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담 위의 까마귀
산책을 제한된 시간 내에 마쳐야 할 때면 사람들은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돈다. 운동장이나 아파트 단지나 작은 공원 같은 곳들을. 나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출근 후 점심시간에 끼니를 대충 때우고 근처로 산책을 나선다. 회사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나오는데 단지 둘레가 나의 키만 한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뒷길로 접어들면 아주 다른 곳에 온 것만 같다.
아파트만큼, 어쩌면 아파트보다도 오래되었을 나무들이 곁에 서면 한눈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위로 뻗어 있고, 나뭇잎이 가지에 붙어 있는 계절 동안에는 햇빛이 잎 사이사이로 부서지며, 줄지어 주차된 노란색 학원 버스 안에서 기사님들이 자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재미난 영상을 보고 있는 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강이 나오는데 나는 한강보다도 한강에 이르기 직전의 그 길이 마음에 맞는다.
때때로 벽돌담 위에 까마귀나 까치가 앉아 있다거나, 무단 주차 단속 차량이 등장하여 노란색 학원 버스들이 줄지어 길을 빠져나가는 일 말고는 별다른 변화를 찾아볼 수 없는 길. 가끔은 길 위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칠 때도 있다.
나처럼 점심을 대충 때우고 산책에 나섰을 얼굴들을 지나칠 때의 태도: 인사를 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될 때까지 시선을 바닥이나 하늘에 두기. 서로 간 눈을 맞출 수 있을 때가 되면 입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인사. 가끔은 산책하시나 봐요… 간단한 안부를 묻기도 하고. 그러고는 서로를 지나 각자의 박자대로 걸음을 이어 가기.
그렇게 둘이었다가 다시 혼자가 되면 잠시 방금 지나친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점심은 뭘로 해결했을까? 왜 든든히 점심을 먹는 대신 걷기를 선택했을까? 무슨 마음으로 걷고 있을까?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이겠지….
비슷한 마음이리라 짐작되는 이와는 대화에의 욕구가 샘솟는데 그러지 아니함 혹은 그러지 못함은, 대화로는 우리가 비슷한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나누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과 닮은 사람이고 그래서 이렇게 빙글빙글 같은 길을 맴돌고 있답니다 하여도 대화는 너무도 예측할 수 없고 불완전하고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나는, 우리는 대화를 시작할 때 다다르고자 하였던 목적지에 이르기가 영 어려워진다.
나는 마음을 나눠 보고 싶은 상대와 서로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대화를 하려면, 그리하여 목적지 인근에라도 함께 이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하고는 했는데, 상상 해결책 중 하나는 이것이다. 장르 불문, 서로를 생각하며 책 한 권을 쓴 뒤 교환하여 일독 후 만나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정보 한 가지… 이 생각에서 출발하여 쓴 중편소설이 올해 상반기 출간됩니다…. 어느새 올해라고 하면 2026년을 일컫는 날이 찾아왔네요….) 그러니까 산책길에서 유독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 있고, 그와 가까워지기를 꿈꿔 본다면 이런 장면이 가능할 것이다.
*
Day 1.
안녕하세요. 오늘도 산책 중이신가 봐요….
네. 기현 씨도 오늘 점심 대신 산책을….
그래도 식사는 챙겨 드세요.
기현 씨도요….
Day 2.
(가벼운 고개인사만 하고 지나친다.)
Day 7.
(오늘은 온전히 혼자 있고 싶은 날이기에 그를 못 본 체하고 지나친다. 나도 그를 보았고 그도 나를 보았을 수 있겠지만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Day 18.
(연이어 한파주의보가 발효된 탓인지 길에 사람이 없다. 꽁꽁 싸매고 즐겨 보는 겨울 산책. 누군가 불쑥 나타나리라는 염려를 덜 하여도 괜찮다.)
Day 30.
(아파트 단지 벽돌담이 낮아지는 부분, 담장 너머로 보이는 놀이터에서 그가 그네를 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네를 탔다가는 철봉으로 이동해 으으으 시원한 소리를 내며 몸을 푼다. 저 놀이터는 나도 자주 가는 곳인데. 벤치 가운데 눕기 방지용 손잡이 따위가 없어 잠시 몸을 뉘일 수도 있다. 다른 놀이터에 가면 점심을 펴 두고 먹을 만한 탁자도 있는데 그도 그 사실을 알까?)
Day 50.
어느 날부턴가 산책을 하지 않을 때에는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이라고 해서 산책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던 것이, 결국 산책에 대한 글이 되어 버린 것. 산책에 대해 쓰자면 유난히 자주 마주치는 얼굴에 대해 쓰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가 순간순간 관찰한 그, 그와 지나친 뒤 그에 대해 하였던 짧은 생각, 오후 근무 시간 자리로 복귀하여 해야 하는 일 따위가 점점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깨고 나와 이야기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Day 80.
안녕하세요. 그새 날이 많이 더워졌어요….
그러게요. 그래도 산책만은 변함없이….
이거 제가 여기 길에 대해 쓴 글을 좀 묶어 본 건데 심심할 때 읽어 보셔요.
어… 저도 비슷한 걸 써서 가지고 다녔는데. 마주치면 드릴까 싶어서요.
재미있게 읽을게요. 다 읽고 나서 점심 한번 같이 하죠….
네 저도 얼른 읽어 보고 싶으네요. 그날 점심 빨리 먹고 산책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볕 좋은 날 산책길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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