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티나 성당에 무사히 도달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이후 파리로 넘어가 루브르를 방문하기 전이었으므로, 바티칸은 그 전체가 내게 난생처음 경험하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박물관이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길은 좁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끝이 없었다. 기둥과 벽과 천장, 창틀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빼곡한 디테일 속에 인류가 만들어낸 물건들이 끝없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물건들을 보려고 관객의 행렬도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방문했던 기간은 이집트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서 피라미드에서 출토되었다는 미라도 몇 구 진열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미라가 왜 바티칸에 있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좁은 통로를 연이어 지날 때면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그토록 실감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들반들해진 대리석과 따뜻한 색감의 돌로 이루어진 내부에서는 나무나 종이의 냄새, 그것들을 관리하는 약품 냄새와 다양한 인종의 체취가 섞여 코도 길을 잃었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인류 역사의 잔해 사이를 흘러 다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길을 잃어서 반나절을 헤맸음에도 성 베드로 광장에는 진입도 못 하고 미술관을 계속 돌고 있었다. 몇 번째 마주치는 미라를 보며 나도 저렇게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기 시작했다.
호들갑 떨고 싶지는 않지만, 단체 관광객을 따라서 간신히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자, 나는 피로도 잊고 괴테가 왜 『이탈리아 기행』에서 시스티나 성당을 보지 않고서는 한 명의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상상할 수가 없다고 말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그것은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어떤 극단이었다. 경지라는 말이 맞았다. 바닥을 제외한 벽과 천장 가득 성서의 내용과 성인의 모습을 화려하고 섬세한 색감으로 칠한 프레스코화가 빈틈없이 그려져 있는 내부는 어떤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건축이 가진 선과 면이 구분되지 않았다. 좁은 것 같기도, 넓은 것 같기도 했다.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 흐르며 살거나 돕거나 죽거나 벌받는 인물들의 표정은 곧 다른 표정을 지을 것처럼 실감 나서 섬뜩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므로 신자가 느낄 경외심이나 감동을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신을 꺾는 믿음이 이곳에서는 과연 가능하리라 여길 만큼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체감할 수 없는 영성의 느낌이 가득했다. 더군다나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성소임을 인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순간 목소리를 죽이며 고개를 들고 다 함께 천장을 바라보는 집단 경험은 어쩐지 시공간의 일부가 잠시 멈춰 서는 기묘함도 동반했다. 경찰 제복 같은 걸 입은 요원이 중간중간 서서 관광객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silence!’하고 외쳤다. 조용히 하시오. 사진 촬영도, 목소리를 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안내 책자에는 프레스코화의 보존을 위한 조치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그 구도에서 나는 어떤 유물이나 작품보다도 바티칸의 권위를 체감했다. 사진을 찍거나 시끄럽게 떠들면 개인이든 단체든 일정 기간 바티칸으로 입국이 거절된다. 이곳은 신이 개입하는 공간. 이 안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원인으로 여겨졌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적합한 로마를 돌아다니며 살이 데는 유럽의 뜨거운 늦여름 햇빛을 맞으면서도 내내 시스티나 성당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느끼한 끼니의 더부룩함을 미지근한 아이스 커피로 누르면서도 그늘에 앉아 생각했다. 인간이 신의 권위를 복각하고 끝내 소유하고자 만든 도시. 그래서 길에 놓는 박석 하나도 아름다워야 하는 도시. 그게 로마가 아닐까.
영화 <콘클라베>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영화 <콘클라베>를 보게 된 건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거한 직후였다. 한국에서 북미보다 다소 늦게 개봉한 이 영화는 본의 아니게 상영 중에 실제로 콘클라베가 열리게 됨으로써 입소문을 탔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콘클라베>는 교황이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새 교황 선출을 주재하게 된 토머스 로렌스 추기경을 주인공으로 한 정치 스릴러물에 가깝다. 로렌스 추기경은 서거한 교황의 생전, 자신이 맡던 추기경단 단장직을 사임하고자 간청했을 만큼 자신의 신앙과 교회 전반에 관한 어려움과 고민이 깊었던 상태의 인물이다. 영화는 전 세계 백 명 이상의 추기경들이 바티칸에 모여 세상과 격리된 채로 과반을 넘는 합의에 이를 때까지 몇 날 며칠을 새로운 교황을 뽑는 투표를 진행하는 과정인 콘클라베를 치르며, 추기경들의 교황이 되고자 하는 정치적 야망과 서로 다른 종교철학 사이에서 이 모든 걸 관리해야 하는 로렌스 추기경을 따라다닌다.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해가 뜨기 바로 직전에 생기는 법이라고 했던가. 현대 흐름에 맞춰 교회를 개방하고 성직에서 여성의 역할을 존중하며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수용하자는 쪽인 선대 교황이 중심이던 진보의 축과, 초대 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남성과 유럽 중심의 성직 문화를 보존하고자 하는 보수의 축이 대립하는 중에 각 축의 차기 교황으로 거론되는 후보들마다 결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시 미성년이었던 수녀와 혼외자를 만든 추기경부터 콘클라베를 이념 전쟁으로 사유하여 뒤에서 편을 가르던 추기경, 매관매직하여 받은 돈으로 파벌을 만들다가 들켜 선대 교황에게 파면 처분을 받은 사실을 숨긴 추기경까지. 평생을 바쳐 신께 헌신하고 수련하여 추기경이 된 자들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그들 또한 인간 탐욕의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만다. 이 와중에 추기경 명단에 없는, 선대 교황이 생전 임명했다는 비밀 추기경인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이 콘클라베에 입성한다. 비밀 추기경이란 가톨릭이 배척당하거나 종교 활동이 신변에 위협이 되는 국가에서 추기경을 배출하는 경우 그 임명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며 교황만이 인지한 채 비밀리에 실행하는 방법이다. 베니테스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선대 교황은 생전에 그를 비밀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로렌스는 갑작스레 등장한 베니테스에게 의심과 함께 그가 가진 신실한 성품에 점차 호감을 둔다. 진보 성향의 후보들이 여러 결함으로 제외되고, 투표가 진행되던 시스티나 성당이 근처에서 일어난 무슬림의 자살 폭탄 테러로 지붕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다음 투표에서 거의 차기 교황으로 확정될 듯 보였던 보수 진영의 유력 후보가 말한다. ‘저 무슬림들이 일으킨 행위를 보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전쟁과 저 짐승들과 전쟁할 지도자다.’ 그에게 찬동하는 추기경들과 저런 자가 교회를 이끌기를 바라느냐고 비판하는 추기경들이 소란스럽게 대립하자, 그 순간 베니테스 추기경이 일어나 말한다. ‘여러분들이 과연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나는 카불에서 선교를 하며 수많은 크리스천과 무슬림들의 시신을 보았다. 우리가 진정 싸워야 하는 것은 이처럼 테러를 일으킨 망상에 빠진 자들이 아닌, 우리 각자의 내면이다. 우리는 지금 증오에 굴복하고 편을 가를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과 남성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전통이나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바로 앞에 있는 미래여야 한다.’ 추기경들은 베니테스의 말에 침묵한다. 잠시 후, 투표가 재개되고 차기 교황으로 베니테스 추기경이 선출된다. 그는 세상에 불릴 제호를 고르라는 로렌스의 질문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인노첸시오’라고 답한다. 인노첸시오의 라틴어 어원은 순수하고 정결하다는 뜻이다. 과거 실존했던 인노첸시오 13세는 교회의 부패를 근절하고자 했던 교황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흰색 연기를 태우며 영화와 영화 속 콘클라베가 마무리되는 찰나, 로렌스는 선대 교황이 베니테스 추기경을 비밀 추기경으로 엄호했던 이유가 단순히 사역지의 위험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된다. 그는 인터섹스였다. 베니테스는 삼십 대 후반에 맹장 수술을 하다가 자신에게 난소와 자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선대 교황이 모두 알고도 그를 추기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로렌스를 베니테스가 위로한다. 처음엔 자신도 자궁적출술을 받으려 했지만, 이내 하느님이 주신 육체에 손을 대는 것이 오히려 죄를 짓는다는 생각에 수술을 받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이 특이점으로 인해 자신은 이 세상의 모든 확신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이 교회의 미래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베니테스와 대화 이후, 로렌스는 콘클라베 종료 후 격리를 해제하는 예배당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내 조용히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이 비밀을 지키기로 다짐한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고요한 경내를 잠시 비추며 영화는 묵직하게 암전한다.
영화 <콘클라베>
삶을 지나오면서, 내가 한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전부 가늠하지 않더라도 내 좁고 작은 삶의 내부만 들여다보아도 너무 많은 것이 변했고 여전히 변해간다. 의지와 계획은 얼마나 미련한 발버둥으로 남았던가. 견고하게 새겨 넣었던 우정은 채 십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름은 없고 바위만 남았다. 간직할만한 추억 속 내 소중했던 이는 어느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을 했던가. 미움은 쉽고 세월에는 책임이 없다. 이제는 온갖 죄가 다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일들은 전부 망가진 채로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 뚝뚝 끊기는 파스타 면처럼 우리는 같은 것이지만 하나는 절대 아닌 각자가 되어 시간의 위장 속에서 흩어진다. 나는 치워지고 싶지 않지만, 너를 취소하는 일은 너무나 익숙하다. 마음이 속과 겉을 따로 두는 일은 이제 숨 쉬듯 가능하다. 그런 오늘. 모든 어제를 통과하며 도착하고 싶었던 내일이 지금이 맞는지. 끝내 그러하리라 믿고 바라왔던 일들의 자리는 어느새 사막처럼 건조한 모래가 끝없이 가득하다. 그 모래사장 위에 앉아 꿈꾸었던 모래성은 파도도 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그저 온몸으로 둘러싸고 바람을 막아보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생존의 자세라는 건.
영화는 실제 현실 가톨릭의 상황과는 무관할 것이다. <콘클라베>는 종교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기 보다는 실험 변인을 통제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 신념과 헌신이 곧 계급이 되는 종교 사회를 배경 조건으로 빌려오는 쪽에 가깝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을, 세상을 축소한 모형으로 삼아 부감한다. 거기에 배척당해 마땅한 비정상적인 캐릭터를 하나 던진다. 그리고 관객을 로렌스의 자리에 두고 질문한다. 눈앞의 저 이가 정말 비정상으로 보이는가. 신도 실수를 하는가. 저 이가 신의 실수라면, 인간은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정상은 무엇이고 비정상은 무엇인가. 그것을 정한 것은 누구인가. 확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확신은 정말로 확신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옳은 가치라는 확신을 근거한다면 증오와 혐오에도 정의의 날개가 돋아나는가. 그러므로 당신이 과연 정의의 편인가, 아니면 정의가 당신의 편인가.
로마 일정을 마치고 아시시로 향하기 위해 테르미니역 복판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한 시간 남짓 동안 로마에서 소매치기가 가장 많이 활동하는 곳이 테르미니역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곁으로 다가오는 모든 이의 손에 가방을 찢기 위한 얇은 면도칼이 있지는 않은지 두리번거렸다. 이방인은 얼마나 쉬운 표적일까. 의심은 불신이 되고 불신은 정신을 피곤하게 했다. 도착한 열차에 올라 짐가방을 선반에 올려놓으면서도 옆자리 앉은 누군가가 내내 나와 내 짐을 지켜보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어쩌면 사람은 불신을 감당하기에 버거워서 쉽게 확신의 편으로 자신을 투입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전체의 색깔을 보호색 삼아 자신 위에 덧칠하는 본능을 과연 비난하기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확신을 확산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인간의 목소리가 훼손하는 것이 비단 신의 경당만은 아닐 것이므로. 어쩌면 인간의 목소리가 유일하게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천국뿐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온몸에 문신을 가득 새긴 근육질 서양인이 내가 주머니에서 떨어뜨린 지폐를 주워주거나, 지도를 보며 망설이는 찰나에 다가와 길을 골라주는 일 앞에서 나는 다만 자주 침묵하고 웃어 보였다. 기껏해야 서로에게 간신히 가장 친밀한 이방인이 될 수 있을 뿐이라면, 나 역시 앞으로도 당신을 두드리는 가장 조용한 방문객이고 싶었다. 침묵하는 자는 듣겠다는 자일 테니, 침묵이야말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로마를 빠져나가자, 승객들은 저마다 창가에 얼굴을 묻고 소들이 풀을 뜯는 푸른 평야를 말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도 도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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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기행 1
출판사 | 민음사
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우리 없이 빛난 아침』과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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