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책장
오은 시인의 책장 | 예스24
눈 내리는 1월의 어느 오후, 디디에 에리봉, 김민정 시인, 뮤지션 권나무의 새로운 작업과 함께 건네는 시인의 인사.
글: 오은
2026.01.12
작게
크게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저/이상길 역 | 문학과지성사


5년 전 이즈음,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위의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양 축인 ‘동성애자’와 ‘지식인’으로서 삶을 살다가 본인의 고향인 랭스로 되돌아가 노동계급 가정 출신인 ‘나에 대해 면밀하게 쓰기’를 감행한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되돌아본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되돌아볼 때만 나타나는 것이 있다. 잊고 싶었던 것, 하지만 끝끝내 몸이 기억하는 것, 나를 나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 이번 책에서 에리봉이 주목하는 대상은 자신의 엄마다. 하녀, 공장노동자를 거쳐 지방 도시의 연금 생활자로 살다가 건강이 나빠진 엄마, 평생 노동계급에 머물렀던 엄마, 랭스에 머물고 싶었으나 요양원에 입소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 엄마…… 그는 개인 차원의 슬픔에 머물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계급 및 나이, 질병 및 노화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병과 그에 따른 몸의 고통, 노화에 따른 자율성의 상실, 열악한 공공 보건과 요양원의 실상에 관한 연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진다. 존재의 취약성 속에서 어떻게 연대가 가능할지 묻는 그의 문장들을 아주 오래 곱씹게 될 것 같다.

 



『역지사지』

김민정 저 | 난다


한자를 처음 접했을 시기에 일거양득, 과유불급, 동문서답, 고진감래, 조삼모사 등과 함께 배운 사자성어가 바로 역지사지다. 이 사자성어를 제목으로 한 김민정 시인의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2009년부터 2025년까지 쓴 산문 중 생생함을 고스란히 머금은 글을 가려 모은 책이기도 하다. 쌩쌩하게 느껴질 정도의 이 생생함은 시간이 지나도 힘이 빠지지 않은 글, 여전히 시의적인 글로부터 비롯한다. 이 책에서 그는 급변하는 사회에서도 끝끝내 변하지 않는 편견, 차별, 부조리 등을 일깨우면서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기억을 잇대고 빗대고 맞댄다. 17년이라는 햇수 동안 강산은 변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어려움은, 인생살이의 어려움은 여전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말 그대로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여 봄”이라는 의미지만, 이 말이 가닿는 곳은 종래에는 “자기도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일 것이다. 그는 ‘인정머리’와 ‘주제 파악’, ‘분수’와 ‘염치’를 거쳐 시인으로서, 편집자로서, 한 가정의 장녀로서, 나아가 시민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골몰한다. 왜? 함께 살아야 하니까. 이 책을 다 읽으면 우리와 가족과 공동체를 거쳐 마침내 생면부지의 소외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로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나로 ‘잘’ 살기 위해서.

 



『보리 국어사전』

토박이 사전 편찬실 엮음 / 윤구병 감수 | 보리출판사


머리맡에는 늘 국어사전이 있다. 잠들기 전에, 잠시 숨을 돌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단어들의 놀이터 속에서 뛰놀고 싶을 때 펼친다. 습관이 굳어지면 자동 반사처럼 어떤 일을 수행하게 되는데, 내게 국어사전 보기가 바로 그런 일이다. 더 두꺼운 사전도 있지만, 쉬면서 보기에는 작은 사전이 제격이다. 『보리 국어사전』은 앉아서 읽기에도, 누워서 훑기에도 적당한 크기와 무게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왼쪽 페이지 위부터 오른쪽 페이지 아래까지 샅샅이 파헤친다. 파헤친다고 쓴 이유는 펼쳐지지 않은 책은 늘 하나의 거대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주나기잎’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마주나기잎은 “줄기 마디마다 서로 마주 보면서 나는 잎”을 가리키는데, 읽으면서 자연스레 머릿속에 연둣빛 이파리가 돋아난다. 마주나기잎은 서로서로 마중하는 느낌으로 자라날 것 같다. 다음에 만난 단어인 ‘속살이게’는 “조개나 해삼 같은 다른 동물 몸속에 들어가 사는 게”를 일컫는 단어다. ‘더부살이’라는 말보다는 ‘속살이’라는 말이 좋다. ‘잠자리’보다 ‘보금자리’가 더 아늑한 느낌을 주듯이. 국어사전을 보는 시간은 하염없다. ‘하염’처럼 늘 없기만 하는 것, ‘하릴’이다. 하릴없이 다음 장을 펼치면 할 일 가득하다. 아는 단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하게는 몰랐던 단어, 잘못 알고 있었던 단어, 몰랐던 단어…… 펼쳐야 책이 내용을 보여주듯, 알게 된 단어를 생활 속에서 꼭 써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알고 싶니 마음, 심리툰』

팔호광장 저 | 큐리어스, 2020


마음이 참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도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하는데, 상대의 마음은 오죽할까. 누군가의 마음을 짐작하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언감생심(焉敢生心)도 마음을 품고 있는 단어니, 우리는 짐짓 아닌 척하면서도 늘 나와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며 사는 셈이다.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팔호광장이 쓴 『알고 싶니 마음, 심리툰』은 내 마음에서 출발해 인간관계의 어려움,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림과 일화를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심리학 용어를 쉽게 설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가 아닌 ‘이럴 수도 있습니다’로 연결되는 매 글의 마무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하다. 책을 읽으며 그때 억울함을 느꼈던 이유를 깨닫고 우월감과 열등감은 한 몸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던 두 문장을 옮겨 적는다. “당신도 다른 이에겐 별걱정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흉터는 멀리서는 안 보이니까요.” 겉으로는 더없이 밝고 활기찬 사람에게조차 고유한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악착같이 작은 흉터를 찾아내는 사람이 아닌, 작은 흉터가 있음을 알고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2년 전에 출간된 『알고 싶니 마음, 심리툰 ― 매운맛』(큐리어스, 2024)도 얼른 읽어야겠다. 마음에도 맷집이 생길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해야겠다.

 



<삶의 향기> | 앨범
권나무


2025년 가을에 나온 권나무의 네 번째 정규 앨범 <삶의 향기>를 2026년의 첫날에도 들었다. 작년 가을에는 뜨문뜨문 들었고, 겨울에 접어들 즈음에는 생각날 때마다 앨범을 열었다. 급기야 새해에는 매일 듣고 있다. 그의 이전 앨범에 비해 더욱 미니멀해서일까, 빈틈을 채우듯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단순한 노랫말이 만들어내는 묵직한 깊이감을 곱씹으면서, 지금 여기에 다다른 한 뮤지션의 순탄치만은 않았을 궤적을 헤아리면서. 그는 <두 마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꾸는 마음 떠나려는 마음/ 떠나기 위해 가꾸는 마음/ 떠나려는 마음 가꾸는 마음/ 가꾸기 위해 떠나려는 마음”. 서로를 목적 삼아 가꾸기와 떠나기를 반복하는 게 어쩌면 삶일 것이다. 그가 일군 밭과 앞으로 일굴 밭 들을 힘주어 응원하게 된다. 더불어 지금 떠나는 사람, 가꾸는 사람을 가만히 떠올려보기도 한다. 앨범에 실려 있는 곡 <새해>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곧 이런 노랫말이 흘러나올 것을 알아서다. “눈 감으면 반짝이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 새해에 날개를 달아주는 말이다. 삶의 어두운 곳마다 반짝임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감은 눈을 다시 한번 질끈 감는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 저/<이상길> 역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역지사지

<김민정>

출판사 | 난다

보리 국어사전 (2025년 최신판)

<윤구병> 감수/<토박이 사전 편찬실> 편

출판사 | 보리

알고 싶니 마음, 심리툰

<팔호광장>

출판사 | 큐리어스(Qrious)

권나무 - 삶의 향기 (The Fragrance Of Life)

<권나무>

출판사 | 마운드미디어

Writer Avatar

오은

2002년 『현대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 『없음의 대명사』 『나는 이름이 있었다』 등,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뭐 어때』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등을 썼다. 작란(作亂) 동인이다.