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은 꼭 겨울이듯, 우리 인생에도 겨울은 반드시 찾아온다. 누군가에게는 하루아침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실 대부분에게) 오는 줄도 모르게 아주 서서히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겨울은 오게 되어 있고 이것을 피할 자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에 겨울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금기시한다. 겨울은 피할 수 없으며 내가 원하지 않아도 겨울은 온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겨울을 견디고 있는, 한겨울을 보내는 사람들을 불행하고 실패한 사람들처럼 여긴다. 

 

자연의 동물과 식물은 겨울이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 겨울이 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지도, 겨울을 피하지도 않는다. 대신 동물과 식물은 겨울을 잘 보내기 위해 충분히 미리 준비한 다음 시야에서 사라져 현명하게 겨울을 보낸 다음, 다시 나타난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이다. 스스로를 쇄신하며 추운 계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겨울이 지나면 더 높게 도약했다.  

 

겨울은 호된 계절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자꾸 겨울을 밀쳐내려고만 했다. 계절로서의 겨울도, 또 인생에서의 겨울도 준비하고 받아들이고 단단히 견뎌야 한다는 것을, 저자 캐서린 메이는 우리에게 깨우쳐준다. 이번 겨울은 이 책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를 만난 덕분에 좀 더 든든히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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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희

2001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의학석사 및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오리건 헬스 앤 사이언스 유니버시티 파킨슨센터 방문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 재활의학교실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재활의학과 전문의로 2007년부터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재활의학과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뇌신경질환과 소아질환을 가진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음악, 미술 그리고 글은 좋아하지만 체육도 좋아하는 줄은 모르고 살다가 전공의 시절 우연히 달리기 시작한 후로 20년 넘게 달리고 있다. 뇌를 치료하는 재활의학과 의사가 된 지도 20년이 넘었다. 뇌를 보다 보니, 그리고 달리다 보니 달리기가 그저 운동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30회 이상의 풀코스 마라톤을 달렸고, 최고기록은 2022년 시카고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38분 23초다. 평생 건강하게 달리는 것이 모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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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메이

영미권의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작가”라는 찬사를 받는 에세이스트. 남편과 아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 위츠터블에 살며 유수의 언론사에 논평 및 에세이를 기고하고 있다.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 대학교에서 문예 창작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했다. 작가는 일과 육아, 인간관계로 매일이 혼란스럽던 30대 후반의 어느 날,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는다.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는 진단을 받기 전, 장애 징후를 어렴풋이 느낀 작가가 험준하고 가파른 영국의 해안길을 걸으며 그동안의 상처와 인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정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삶을 바라보는 숭고한 시선과 섬세한 문장으로 가득한 이 책은 “불행과 고통 속 깊은 통찰이 빛나는 책”이라는 평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인생의 힘겨운 순간을 ‘겨울’에 비유하여 쓴 에세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Wintering)』는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책을 계기로 팟캐스트 <더윈터링세션스(The Wintering Sessions)> 진행을 맡게 되었고, 전 세계 팟캐스트 베스트리스트(ranks in the top 1%)에 오르기도 했다. 『위츠터블 하이 타이드 스위밍 클럽 』, 『52가지의 유혹』, 『버닝 아웃』 등을 출간했으며 지금도 꾸준히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