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 벽지에 돋은 푸르스름한 가루 곰팡이, 창가 콘센트 구멍에서 자라난 희고 긴 수염 곰팡이와 새카만 가루 곰팡이, 옷과 가방에 핀 흰 눈꽃 곰팡이, 책 모서리를 따라 피어난 회록색, 청색, 백색 곰팡이, 나무와 가죽 제품에 얼룩덜룩 무리 지은 회청색 곰팡이, 보기만 해도 께름칙한 독기가 감지되는 불그스름한 곰팡이... 곰팡이를 새로 마주칠 때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새로 놀라고, 새로 소스라치고, 새로 경탄했다. 곰팡이 앞에서, 아니, 집 안의 표면을 느슨하게 뒤덮은 곰팡이의 너울, 고치, 짜임, 엮임, 얽힘 안에서, 나는 온몸으로 반응했다. 내장에서 솟아 목울대를 울리는 헛구역질로, 눈물로, 말더듬음으로. 곰팡이는 내 삶의 것들에 달라붙어 변형시키고 부패시키며 나까지 죽이려는 듯했고, 그래서 나는 굴복하며 삶을 그만두고 싶었고, 이처럼 대단하게 살아 퍼지는 생존력을 향한 경외심에서 나 역시 그것처럼 기어코 살고 싶었다.
책꽂이를 점검하며 어떤 책들이 곰팡이에 취약한지 알게 되었다. 헝겊 장정본, 특히 값비싼 화집, 그리고 비닐 코팅이 안 된 반양장본처럼 비교적 좋은 펄프로 만든 책들. 곰팡이는 상당히 고급 취향을 지녔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책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곰팡이의 놀이터. 그리고 의외로 더스트커버로 싸인 책들도 곰팡이의 훌륭한 은신처인데, 이런 책들은 커버를 벗기면 예외 없이 커버 안쪽 및 그것과 맞닿은 책 표지에 곰팡이 무늬가 어룽더룽 데칼코마니처럼 찍혀 있었다. 곰팡이를 겪은 이후로 나는 화집 구입은 아주 신중히 하게 되었고, 중고서점에서의 책 구입은 절대적으로 멈추었으며, 더스트커버 책들은 매우 꺼리고, 비닐 코팅에 관해서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양산되는 환경의 관점에서는 반대하나 곰팡이와 내구성의 문제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이 지지하는 복잡한 심경에 빠지게 되었다.
곰팡이 못지않게 경외로운 것은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의 책들이었다. 특히 얇은 감색 표지의 작은 철학서들. 발터 벤야민 전집과 헤겔의 『미학 강의』는 주변의 다른 책들이 곰팡이 균사와 포자의 점령지가 되었음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은 채 깨끗했다. 질감이 부드럽지 않고 가슬가슬한 데다 빛에 약해서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래는 종이로 만든 책이 곰팡이에 강인한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작고 가볍고 튼튼한 이 책들을 닮고 싶었다.
깨끗한 책들을 따로 분류해서 원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H.에게는 헤겔의 『미학 강의』를 보내주었다. 자연스럽게 빛바랜 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H.의 손에서 헤겔의 책은 독서 매체가 아니라 작업 재료로 탈바꿈했다.
ⓒ 허정은, <살리는 놀이 - 수집, 기록, 콜라주 2015-2025>, 거울, 계단, 2025
H.의 〈에스테틱 콜라주〉는 제목 그대로 헤겔의 『미학 강의』 독일어판을 한 장씩 뜯어낸 다음 손바닥만 한 작은 낱장 위에 다양한 이미지를 오려 붙인 콜라주 연작이다.
H.의 작업실이나 전시 공간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H.가 십여 년 동안 수집한 다종다양한 사물들이 이루는 광경에 경탄하게 될 것이다. H.에게 도시의 거리는 인간의 산업과 생활에서 효용을 다하고 관심을 잃은 사물들이 기착하는 장소이다. 다가구 빌라가 밀집한 골목에는 이사로 들고나는 사람들이 내놓은 가구와 살림살이들이 쌓여 있기 마련인데, 대부분 무심히 지나치거나 심지어 피하며 불쾌해하는 구석과 모퉁이에 H.는 호기심과 애정을 품고 다가간다. 옥색 찬장, 체리색 서랍장, 자개 문갑처럼 붉은 벽돌 주택가가 조성되었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유행 지난 가구들, 괘종시계, 멜로디혼, 망가진 우산, 바구니, 그물 등 골목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이 상상되는 가재도구들을 H.는 버려진 그대로 또는 분해해서 자신의 작업실로 이주시킨다.
가로수길, 숲, 천변을 거닐면서는 등나무 꼬투리, 도토리, 감, 솔방울, 꽈리고추 같은 작은 열매, 구둣발에 짓밟힌 목련 꽃잎, 연밥, 벌레에 파먹혀 구멍 난 낙엽, 잘 마른 나뭇가지 따위를 주워 역시나 작업실의 테이블로 가져온다. 집에서 요리하고 남은 오이 꼭지, 멜론 껍질, 버섯 자루도 마찬가지다.
부서지고 녹슬고 낡고 다치고 깨진 금속, 나무, 플라스틱, 유리, 헝겊, 식물의 잔해는 H.의 테이블 위에서 만나 이전과 다른 미적 형태를 새로 얻고, 때로는 곰팡이가 돋아 서서히 쪼그라들며 고요하고 품위 있는 소멸로 향해간다.
H.의 작업실 책꽂이에는 헌책방에서 데려온 오래된 활판인쇄본 더미가 있는데, 내용과 무관하게, 마치 석양에 구운 얇은 비스킷처럼 종이 가장자리가 노르스름하고 작은 명조체 활자의 폭 패인 고랑에는 검고 맑은 빛이 고이는 것만 같은 물질적 아름다움 때문에 수집한 것들이다. 책에서 도려낸 단어들, 낡은 화집과 철지난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들은 폐기된 가구에서 빼 온 서랍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H.의 콜라주 놀이에 불려 나온다.
헤겔의 『미학 강의』도 바로 이처럼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기원한 종이 쪼가리들과 어울려 새 형식과 새 삶을 얻었다. 꽃과 과일 세밀화, 패션 잡지에서의 구두, 보석, 드레스, 화집에 있었을 법한 명화 속 오브제, 때로는 그저 색감이 아름다워 오려낸 무정형의 무엇 등은 헤겔의 글 위에 홀로 또는 여러 장 겹쳐 놓인다. H.는 콜라주를 만들 때 책의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종이 조각들의 어울림을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잔잔하게 광택 어린 용기에 마그리트의 신사와 주름진 열매가 담겨 있는 이미지 콜라주 위에 “Das Verschwinden der symbolischen Kustform (상징적 예술 형식의 소멸)”이라든가, 초록 독버섯 갓과 마치 녹은 얼음 조각 같은 이상한 형체가 겹쳐 놓인 이미지 아래 “Die Idee als Leben (생명으로서의 관념)”이라든가,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알 같기도, 주름진 내장 벽 같기도, 성모 마리아의 푸른 겉옷 같기도 한 종이 쪼가리들이 배치된 콜라주 아래 “Gott als des Schöpfer und Herr der Welt (신, 세계의 창조주)”처럼 내가 사전 없이도 조금은 알아볼 수 있는 낱말들의 연쇄체가 눈에 띄면, 나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 말들이 희미하게 내보이는 뜻과 H.가 무작위로 배치한 형상 사이에 다른 차원의 의미가 생성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나에게 미학 강의는 헤겔의 것만이 아니라 H.의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오염과 부패에서 건져낸 삶, 나아가 오염과 부패와 동시적으로 겪는 삶과 아름다움이 되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1828/29년 헤겔 미학강의
출판사 | 세창출판사
윤경희
문학평론가. 비교문학 연구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산문집 『그림자와 새벽』과 『분더카머』를 쓰고, 앤 카슨의 『녹스』를 비롯하여 그림책과 그래픽노블 여러 권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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